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청주 복대중학교에 강연을 다녀왔다. 가보니 나 말고도 교사, 경찰관, 소방관, 소설가, 기업인 등 강연할 사람들이 많이 와 있었다. 학생들에게 장래 희망 직업을 물어보고 숫자가 많이 나온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각각 섭외한 것이었다. 법조인을 선택한 학생들이 많을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의외로 20여 명에 불과했다. 학생들에게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행복한 귀농일기]살아 있음에 대한 확신](http://img.khan.co.kr/lady/201211/20121112162352_1_nong_dir1.jpg)
[행복한 귀농일기]살아 있음에 대한 확신
내가 그렇게 소심했던 것은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소작농으로 가난했고, 아버지의 술버릇 때문에 집안 분위기도 어둡고 우울했다. 어머니는 그런 속에서도 자식들을 가르치기 위해 오일장에서 곡물 노점을 하며 무던히 애를 쓰셨다. 그런 어머니에게 꼭 보답을 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공부에 매진했다. 고입 연합고사에서 충북 차석을 할 정도로 성적이 좋았지만, 정서적으로는 불안이 커져갔다. 정상적인 사회인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한 회의가 생겼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자율학습, 보충학습을 거부하고, 기말고사 때 전혀 공부를 하지 않고 시험을 봤다. 칼로 팔뚝에 자해를 하기도 했다. 3학년 때는 마음을 다잡고 공부를 했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해 지방 대학에 4년 장학생으로 들어갔다.
대학에서도 방황을 하다가 군대를 다녀온 뒤 3학년에 복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사법시험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겨울방학 때 충남 조치원에 있는 한 고시원에 들어갔다. 열심히 공부했는데 한 달 정도 지나면서 정서적으로 어려움이 생겼다. 자꾸만 책 위로 어머니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고생하는 어머니에게 보상을 해야 한다는 강한 부담이 그렇게 나타난 것 같았다. 보다 본질적으로는 어릴 때부터 억압됐던 정서가 그런 식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일 게다.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스트레스가 무척 심했다. 심지어 하혈까지 할 정도였다. 다행히 어떤 분의 도움을 받았는데, 공부를 놓으면 더 불안하니 제대로 되지 않더라도 책을 놓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불안을 억누르려고 하지 말고 그냥 지켜보라고 했다.
정말 원하는 삶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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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귀농일기]살아 있음에 대한 확신
봄이 왔다. 어느 날 죽은 것만 같았던 나뭇가지에서 연초록 새싹이 터져 나왔다. 3개월여 의심 끝에 그 나무가 살아 있음을 확인한 난 무척이나 기뻤다. 내 얼굴이 환해졌다. ‘아, 나도 살 수 있겠구나, 변할 수 있겠구나’ 하는 분명한 믿음이 내 안에서 생겨났다. 살아 있음, 변화에 대한 강한 믿음. 그것은 내게 엄청난 깨달음이었다. 자꾸 움츠러들기만 했던 내 삶은 그때부터 확장되기 시작했다.
그동안 내가 부담을 느꼈던 책 위로 떠오르는 어머니는 실재하는 어머니가 아니라 내 강박관념이 만들어낸 거짓 어머니임을 깨닫고 그 어머니를 버렸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비롯한 다른 가족과의 인연에서 겪는 문제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임에도, 그 전에는 내가 그것을 다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은 하고, 안 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 이렇게 마음을 정리하니, 책 위에서 어머니가 사라졌고 공부에 더 집중할 수 있었으며 대인관계도 한층 원만해졌다. 정서적으로 건강해지면서 사법시험에 자신 있게 합격하고, 아내와의 만남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이러한 자연스러운 삶의 태도가 2009년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셨을 때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검사 옷을 벗고 1백 일간 출가해 행자생활까지 하게 한 것 같다.
