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추미여성대상 해리상 수상

제1세대 여성운동가 김정례 “제 생애 마지막 꿈은 남북 평화통일입니다”
올해 수상자는 해리상에 김정례 한국여성유권자연맹 고문, 달리상에 홀트일산복지타운 조병국 의사, 별리상에 노정혜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특별상에 서혜경 경희대 음악대학 교수이며, 각 부문별로 상금 3천만원과 상패가 수여됐다. 해리상을 수상한 김정례(85) 한국여성유권자연맹 고문은 이날 시상식에서 “이 상을 받게 돼서 영광스럽다”라면서 “상금은 평화통일을 위한 시금석으로 사용하겠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해리상은 여성의 지위 향상과 권익 신장에 기여한 사람에게 주어지는데, 김 고문은 제11대·12대 국회의원, 제20대 보건사회부 장관, 국무총리실 직속 여성정책심의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여성 차별 조항 개선에 노력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받았다.
시상식이 끝난 직후인 11월 초,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 위치한 김 고문의 자택을 찾았다. 잔디가 깔린 정원에 석류나무와 감나무를 심고, 다양한 종류의 장이 담긴 장독대를 손수 관리하며 여성계의 대모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김 고문. 그의 명륜동 집은 여성계 인사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아지트 같은 장소다.
김 고문은 자택을 방문한 기자에게 “비 오는 날에 찾아오느라 고생했다”라고 반갑게 웃으며 따뜻한 차 한 잔을 건넸다. 비추미여성대상 해리상 수상 축하 인사를 전하자 김 고문은 “영광스럽고 감사하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큰 상을 받은 것 같다”라면서 “앞으로도 다른 사람들에게 빛이 되라고 준 것 같아서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라고 겸손한 소감을 밝혔다. 차를 마시며 담소를 이어가던 김 고문은 담담하고 차분하게, 때론 진지하게 대한민국 1세대 여성운동가로서 녹록지 않았던 삶의 여정을 전했다.
법적으로 여성 차별 조항 개선에 앞장서
김 고문은 전라남도 담양의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났다. 집은 가난했지만 공부에 대한 욕심도 많았고, 성격 역시 매사에 도전적이고 진취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농촌에 있는 여성들은 대부분 못 배우고 가난해서 한평생 고생만 하는 것 같아 보였다.

제1세대 여성운동가 김정례 “제 생애 마지막 꿈은 남북 평화통일입니다”
그는 그 후로 1년 동안 농촌 여성들의 계몽운동을 계속 이어갔다. 또 그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입바른 소리를 자주 해서 경찰서에 드나드는 일도 잦았다. 집에서 아버지는 “여자가 밖으로만 나돈다”라며 노발대발했고, 결국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로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일도 생겼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김 고문을 둘러싸고 “담양에 여장군이 한 명 나왔다”라는 소문이 돌면서 아버지의 화는 누그러졌고, 담양군 관계자들은 김 고문을 두고 “앞으로 담양을 대표하는 여성 지도자가 될것”이라며 옹호하기도 했다. 실제로 얼마 뒤 조선민족청년단(청년들의 수련을 위해 결성된 청년운동단체)에서 ‘교육을 받으러 왔으면 좋겠다’라는 제의를 받았다.
“조선민족청년단의 슬로건이 마음에 들었어요. 국가지상, 민족지상, 비정치, 비군사, 비종교였거든요. 좌익과 우익을 따지지 않고, 서로 비판도 하지 않았죠. 이 나라 청년은 조국을 재건하기 위해 대한민국의 지도자로 성장을 해야 한다는 내용의 훈련이었어요. 당시 3백여 명의 여성들과 함께 훈련을 받았는데, 저희가 여성 1기였습니다.”
훈련을 마치고 담양으로 돌아온 그는 조선민족청년단 담양 지부를 결성하고, 담양군단부 여성 부장으로 활동했다. 이후 서울중앙단부 여성부 지방조직책을 맡았으나 1년 뒤 여자 청년단이 통합되면서 그 진행 과정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김 고문은 여자청년운동의 기틀을 확고히 했고, 국립여학도 중앙훈련소를 신설해 여군 창설의 기반도 다졌다. 또 1960년에는 국내 최초의 여성 주간지를 발행하는 여성주보사를 창설하고, 1969년에는 한국여성유권자연맹을 창립해 초대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여성의 정치 참여를 확대시키기 위해 주력했다.
“처음에 한국여성유권자연맹을 창립했을 때의 취지는 여성의 참정권 행사를 제대로 하자는 것이었어요. 나라가 잘되기 위해서는 유권자가 깨어 있어야 한다는 계몽운동에 주안점을 뒀죠. 지금도 정치는 우리의 생활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한국여성유권자연맹은 여전히 사회정의를 바로 세우고, 올바른 국회의원을 뽑도록 계몽하고 지도하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여성유권자연맹은 여성들의 사회 진출을 돕는데도 큰 역할을 해왔다. 김 고문은 “한국여성유권자연맹에서 배출한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해 사회 곳곳에서 많이 노력하고 있다”라며 “그동안 장관 4명, 국회의원 6명, 대학총장 3명, 한국여성개발원장(현 한국여성정책연구원) 2명 등을 배출했다”라고 밝혔다.
김 고문은 민정당 소속으로 제11대·12대 국회의원과 국무위원 및 제20대 보건사회부 장관도 역임했다. 또 국무총리실 직속의 여성정책심의위원회 부위원장을 비롯해 1991년에는 한국여성정치연맹을 창립하고 1, 2대 총재를 지냈다. 현재는 한국여성유권자연맹 고문, 한국여성정치연맹 명예총재로 활동 중이다.

