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희(49) | 커뮤니티 플래너
동네 곳곳에 빼곡하게 들어선 고층 아파트, 성냥갑처럼 자리한 회색빛 공동주택, 숨쉴 곳 하나 없이 늘어선 콘크리트 건물, 바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도시의 모습이다.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이들과 함께 어울리기는커녕 바로 옆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요즘, 삭막한 도시의 주거문화를 바꾸고 이웃과 교류하는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아파트를 비롯한 공동주택이 도시 전체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공동주택 1천만 가구 시대를 맞아 이웃 간의 화합을 도모하고 복지와 환경 개선 등을 통해 좀 더 살맛 나는 공동체 생활을 만들어나가야 할 필요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흐름을 타고 아파트 단지와 공동주택이 형성된 동네별로 이웃 간의 벽을 허물고 함께 나누기 위한 다채로운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반상회나 부녀회 같은 전통적인 형식의 커뮤니티부터 각종 소통 공간 마련, 체육대회나 바자회 등의 행사 개최, 교육과 문화 기회 공유 등은 물론 마을기업이나 사회적기업을 창출·운영하는 것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주민 모두가 함께 행복한 공동체를 형성해 나가고 있는 중이다.
시 차원에서도 본격적인 지원 사격에 나섰다. 서울시에서는 지난해부터 ‘공동주택 커뮤니티 활성화 사업’을 운영하며 단순히 관 주도의 일방적 개발이 아니라 주민 중심의 공동체 문화가 형성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특히 커뮤니티 플래너 양성 과정, 도시마을 기업가 코디네이터 양성 과정을 통해 공동체 활성화를 지원할 전문 인력을 배출해내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자원봉사에서 시작된 관심이 지역사회까지
지난해 2월부터 각 구청에 배치돼 활동을 시작한 커뮤니티 플래너들은 자치구 내 아파트를 돌며 현장 환경 파악, 공동체 활성화에 필요한 운영 계획과 프로그램 발굴, 자원봉사자 및 지역사회와의 연계 등 각종 컨설팅과 구체적 활동 지원을 담당하고 있다. 현재 서울 시내 25개 자치구에서 총 29명의 커뮤니티 플래너가 일하고 있는데, 은평구 커뮤니티 플래너 1호 이춘희씨 또한 이들 중 한 사람이다. 은평여성인력개발센터와 도시마을연구소가 공동 기획한 커뮤니티 플래너 양성 과정 2기를 수료한 이춘희씨는 자원봉사 상담가 겸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주부, 다시 시작하다]커뮤니티 플래너 - 일상을 공유하고 마음을 나누는 공동체 만들기
처음부터 직업을 염두에 두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각종 이론과 방법들을 배워나가는 동안 커뮤니티 플래너라는 일 자체에 차츰 흥미가 생겼다. 삭막하게만 느껴지던 도시에서도 정과 신뢰가 넘치는 마을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희망도 보였다. 커뮤니티 플래너 양성 과정과 연계된 도시마을 기업가 과정까지 수료한 이후 서류와 면접 심사를 거쳐 마침내 은평구청 주택과 소속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됐다.
“저도 8년 동안 아파트에서 살았거든요. 아파트 생활이 보편적이고 편리하긴 하지만 뭔가 부족하고 아쉬운 점들이 있었는데, 새로운 공동체를 고민하면서 그 해답이 조금씩 보이는 것 같더라고요. 아파트 생활을 할 때 딱히 부녀회나 주민자치회 같은 데 참여해본 적이 없어서 처음에는 조금 낯설기도 했지만 평소 워낙 ‘오지랖’이 넓은 성격이라 금방 적응되더라고요.”
주민들 스스로 만드는 살맛 나는 공동체
커뮤니티 플래너는 일주일에 4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관할 자치구 내 공동주택을 돌며 업무를 수행한다. 해당 아파트의 특성을 파악하고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문화, 교육, 건강, 봉사, 친환경 프로그램 등의 기획 및 운영을 돕는 것이 주요 업무다. 전면에 나서 프로그램을 이끌어나가기보다는 실제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주도적으로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나갈 수 있도록 지지하고 돕는 역할이다. 일종의 ‘촉매제’이자 ‘가이드’인 셈이다. 공동체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주민들이 스스로 필요성을 느끼고 노력해 성과를 얻어내는 과정이 수반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서로 친밀감도 생기고 계속해서 마을 활동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공동체 형성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민들의 뜻이에요. 따라서 일을 처음 시작할 때 가장 먼저 ‘이곳에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들은 무엇을 원하는지’부터 꼼꼼히 파악하죠. 제가 아무리 좋은 뜻을 갖고 있고 많은 정보를 안다고 해도 당사자들의 생각이 다르다면 아무것도 실현될 수 없거든요. 일단 세대별 구성과 입주민 연령대를 파악하고 특성을 반영한 프로그램을 기획·수집한 뒤 욕구 조사를 실시해요. 대체로 초반에는 반응이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꾸준히 접촉하고 결과물을 공유하면서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어요.”
아무래도 종전의 아파트 생활이 독립적이고 배타적인 분위기가 강한 만큼, 주민들의 생활 속으로 뚫고 들어가는 것 자체가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게다가 현재 커뮤니티 플래너 한 사람이 관할하는 범위가 넓어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곳의 사업을 진행해야만 한다. 그러다 보니 종일 바쁘게 뛰어다니는 것은 물론 정해진 근무 시간을 훌쩍 넘기기 일쑤다.
“주민들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듣고 어울리며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저녁 늦게 열리는 입주민 회의나 커뮤니티 행사에도 참여해야 해요. 문화나 봉사활동 등은 주말에 이루어질 때도 많고요. 지난주말도 한 아파트에서 텃밭을 만들고 자투리 공간을 활용해 쉼터를 꾸미는 작업을 도왔어요. 입주 가정 아이들과 함께 벽화 그리기도 하고 품앗이 모임 엄마들과 공부방 도배도 하고요. 비록 몸이 고되고 힘들었지만 모두 재미있어 하고 좋아하는 걸 보니 무척 뿌듯하더라고요. 덕분에 신나는 마음으로 일하고 있어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인 만큼 각자 성향도 생각도 다르기에 하나의 일을 진행하는 데만 해도 이것저것 어려움이 많지만,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바람직한 세상을 만들어나간다는 보람을 얻을 수 있다.
“저는 워낙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 이 일이 잘 맞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가정을 꾸리고 생활하는 주부들이 특히 잘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해요. 저희 활동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들을 만나거나 뜻하는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을 때는 속상하기도 하지만 어려움은 어디에나 있는 거니까요. 그리고 그보다 즐겁고 좋은 결과를 얻을 때가 더 많기도 하고요. 저는 제 이름을 걸고 뛰면서 돈도 벌고 성취감도 맛볼 수 있다는 점에서 무척 즐겁고 감사하게 일하고 있어요. 처음 커뮤니티 플래너 교육을 받을 때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하셨어요. ‘마을 안에는 보물이 가득하다’라고요. 그 보물을 캐내는 작업을 함께할 수 있어서 참 행복합니다.”
도시마을 기업가 코디네이터 양성 과정 안내
[주부, 다시 시작하다]커뮤니티 플래너 - 일상을 공유하고 마음을 나누는 공동체 만들기
문의 www.epwoman.or.kr
■글 / 이연우 기자 ■사진 / 박동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