학생들에게 “학교, 부모, 책 등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 하기보다는 그것이 정말로 맞을까 하고 의심하면서 정말로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법조인도 그런 과정에서 선택해야 행복하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내가 법조인을 택한 것은 동기가 불순했다. 정말로 내가 원했다기보다는 어머니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시작한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을 키우는 방법
살아 있다는 것은 변화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도시에서는 이 변화를 제대로 경험할 수 없다. 콘크리트 건물, 아스팔트 도로도 모자라 학교 운동장까지 인조 잔디로 도배한다. 이렇게 획일적인 도시에서 어떻게 생명이 제대로 살아가겠는가. 어떤 때는 내가 정말로 살아 있는지 의심이 들 때도 있다. 등산 인구가 폭발적으로 느는 것도 자연과 함께하면서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려는 본능적인 욕구 때문은 아닐까?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농사는 정말로 제대로 사는 것이다. 무수한 변화를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살아 있음을 의심할 필요가 없을뿐더러 그럴 여유도 없다. 밭에 있는 작물들과 함께 변화해가니 말이다.
요즘 가을 들판은 점점 높아져가는 하늘과 반대로 무겁게 가라앉고 있다. 그런데 그 무거움은 부담스러운 무거움이 아니라 속이 여물어 꽉 채워져가는 흐뭇한 결실의 무거움이다. 싸늘해진 날씨 탓에 대기의 기운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데, 한여름의 들뜸이 정리되는 것 같아 기분이 나쁘지 않다. 오랜 기간 서리태 콩깍지의 안이 차지 않아 콩 농사 망치는 것 아닌가 걱정했는데, 어느 날부터 조금씩 굵어져가는 알이 만져졌다. 생태뒷간 화장실 위로 올라가 자리를 잡은 호박은 푸르게 무성했던 잎들과 노란 꽃이 사라진 뒤 홀로 남아 한결 짙어진 색깔로 연륜을 과시하면서 생명의 씨앗들을 속으로, 깊고 두텁게 보듬는다. 생태뒷간에서 만든 오줌 거름을 받은 무와 당근도 싱싱하게 자란다.
이른 새벽 자전거를 타고 밭에 다녀오면서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들판을 지날 때면 눈이, 아니 내 영혼이 황홀해진다. 새벽의 싸늘한 기운은 그 황홀함을 더욱더 절절하게 느끼게 만든다. 자연이 만들어내는 이 기가 막힌 아름다움. 이 아름다움을 정말로 내 것으로 간절하게 느낄 수만 있다면 속세에서 추구하는 돈, 명예, 권력이란 너무나도 하찮은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 이렇게 흙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자연(생명)의 무궁무진한 변화를 제대로 경험하지 못하고 죽는다면 얼마나 억울할까.
우리 밭에는 새로운 생명들도 자라나고 있다. 새로 심은 시금치, 쪽파, 아욱 등이다. 여름과 달리 금방 자라지는 않지만 흙을 뚫고 생명을 틔워낸 모습이 신기하기 그지없다.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밭에 갈 충분한 이유가 되고도 남는다.
어저께 새벽, 밭에서 파, 상추, 고들빼기, 양배추를 뜯어 내가 만든 의자에 나란히 올려놓고 사진을 찍어 카카오스토리에 올렸다. ‘아, 이렇게 살아야 하는데’, ‘이른 아침에 아기자기~ 행복이 느껴지네요’ 등의 반응이 올라왔다. 부러워하지만 말자. 바로 내년부터 조그만 평수의 주말농장이라도 분양받아 시작해보시라. 흙을 만지고 땀을 흘린 만큼 행복도 커질 것이다. 스스로 살아 있음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필자 오원근은…
1996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10년간 검찰에 몸담았던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들은 뒤 돌연 사직서를 제출했다.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조직이 더 이상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이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변호사 겸 농부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농사일을 거들며 자연 속에서 느꼈던 행복을 되찾은 그는 지금도 농사 공부를 하며 마음 수련에 한창이다.
■글&사진 / 오원근(변호사·농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