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정년퇴임을 한 노 교수(실은 전혀 나이 들어 보이지 않지만)는 스스로를 ‘독거노인’이라고 불렀다. 외아들은 캐나다에서 정치철학을 공부하고 있고, 아내는 아들 뒷바라지를 한다고 했다. 혼자 살고 있지만, 그런 티는 전혀 나지 않았다.
“아주 좋아요. 우리가 고정적인 관념의 행복만 생각할 필요는 없는 거 아니에요? ‘부부는 반드시 붙어 있어야 한다. 가족은 함께 살아야만 행복한 거다’라고 말이에요. 물론 그렇기도 하겠지만 각자 독립군으로 자기 편한 대로 사는 것도 행복이지요. 이혼이 증가하면서 가정의 파괴가 는다고 걱정들 하는데, 저는 그렇게 안 봐요. 소위 일부일처제 혼인의 파괴인 거죠. 그렇다고 파트너십의 파괴는 아니잖아요. 생애의 반려자는 남는 거지요.”
결혼에 관한 그의 생각은 나이를 감안하면 다소 파격적이었다. 이혼, 자녀의 조기유학, 한 부모 가정, 비혼 등 전통의 가족 형태가 점차 변화하고 있다. 이런 형식의 파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지만, 어떠한 가족의 형태로 살게 되던지 부부관계의 중요한 측면인 ‘파트너십’이 유지될 수 있다면 결코 걱정할 게 없다. 그렇다면 이원복 교수가 생각하는 행복에 대해 물어보자.
“제일 중요한 전제조건이 자유라는 거예요. 행복이라는 것을 말 그대로 보자면 푸근하거나 부족함 없이 느끼는 것, 그런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그런 것을 느끼기에 전제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행복의 개념이 바뀌는 거죠. 돈일 수도 있고, 애정일 수도 있고, 가정일 수도 있고요. 제가 보기에는 자유예요. 우리 식구들 다 그래요(웃음). 그러니 독거노인 놔두고 신나게(웃음).”
자유로움. 행복의 가장 큰 조건 중의 하나이다. 어쩌면 생존의 가장 중요한 조건일 수 있다. 그렇다면 행복의 또 다른 중요 조건 중의 하나인 대인관계는 어떠할까? 자유로운 독거노인의 인간관계가 궁금해졌다.
“없어요. 저는 거의 다른 사회활동 안 해요. 왜 그러느냐면 자유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얽매이는 걸 싫어해요. 제가 우리 나이대 한국 남자에 비해서는 시간이 많은 편인데 그 첫 번째 이유가 골프 안 치고, (인위적인) 인맥 쌓기 안 하는 덕분이죠. 우리나라 사람들은 인맥관계 중요하게 생각하잖아요. 전 만화가이기 때문에 굳이 그럴 필요가 없지요. 내 일만 하면 되니까. 잡기를 안 하고 동창회 같은 모임에도 일절 안 나가니까 여유가 많아요.”
외로움, 누릴 줄 알면 자유다
그가 말하는 자유란 얽매이지 않는 것이라 했다. 물론 좋아하는 동기동창들 모임에는 한 달에 한 번은 꼭 참석하고 ‘장미살롱’이라고 불리는 그의 아파트에서는 ‘와인 모임’도 적잖이 갖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인간관계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혼자 있는 시간에는 무엇을 할까?
“책도 읽고, TV 봤다가, 영화 다운 받아서 보기도 하고, 인터넷 뒤지고… 할 거 많아요. 외로워 보여요? 외로움이라는 게 상황에 처해서 느끼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어릴 때부터 혼자 자라 버릇해서 그게 지금까지 이어지는 거 같아요. 외로움을 거의 안 타는 그런 타입이에요. 외롭다 하더라도 뭔가 대안이 있어요.”
‘시간도 많은데 사람도 안 만난다면 외롭지 않을까?’라는 걱정을 했는데, 그는 오히려 더 바쁘단다. 혼자 놀기에 익숙한 사람은 외로움을 더 잘 극복하는 법이다.
