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편안한 상태로 규정하잖아요. 그런데 요즘에 와서는 행복을 좀 더 심층적인 개념, 즉 ‘힘’으로 이해하는 것 같아요. 예컨대 남편과 일찍 사별한 주부는 결코 행복해 보이지 않지만 고난을 이겨내며 어린 자식들을 키우는 과정에서 틈틈이 행복을 느끼거든요. 또 성춘향이 이몽룡을 기다리며 절개를 지키는데, 그 과정은 대단히 고통스럽지만 길게 보면 성춘향이 느끼는 뿌듯함이 있잖아요? 그런 걸 보면 행복이라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큰 고통도 이겨내게 하는 힘인 듯해요.”
행복의 정의에 관해 묻자, 문용린 서울대 교수(65)는 마치 재미있는 강의를 하는 듯 이야기들을 술술 풀어놓았다.
“그런데 그걸 결코 즐거움이라고 얘기할 수는 없잖아요? 의미, 보람, 프라이드 이런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사람으로 하여금 고통을 이기게 하지요. 행복은 그런 측면도 강하게 있어요. 물론 보통 사람들이야 대부분 편안하고 즐거운 것이 행복이라 믿지만, 행복을 그렇게 단순하게 즐거운 상태로만 볼 수는 없을 거 같아요. 인생을 이끌어가게 하는 진정한 하나의 스피리추얼 에너지로 보는 것이 맞죠.”
스피리추얼 에너지(Spiritual Energy), 영성적인 힘을 이야기한다. 그는 구체적인 초월자 혹은 종교를 전제하지 않고도 존재하는 에너지를 뜻한다고 했다. 그리고 육체적 행복보다는 정신적 행복을 강조했다.
문득 성형수술에 대한 그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행복해지려면 아름다워져야 한다는 것이 요즘 사람들의 믿음이다. 젊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고희를 넘겨서도 ‘이왕 사는 거 행복하게 살겠다’라며 주름살 제거술을 받는 세상이다. 연구마다 결과가 다르긴 하지만 유방확대술 같은 성형수술은 일시적이나마 큰 행복을 준다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의 의견은 단호했다
“이미 2005년에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의 연구 결과가 나와 있습니다. 외모가 출중하다고 하는 이들이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통상적인 삶의 만족도가 높은가 하고 봤더니 전혀 그렇지 않더라는 겁니다. 성형으로 코가 오뚝해지고 눈도 커졌다고 해서 평생 기분이 좋을 거 같지만, 6개월 지나면 했을 때나 안 했을 때나 큰 차이가 없어요. 오히려 한 군데를 고치니, 다른 곳도 고치고 싶어지겠지요. 결국엔 자기 자신을 자꾸 그쪽으로만 집중시키니까 다른 걸 할 수 있는 기회를 뺏기는 거죠.”
자신을 발전시키고 행복을 증가시키는 데 들여야 할 시간과 노력을 외모를 바꾸는 데 허비한다는 이야기다. 비단 성형뿐만 아니다. 돈만 있으면 행복할 것 같은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비슷한 이유에서 그렇다.
“돈이 많으면 행복할 거 같죠? 하지만 돈이 많기 때문에 돈 버는 쪽으로 오히려 신경이 더 많이 가니까 행복이 줄어듭니다. 긍정심리학자들이 ‘돈 많은 사람들이 행복할까?’라는 주제로 연구를 하다가 얻은 결과예요. 돈 많은 사람은 돈 구매력이 늘어나는 것이지 행복 구매력이 늘어나는 건 아니지요.”
귀가가 기다려지는 행복한 가장
평생 교육자로서의 외길 인생을 살아왔고, 긍정심리학에 관한 한 국내 최고 권위자라고 할 만한 그다. 이론적인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을 만큼 정통할 테다. 그럼 실생활에서는 어떨까 궁금해졌다. 행복 대가의 행복은 무엇일까?
“귀갓길이 제일 행복한 시간이에요. 집을 향해 간다는 생각만으로도 그냥 좋아요. 집이 바로 코앞인데도 전화해서 오늘 저녁이 뭐냐고 묻기도 하고, 오늘 하루는 어땠느냐고 묻기도 하지요. 집에 가면서부터 가족과의 대화가 시작이 되잖아요. 그 자체만 생각해도 기분이 흐뭇해지네요.”
너무 거창한 답을 기대해서였을까. ‘집에 있을 때 제일 행복하다’라는 말은 ‘해는 동쪽에서 뜬다’와 같이 당연한 말인데도 순간적으로는 마치 ‘서쪽에서 해가 뜬다’라는 얘기라도 들은 양 생경하게 들렸다. 저녁 무렵 환하게 불을 밝힌 집처럼 행복해 보이는 풍경도 없다. 하지만 그 집에서 들리는 유일한 소리가 TV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라면 그보다 더 슬픈 것은 없을 것이다.
오랜 세월 강단에 서온 교수님답게 그는 인터뷰 중간중간 아주 적절한 비유를 들어 이해를 도왔다. 이번에는 그가 집을 장갑에 비유했다. 언뜻 듣기에 스케일의 차이가 엄청난 것 같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고개가 끄덕여지는 얘기다.
