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베어낸 참깨를 털다 보면 참깨뿐만 아니라 참깨에 붙어살던 기거나, 걷거나, 나는 온갖 벌레들이 다 떨어진다. 그것들을 보고 있노라면 참깨는 우리 인간 외에도 뭇 생명들의 터전임을 실감한다. 어디 참깨뿐이랴. 이 지구상 어느 곳이라도 숱한 생명들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간다. 그 조화를 생각하니 참깨 열매를 헤집고 꿈틀거리는 그들의 생명력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비닐하우스는 농작물을 말리는 것 외에 창고 기능도 한다. 손쟁기를 비롯해 여러 농기구, 뒷간에서 쓰는 왕겨도 보관한다. 밭에서 뽑거나 벤 풀들도 그곳에서 말려 퇴비를 만들 때 사용한다. 비 오는 날 장인어른과 나무토막 같은 것에 걸터앉아 막걸리를 주고받을 때는 나름대로 운치 있는 주막이 되기도 한다.
태풍이 할퀸 상처
지난번에 다녀간 태풍 볼라벤이 비닐하우스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우리 비닐하우스는 자연성을 최대한 살린다고 쇠파이프가 아닌 대나무를 사용해 만들었고, 또 대나무와 대나무의 연결 부분을 짚으로 꼰 새끼로 묶었기 때문에 그리 튼튼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그래도 대나무 뼈대 위로 비닐을 덮고 그 가장자리를 흙으로 두텁게 덮은 다음 다시 가장자리를 따라 말뚝을 박고 그 말뚝에 끈을 매어 하우스의 비닐을 고정시키는 방법으로 안전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다행스럽게도 그동안 웬만한 바람에는 피해가 전혀 없었다. 그것이 나를 방심하게 만들었나 보다. 시간이 지나다 보니 말뚝에 매어 하우스의 비닐을 고정시키던 끈이 비, 바람, 햇볕에 삭아 끊어졌다. 태풍 볼라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끊어진 끈을 다시 매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으나 ‘이번에도 괜찮겠지’하는 안이한 마음에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사실 끈으로 다시 묶는 데 걸리는 시간은 길어야 20분이다.
태풍 볼라벤은 유독 바람이 셌다. 사무실 부근 건물에 붙어 있던 커다란 간판이 떨어질 정도였다. 집이나 사무실에서 태풍 소식을 들으면서 내 마음은 비닐하우스에 가 있었다. 과연 무사할까 하는 불안한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괜찮을 거야, 이제까지도 괜찮았는데 뭘’ 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상황은 더 심각했다. 대나무를 고정시켰던 철사나 새끼가 힘을 쓰지 못하고 풀리면서 대나무가 튀어나와 비닐을 사정없이 찢어놓았다. 출입문도 고정시켜놓았던 대나무와 분리돼 넘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와이셔츠에 장화를 신은 도시 농부의 입장에서 그 순간에는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막막했다. 마침 이웃 밭에서 양봉을 하는 아저씨가 지나가면서 “바람이 너무 강했어”라는 말로 어깨가 축 처진 나를 위로해주었다.
태풍이 물러간 지 한참이 지났어도 난 아직도 비닐하우스 피해를 제대로 손보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비닐이 찢어진 곳이 하우스 출입문 쪽이라 가운데 부분은 비가 새지 않아 우선은 사용이 가능하다. 앞으로 대나무를 굵은 철사로 보다 강하게 고정시키고 비닐도 새로 사 덮어야 할 것 같다. 아무튼 이번 태풍 볼라벤은 순진한 초보 농부에게 제대로 한 방 먹였다. 타격이 컸는지 아직도 얼얼하다.
다시 최고의 정원으로
지금 우리 밭은 비닐하우스가 찢어진 것뿐만 아니라 이웃 공사 현장에서 밀려온 토사의 피해도 입어 엉망진창이다. 밭 바로 옆에는 나지막한 산이 있었다. 현재 그곳에 전원주택지 등을 만들기 위해 토목 공사가 한창이다. 처음 벌채만 했을 때는 나도 베어놓은 나무를 가져와 뒷간을 짓는 덕을 입었다. 그런데 흙을 파내는 토목 공사가 본격화되면서 조용하던 우리 밭의 평화가 깨지기 시작했다. 분주하게 오가는 대형 중장비들은 온종일 소음과 먼지를 일으켰다. 산에서 나온 흙으로 주변 농경지를 메웠는데, 비만 오면 그 흙들이 농로로 밀려나와 진흙탕을 만들었다. 전에는 밭에 가면 고요함 속에서 흙 밟는 소리, 김매는 소리를 느끼며 마음이 평안해지는 경험을 하곤 했는데 이젠 그것이 쉽지 않다. 농사가 주는 즐거움이 반감됐다.
그러던 중 더 큰 문제가 생겼다. 공사 현장에서 배수구가 막힌 것을 그대로 방치해놓아 큰비가 왔을 때 출구를 찾지 못한 그곳의 토사가 우리 밭으로 밀려든 것이다. 그 흙들은 내가 공들여 키운 고추, 고구마, 콩 밭의 고랑을 다 메웠다. 이제 우리 밭은 이랑(두둑)과 고랑(이랑과 이랑 사이의 낮은 부분)이 없이 평평하게 되어버렸다. 농작물은 바람이 잘 통하고 물이 잘 빠져야 한다. 고랑과 이랑이 그 역할을 하는데, 이제 우리 밭은 당분간 그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됐다.
난 그동안 밭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만들기 위해 흙 위로 비닐을 덮지 않았고 짚이나 새끼를 이용함으로써 비닐 끈 사용도 최대한 자제해왔다. 밭고랑은 수시로 손쟁기질을 해 풀을 매는 것은 물론 밭 모양을 예쁘게 잡아왔다. 생태뒷간의 지붕을 솔가지로 덮고 그 위로 호박을 올렸다. 그렇게 가꾼 우리 밭은 내 딴에는 최고로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그 때문에 밭에 갈 때마다 흐뭇한 마음이 들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태풍과 토사 피해를 입고 난 지금은 농사를 짓고자 하는 마음이 많이 가라앉았다. 참깨를 심었던 곳에 무와 당근 씨를 뿌려 싹이 나오고 있지만 왠지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최근에 입은 상처가 크긴 큰 모양이다.
오늘은 장인어른 밭에 가서 고구마를 몇 개 캤다. 그곳은 토사 피해 없이 이랑과 고랑을 잘 유지해 비 온 직후임에도 흙에 물기가 많지 않았다. 흙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빨간색 고구마가 무척 예뻤다. 우리 고구마는 장인어른 것보다 늦게 심어 아직 캘 때가 되지는 않았지만 얼마나 자랐는지 궁금했다. 고구마를 캐려고 어미 줄기를 찾으려고 했으나 밀려온 토사가 다른 줄기들까지 다 덮어 제대로 찾을 수 없었다. 간신히 하나 찾았는데 흙에 물기가 듬뿍해 끈적거렸다. 캐낸 고구마는 진흙이 잔뜩 묻어 본래의 색깔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올 농사는 고구마, 콩을 거둔 다음 새로 밭을 제대로 만들어 마늘과 양파를 심을 때가 되어야 기운이 날 것 같다.
필자 오원근은… 1996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10년간 검찰에 몸담았던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들은 뒤 돌연 사직서를 제출했다.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조직이 더 이상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이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변호사 겸 농부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농사일을 거들며 자연 속에서 느꼈던 행복을 되찾은 그는 지금도 농사 공부를 하며 마음 수련에 한창이다. |
■글&사진 / 오원근(변호사·농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