‘사람은 늘 행복할 수 없다.’ 우리가 가끔 잊는 명제이다. 늘 행복을 바라며 살기 때문에 불행해지면 몹시 힘들다. 언제나 타인과 어울리기를 바라기 때문에 외로움이 지독히 싫다. 하지만 늘 행복할 수 없다면, 다시 말해서 불행할 때도 가끔 있는 것이 인생이라면, 이 불행 뒤에는 또 다른 행복이 오지 않을까? 이번에는 그가 생각하는 불행이 궁금해졌다.
“제가 대단히 무딘 편이거든요. 그 덕분에 불행에 대해서 예민하게 느껴본 적이 없어요. 어쩌면 연구 대상일지도 모르겠어요. 보통 사람들과는 많이 다른 환경에서 자랐거든요. 7남매의 막내인데,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셨어요. 일찍부터 부모님과의 관계가 없었으니까 어찌 보면 ‘프리’한 거죠. 그걸 불행하다고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엔 어떤 면에서 굉장한 자유를 부여받은 거예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남의 돈을 받고 산 적이 없으니까 경제적으로 그때부터 자유로워졌고요. 또 대학교수라는 직업이 비교적 시간적으로 ‘프리’하고 지금에 와서는 더 ‘프리’해졌고(웃음).”
거리감 모르는 가족의 애틋함
이 교수의 부인이 궁금했는데, 좀처럼 관련 기사를 찾을 수 없었다. 내친김에 부인에 대해 물었더니 스마트폰 배경 화면을 삼은 사진을 보여줬다. 미인이다. 그는 아내와 15년 차이가 난다고 했다. 독일 유학 시절 만났다. 처가에서 반대가 심했지만 아내의 용기로 결혼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했다. 당시에는 파격적인 결혼이었고, 그 사연을 책으로 쓰자면 몇 권은 나올 것이라 했다. 하지만 결혼 후에는 거짓말처럼 나이 차를 모른다고 했다. 그런 애틋한 아내를 먼 타국에 두고 살려면, 노하우가 필요하지는 않을까?
“제가 결혼을 마흔에 했거든요. 그 나이에 결혼했다는 얘기는 혼자 사는 데 완벽하게 익숙해져 있다는 얘기죠. 솔직히 결혼을 하고 나서 늘 같이 있는 것도 힘들었어요. 상대방을 위해서 아무래도 나 스스로를 컨트롤해야 하니까 자연스럽지가 못했던 거죠. 그렇지만 같이 있다는 것도 좋은 면이 있으니까 함께 사는 게 아니겠어요.”
총각 시절 완벽한 자유를 누렸던 사람이 부부라는 틀 안에 얽매여 산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으리라. 그는 오히려 요즘이 더 행복하다고 했다.
“지금 오히려 어떤 그리움이 있고, 이상하게 신혼으로 되돌아간 느낌도 들어요. 오히려 상대방에게 조심하게 되는 면도 있고요. 다툼도 거의 없죠. 아무리 통화를 길게 하더라도 싸울 거 같으면 그냥 끊어버리면 그만이니까(웃음). 그래도 가까운 시일 내에 합쳐야지요. 내가 그리로 가건, 그 친구가 오건.”
자녀교육 원칙도 자율성
이원복 교수가 어렸을 때만 해도 그림을 그리면 “낙서하지 마라”라는 면박을 들어야 했다. 지금은 세상이 바뀌었다. 만화는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문화 콘텐츠로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아이가 만화가를 꿈꾼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아요. ‘우리 아이가 만화를 좋아하는데 이걸 어떻게 교육하면 좋습니까?’라고요. 그럼 전 이렇게 대답해요. 그냥 놔두라고요. 아이들이 만화를 좋아하는 건 당연한 성장 과정인 거예요. 일단 두고 보다 보면 거의 대부분은 딴 데로 관심이 옮겨가죠. 그럼에도 남는 아이들은 진짜 만화가의 길로 가야죠. 그때부터 트레이닝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원복 교수에게는 문하생이 없다. 대신 제자는 있다. 그는 “문하생은 나를 서포트해야 할 존재이지만, 제자는 내가 서포팅해주어야 하는 존재”라고 정의했다. 흔히 알고 있던 만화가와 문하생이 갖는 고정관념이 깨지는 순간이다. 석좌교수가 된 덕성여대에서 계속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그는 학생들에게 그림을 가르치지는 않는다. 제2의 이원복이 되면 안 된다는 신념으로 독창적인 길로 나아가길 염원한다고 했다. 행복한 삶을 위한 자녀교육도 마찬가지다. 누구를 흉내내고 따라 해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은 틀을 깨고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독창적인 삶을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다. 그의 이런 철학은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저는 아이의 의견을 전적으로 따릅니다. 잘못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도 많이 하죠. 하지만 자식의 문제는 부모가 컨트롤한다고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아이가 스스로 판단해서 하는 거기 때문에 자율로 남겨놓는 것이 제일 좋아요.”
