
빙판을 가르던 갈라의 여왕에서 코치 겸 안무가로 신예지
이 충격적인 사실은 동계 올림픽을 앞두고 식이장애로 2005년에 은퇴한 미국의 피겨선수 제니퍼 커크가 고백한 것이다. 의상이나 외적인 부분도 예술성으로 평가되고 점프 기술이 중요한 피겨 경기에서는 이런 점이 도드라진다. 김연아처럼 체구가 작고 선이 가는 선수들이 ‘대세’가 되면서 큰 체격의 선수들은 한층 다이어트의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최소한의 사이즈와 최대한의 근력을 갖춰야 하는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은 자신의 몸을 부정하게 만들거나 극심한 스트레스로 몰아넣을 수 있다. 신예지도 키가 167cm로 서구적인 체형이다.
“체구가 크면 기술 점프가 취약하기 때문에 체중을 줄이려고 노력했어요. 원래 마른 편이어서 성장기에는 충분히 먹으면서 운동했어요. 워낙 힘든 운동이라서 제대로 먹지 않으면 영양실조에 걸릴 수 있거든요. 한창 자라야 할 어린 선수들이 다이어트에 시달리는 걸 보면 얼마나 안쓰러운지 몰라요.”
어머니 허정미씨 말마따나 ‘가만히 있질 못하고 운동신경이 뛰어났던’ 신예지는 다섯 살 때 부모님을 졸라 피겨스케이팅을 시작했다. 아이스링크에 놀러갔다가 스케이트를 신은 순간 ‘자신의 일’이라는 감이 왔던가 보다. 힘들어서 안 된다며 반대하던 부모님도 결국 하나뿐인 딸의 지원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일찍부터 연습에 몰두한 덕에 뛰어난 기량으로 2004년부터 은퇴 전까지 국가대표로 활약했다. 하지만 운이 따르지 않았다. 한국 피겨 선수권 2위, 세계 주니어 선수권 3위가 최고의 기록. 전성기에는 피겨선수에게 치명적이라는 골반 부상에 시달렸다. 훤칠한 키와 다부진 몸에서 나오는 힘이 인상적이었던 그녀는 ‘갈라의 여왕’으로 불리기도 했다. 2009년에 은퇴하기 전에도 ‘페스타 온 아이스’에서 자신이 직접 만든 프로그램으로 갈라를 선보여 안무 실력과 카리스마로 관객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링크장에서 역동적인 동작을 하는 게 무척 좋고 음악을 들으면 그냥 움직이더라고요. 표현하고 싶은 어떤 것을 갖고 있었나 봐요. 제 의지로 피겨를 시작했기 때문에 아프고 힘들어도 선수생활을 포기하지 않았어요. 2004년 처음 국가대표로 활동할 때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어요. 부상에서 회복하는 데 오래 걸렸고 막상 회복하니 늦었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신예지는 2008년 서울여자대학교에 진학한 후 정작 운동에 집중할 때는 의식하지 않았던 다이어트에 대한 강박에 시달렸다. 운동선수가 아닌 어느 누구라도 스트레스를 받으면 먹는 것으로 풀고 싶은 욕구가 들게 마련이다.
“여자 선수들은 의상도 그렇고 아무래도 보여지는 데 예민할 수밖에 없어요. 학업과 운동을 병행하느라 받는 스트레스를 먹는 걸로 풀었어요. 그러다 기사가 났는데 소위 ‘굴욕 사진’이 난 거죠. 악플 때문에 힘들었어요. 제가 활동할 때는 인기 종목이 아니어서 관심을 받지 못했거든요. (김)연아를 보면 참 부러우면서도 얼마나 부담될까 싶어요. 하여튼 피겨 팬들의 관심 덕분에 제 안무가 호평을 받아 안무가로 변신하게 됐지요.”
그는 곽민정, 김연아 선수뿐만 아니라 수많은 피겨 꿈나무들의 코치와 안무를 맡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미 선수 시절부터 다른 선수들의 작품을 맡았는데, 매니저로 활약한 어머니 덕분에 어릴 때부터 늘 음악과 비디오를 보면서 안무에 필요한 자양분을 갖출 수 있었다.
“안무가 재미있고 적성에 맞아요. 아이스쇼 연출도 하고 싶지만 세계적인 선수들을 감당하기에는 아직 부족해요. 데이비드 윌슨처럼 유머와 카리스마를 겸비한 연출가가 되고 싶어요.”
피겨에 대한 열정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신예지는 연세대학원에서 스포츠심리학을 전공하고 있다. 선수를 관리하기 위해서는 기술 동작을 가르치는 것뿐 아니라 영양학, 스포츠 역학, 심리학까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현업에 있기 때문에 이미지 관리에도 신경 써야 한다. 여전히 다이어트도 진행형이지만 무엇보다 앞으로도 건강한 모습으로 스케이트를 계속 타고 싶다. 후배이자 제자들을 대할 때도 경험에서 우러난 충고를 해줄 수 있어 다행이란다.
“어린 나이에 시작하잖아요. 중요한 시합을 앞두거나 먹고 싶은 걸 참아야 할 때 스트레스가 커요. 자신이 컨트롤할 수 없는 부분, 눈앞의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자세가 필요해요. 마른 것보다 건강하게 오래도록 운동하는 게 중요해요. 피겨스케이팅뿐 아니라 운동하며 구슬땀을 흘리고 있을 모든 후배들, 그리고 청소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에요.”
■글 / 위성은(객원기자) ■사진 / 안진형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