“장갑이 안 맞으면 맞는 장갑을 고르면 되잖아요. 그런데 ‘이게 엊그제 산 건데 왜 안 맞지?’ 하고 투덜대면서 겨우내 그 장갑을 낄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내가 언제나 행복을 느끼는 곳을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거예요. 물고기도 그렇고 새도 그렇고 다 자기가 쉴 곳은 편하고 아름답게 만들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그동안 우리는 크고 비싼 집에 대한 욕심만 키울 줄 알았지, 정작 아늑하고 행복한 집의 본연의 의미는 잊고 살아온 것이 분명했다.
스토리텔링의 시대가 열린다
“긍정심리학을 7, 8년 동안 연구하면서 행복은 학습되는 것이며 습관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곧 행복은 능력이라는 거죠. 종전에는 무조건 돈 많고 성공하면 행복해진다고 믿었었죠. 그래서 ‘행복해지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해’라며 강요했잖아요. 이게 행복을 종속변수로 착각했기 때문이에요. 행복은 독립변수인데 말입니다.”
행복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행복을 누리기 힘들다. 마치 ‘놀아본 사람이 잘 논다’라는 이야기와 같다고 했다. 그러므로 일찍부터 긍정적인 태도와 습관을 교육받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문 교수는 강조한다. 우리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공부 잘해 좋은 대학 나와 좋은 직장을 얻어서 돈 많이 벌면 행복하다’라는 말을 주문처럼 외우고 다닌다고 했다. 이런 단순 논리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잘못 알고 있는 것이라 게 그의 지적이다. 그러면서 부자 친구의 이야기를 꺼냈다. 서울 요지에 빌딩 몇 채를 가진 그는 천억원대 자산가라고 한다. 그러나 그의 삶은 행복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고.
“그렇게 돈 많은 사람의 유일한 행복이 등산하는 거랍니다. 그 밖에는 기껏해야 주말에 식구들 거느리고 비싼 호텔에 가서 밥 먹는 것을 들 수 있고요. 오페라 같은 고상한 취미를 가져보려고 했지만, 30분만 지나면 졸려서 별 재미가 없대요. 등산은 돈이 많고 적음을 떠나서 누구나 할 수 있잖아요? 전 우리나라 다수의 중산층이 얼마든지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는 행복의 구매력은 갖추고 있는데, 그 행복을 어떻게 구매해야 하는지 모른다고 생각해요. 행복의 쇼핑센터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죠.”
곰곰이 생각해보면 ‘행복 교육’의 이면에는 어두운 구석도 있다. 우리 세대가 행복을 교육하기 위해 애쓰는 것은 자신들의 불행에 대한 책임이 바로 자신에게 있다는 부정적인 통찰을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책임을 져버려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부모의 현재 삶도 행복해져야 하지 않을까? 행복을 교육받지 못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을까?
“불행한 일이지요. 지금 행복해질 수 있는 아무런 준비가 돼 있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여성들은 드라마 보는 게 최고예요. 아무런 준비가 없어도 보고 있으면 재밌거든요. 저녁 시간 이후에 여성들의 90%가 드라마를 본다고 하더라고요. 돈이 많으나 적으나 똑같아요. 그래서 제가 요즘 생각하고 있는 게,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해하고 스스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느냐 하고 가만히 보니까 ‘스토리텔링’이 제일이더라고요.”
그가 이야기하는 스토리텔링은 결코 어렵지 않다. 만담을 떠올리면 쉽다. 어떤 주제, 인물 혹은 사건에 대해 상세히 공부하고 전달하는 기술을 익혀 여러 사람들에게 그 지식과 감동을 전달하다 보면 스스로가 가치 있게 느껴지고 재미도 있으니, 행복해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모두가 스토리텔링에 능숙할 수는 없다. 스스로를 즐겁게 하고 남들도 기쁘게 하면서 의미 있는 일을 찾아 나아가면 된다는 이야기다.
참 스승의 마음으로
구체적인 행복 교육 실천법에 대해 물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주부들이 아이들에게 행복을 가르칠 수 있을까?
우리나라에 감성지수(EQ)라는 개념을 처음 소개한 그의 교육적 핵심은 정서였다. 이야기가 이어졌다.
“아이의 정서 상태를 긍정적인 상태로 전환시켜주는 것, 어렵지 않습니다. ‘네가 어제 이런 거 해보고 싶다고 그랬지? 엄마가 가만 생각해보니까 네가 했던 말이 일리가 있어서 그걸 들어줄까 싶은데, 어제 했던 그 얘기 좀 다시 해봐’라고 해보세요. 안절부절못하던 아이도 엄마가 관심을 보이면 긍정적인 상태가 돼요. 주변 사람들이 언제나 아이의 상태를 파악하고, 그 마음을 긍정적으로 바꾸려고 노력해야 해요.”