그도 여느 아버지처럼 아이의 사춘기를 겪었다. 느지막한 나이에 얻었기에 오히려 더 조바심이 날 수도 있었을 텐데, 그의 ‘자유주의’는 자녀교육에서도 일관되게 적용된 모양이다.
“아들을 사춘기 시절에 유학을 보내면서 ‘딴 건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도 안 하고 우수한 학생이 되는 거, 그것도 중요한 게 아니다. 딱 두 가지만 약속해라. 마약 하지 말고, 네가 봤을 때 나쁜 아이들과 어울리지 마라’라고 얘기했는데, 그걸 지켰어요. 그럼 된 거죠 뭐. 부모가 곁에서 지켜보지도 않는데, ‘이거 하지 마라, 저거 하지 마라’ 해서 들을 애들도 아니고요.”
자녀교육에 있어 자율성을 강조하며, 동시에 환경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선하고, 악하고가 정해진 것이 아니라 환경에 따라 변하는 거라고 봅니다. 악한 환경에서 자라면 당연히 악한 성품을 가지게 되는 거죠. 성선설이나 성악설도 아니고, 그건 모래 같은 거라서 어느 그릇에 담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거죠.”
흔히 인간을 가장 불행하게 하는 것이 외로움이라고 하는데 인터뷰를 하다 보니, 그는 외로움에 당당히 맞선다는 느낌을 받았다.
“당당히 맞선다기보다는 저항할 상대가 아닌 거 같아요. 인간은 근본적으로 누구나 다 외롭지 않아요? 그래서 외롭다고 생각할 때 ‘내가 어떻게 하면 안 외로운가’를 떠올리면 또 외롭다고(웃음). 조르주 무스타키라는 그리스의 싱어송라이터가 부른 ‘나의 고독(Ma Solitude)’이라는 노래에 ‘나는 내 고독과 함께 절대 외롭지 않아’라는 가사가 나와요. 혼자 있는 것을 즐기자는 거지요.”
인간은 엄마의 자궁에서 나와 탯줄을 끊는 순간 이미 혼자라고 했다. 어쩔 수 없는 숙명이라는 것이다. 다만 맹수처럼 혼자 외로움을 모르고 군림하면서 사느냐, 아니면 영양처럼 떼를 지어서 사느냐의 문제라고 했다. 핵가족시대를 거치며 점점 외로움에 취약해지는 젊은 세대에 대한 걱정도 함께했다.
“과잉보호를 받고 자라서 그래요. 요즘 젊은이들은 아이가 하나 둘밖에 없는 세대라서 어려서부터 남부러울 것 없이 입고, 먹고, 보호받다가 어느 날 갑자기 혼자가 되니까 감당이 안 되는 거죠.”
부모들이 아이들의 요구를 너무 빨리 만족시켜주는 것이 문제이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은 조금만 좌절해도 쉽게 불행을 느끼고, 분노하고, 충동을 조절하지 못하게 된다. 최근 청소년들의 폭력성이나 자살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아이의 장래를 위한다면 원하는 것을 즉각 들어주지 말아야 한다. 조금 뜸을 들이면 인내심이 강한 아이가 될 수 있다. 단순히 참으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지금의 욕망을 억제하고 노력한다면 훗날 좋은 결과가 온다는 성공의 지혜를 익히게 하는 것이다.
“간혹 제 아내가 불평이라도 하면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자네는 페르시아 공주가 방석 아흔아홉 개 쌓아놓고 앉아서도 맨 밑에 깔려 있는 장미 가시 때문에 불편하다고 아우성치는 것과 똑같다’라고요(웃음). 사람이 예민해지면 그 어떤 것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법이죠. 우리 세대는 ‘행복하냐’라는 질문 자체를 못 받아보고 살았잖아요. 먹고살기 급급해서 그럴 여유가 없었지요.”
많은 사람이 동의하듯 행복은 관계 속에서 싹튼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행복은 좋은 관계 속에서 싹트기 쉽다. 통계적인 결과라는 뜻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혼자 지내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불행하기만 할까? “절대 그렇지 않다”라고 그가 말했다. 혼자 있으면 오히려 자유롭고 할 일이 더 많다고 했다. 그것을 즐길 수 있다면 외로움은 자유와 함께 행복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했다. 점점 독신 가구가 늘어나고 있는 이 고독한 사회의 불행에 나름 좋은 처방이 되지는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요즘 세대들은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이 교수는 불행에 가까워지기 쉬운 두 가지 키워드를 알려주었다. 바로 ‘비교’와 ‘탐욕’이었다.
“전 항상 그래요. ‘우리나라에서 행복해지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남하고 비교 안 하면 된다고(웃음). 비교하지 마라!’ 옆사람이 루이비통 가방 들었으면 그게 뭐 어때요? 나한테는 편리한 쌈지 가방 있으면 되는 거지. 그리고 탐욕은 불행의 근원이에요. 만약 탐욕을 없앨 수 없으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할 줄 알면 돼요. 99억원이 적어서가 아니라 1억을 못 가져서 불행한 게 아니겠어요? 모든 주부들이 느끼는 불행이라는 것도 아마 그런 것일 거예요.”
끝으로 정말 비교되는 일이 없느냐고 물었다.
“있죠! 예를 들면 안철수 원장 그 친구는 책 한 권 들고 대통령 선거에 나온다고들 하는데, 나는 열네 권을 냈거든(웃음). 그럼 나도 대통령 후보로 나갈까, 하고 농담하고는 웃는 거죠. 그런데 진짜 나가면 불행의 시작인 거지(웃음).”
이원복 교수는… 덕성여대 시각디자인학과 석좌교수. 어려서부터 만화에 빠져 있던 소년은 경기고 재학 시절 친구 아버지의 제안으로 그림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 일찌감치 만화가의 길을 걷게 됐다. 1987년 첫 출간 이후 국내에서만 1만5천 부 이상 판매된 베스트셀러·스테디셀러이자 그의 대표작 「먼 나라 이웃 나라」는 올해로 출간 25년을 맞아 개정판을 내며 만화계에 또 하나의 신화를 썼다. 그림 그릴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그는 지역별로 역사를 다룬 「가로세로 세계사」 시리즈를 통해 꾸준히 독자와 만날 계획이다. |
여자보다 여자 마음을 더 잘 아는 여성심리전문가로 유명한 정신과 전문의. 고려제일정신건강의학과에서 일상의 스트레스에 지친 이들을 위한 상담을 하는 한편, ‘행복연구소 해피언스’를 통해 기업체를 대상으로 임직원의 스트레스 관리와 행복 찾기를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행복 멘토’라 불리고 있다. 2008년 1월호부터 3년간 ‘김진세의 인터뷰_긍정의 힘’을 통해 서른여섯 명의 긍정 아이콘을 만나 그들이 가진 긍정의 힘과 행복 노하우를 독자들과 공유해왔다. 저서로는 「마흔의 심리학」(공저), 역서 「뜨겁게 사랑하거나 쿨하게 떠나거나」, 「심리학 초콜릿」, 「스타트 신드롬」, 「애티튜드」가 있다. 트위터 @happy_mentor |
■글 / 김진세 ■기획 / 장회정 기자 ■사진 / 이주석 ■장소 협찬 / 올레스퀘어(1577-5599, ollehsquare.k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