가슴 아픈 이야기지만 카이스트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들이 화제에 올랐다. 문 교수는 “그 똑똑한 아이들이 비극적인 선택을 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았겠느냐, 절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했다. 오랜 기간 자신의 감정을 읽어달라는 호소를 했을 텐데 거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 문제라며, 오래도록 걱정을 했다. 지금 나와 마주 앉은 그는 전 교육부 장관의 육중함은 전혀 느낄 수 없는, 제자의 안위를 진심으로 염려하는 참스승의 모습이었다. 8월이면 그는 오랜 세월 몸담았던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직에서 정년퇴임을 한다. “이미 방은 뺐다”라며 너털웃음을 지었지만, 어찌 만감이 교차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원래가 ‘도덕’ 전문이에요. 도덕 발달, 도덕 심리 쪽으로 공부를 했기 때문에 저의 기본 관심은 도덕에 있죠. 저는 도덕이라고 하는 건 교양과 상식이 있는 사람이 하는 행동이라고 봐요. 그런 사람은 어떤 딜레마의 상황에서도 교양과 상식에 입각해서 행동하죠. 그게 바로 도덕적인 행동이고요.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행동 방향, 즉 도덕적인 사회를 만드는 것이 제 꿈입니다.”
숨을 죽이고 듣게 되는 재미있는 그의 예시는 또 이어졌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들려준 이야기라는데, 한국인의 성품을 꼬집는 일화다. 아버지는 더우니 문을 열어놓으라고 하고, 어머니는 모기가 들어오니 문을 닫으라고 하는 상황이라고 치자. 보통의 우리라면 갈등 끝에 ‘누구 편을 들어야 혼나지 않을까’라는 결론이 이르게 된다. 그러나 문 교수는 여기서 중요한 것은 ‘팩트(Fact)’라고 못 박았다. 더위와 모기를 다 해결할 수 있는 결론, 즉 방충망을 설치하면 모두가 만족하게 되는 건데 얽히고설킨 인간관계에 얽매이느라 선뜻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앞날을 위한 해법을 물었다.
“그게 말입니다, 제가 전부터 하고 다니는 얘기가 ‘동서병행하자’라는 겁니다. 공적인 비즈니스는 서구적 합리주의에 입각해서 처리하고, 인간관계는 동양적 삼강오륜을 따르자는 얘기죠. 김 박사는 의사니까, 이를테면 동창이 병원에 찾아와서 먼저 진료를 봐달라고 한다 칩시다. 그러나 누가 찾아오더라도 대기 순번대로 하는 게 원칙이잖아요. 그러나 일을 끝내고 식사 자리에서 동창을 만났을 때는 ‘아까는 네가 기분이 상했을 테니, 내가 술 살게’라고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을 구분한다면 우리나라는 정말 살기 좋은 사회가 될 거예요.”
정년 퇴임 후 어쩌면 그는 더 바쁠 거라고 했다. 도덕적이며 동서병행이 이뤄지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일조하는 일 외에도 친절한 필자이자, 감동의 강연자로서의 문용린을 찾는 곳이 많기 때문이다. 한국예술문화교육진흥원 이사장 역할에도 더욱 충실하고 싶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인터뷰를 빙자해 개인 교습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시간이 빨리 갔다는 얘기다. 마지막으로 더 해주고 싶은 말씀이 없느냐고 묻자, 그는 예의 학생을 걱정하는 마음씨 좋은 교수가 됐다.
“아유, 됐어요. 얘기가 너무 이론적이라 쓰시기 쉽지 않겠는데요(웃음).”
문용린 교수은…
감성지수(EQ) 이론을 국내에 처음 소개하고, 행복 교육을 강조해온 우리나라 교육학계의 최고 권위자. 제40대 교육부 장관을 지냈으며, 8월 중 서울대학교 교육학과 정년퇴임을 맞는다. 「행복한 성장의 조건」, 「부모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쓴 소리」, 「부모가 아이에게 물려주어야 할 최고의 유산」 등 다수의 교육 관련 저서를 집필했으며, 군 복무 중인 막내아들에게는 권정생 작가의 「몽실언니」를 보내주는 다감한 아버지다.
여자보다 여자 마음을 더 잘 아는 여성 심리 전문가로 유명한 정신과 전문의. 고려제일정신건강의학과에서 일상의 스트레스에 지친 이들을 위한 상담을 하는 한편, ‘행복연구소 해피언스’를 통해 기업체를 대상으로 임직원의 스트레스 관리와 행복 찾기를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행복 멘토’라 불리고 있다. 2008년 1월호부터 3년간 ‘김진세의 인터뷰_긍정의 힘’을 통해 서른여섯 명의 긍정 아이콘들을 만나 그들이 가진 긍정의 힘과 행복 노하우를 독자들과 공유해왔다. 저서로는 「마흔의 심리학」(공저), 역서 「뜨겁게 사랑하거나 쿨하게 떠나거나」, 「심리학 초콜릿」, 「스타트 신드롬」, 「애티튜드」가 있다. 트위터 @happy_mentor
■글 / 김진세 ■기획 / 장회정 기자 ■사진 / 이주석 ■장소 협찬 / 그랜드앰배서더 서울(02-2275-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