1 (사)한국여성유권자연맹 주최 남녀모두행복한세상만들기 행사. 2 취로사업장에 나온 할머니를 위로하는 김정례 여사. 3 1983년 4월 한국여성개발원 현판식 하는 날. 4 김정례 선거대책본부에 격려차 방문한 윤보선 전 대통령.
김 고문의 가장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국회의원과 장관을 거치면서 법적, 제도적 분야부터 여성 차별 조항을 고쳐나가는 데 앞장섰다는 것이다. 우선 1980년 헌법시안에 ‘여성평등조항’을 삽입하는 데 큰 기여를 했고, 부모평등·부부평등·남녀평등 이념이 실현될 수 있도록 ‘가족법’ 개정 운동에 선봉으로 활동했다. 특히 보건사회부 장관 시절, 남녀차별 조항 개선, 근로환경 개선, 여성의 재취업을 위한 ‘재취업 특별법’도 추진하는 등 여성의 사회 진출 기반을 마련했다. 1983년에는 여성계의 오랜 염원이었던 한국여성개발원을 설립하고 청사를 마련해 오늘날의 한국여성정책연구원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기여했다.
“제 인생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여성운동가의 모습이 아닌, 아내와 엄마로서 김정례 여사는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20대 초반부터 여성운동에 빠져 살아왔던 김 고문은 아예 결혼 생각이 없었다. 워낙 외부활동이 많은 터라 결혼한 뒤 가정에 소홀하게 될까봐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고향 사람이었던 남편이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김 고문에게 반해 “인생을 함께하고 싶다”라며 손을 내밀었다.
“남편은 결혼 생각이 없던 저를 10년 동안 말없이 지켜줬어요. 그래서 결혼했는데, 하고 보니 잘한 것 같아요(웃음). 가정을 갖고 엄마가 돼보니, 여성의 입장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됐거든요.”

제1세대 여성운동가 김정례 “제 생애 마지막 꿈은 남북 평화통일입니다”
김 고문은 어떤 공식석상이든 한복을 즐겨 입는 것으로 유명하다. 20대 초반에는 활동성 때문에 바지를 자주 입었는데, 약혼식 때 우연히 한복을 입어본 뒤 한복의 아름다움에 반해 그 뒤로는 거의 한복을 입는 편이다.
“남자든 여자든 한복을 입으면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한국적인 정서도 느껴지고요. 그래서 공식석상에서는 무조건 한복을 입으려고 노력합니다. 여성계 인사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한복을 즐겨 입어서 한국의 미를 알리는 데 앞장섰으면 좋겠어요.”
김 고문을 포함해 국내외 여성계 인사들이 오랫동안 여성의 권익을 위해 노력해온 덕분에 지금은 여성의 정치 참여도와 의식수준이 매우 높아졌다. 김 고문 역시 그렇게 느끼고 있을까.
“제가 여성운동을 시작했던 건 시대적인 분위기도 강하게 작용했어요. 오랜 시간 여성의 정치의식과 사회의식을 높이고, 모든 분야에 주인의식을 가지고 참여하도록 계몽하는 데 많은 역할을 했다고 자부합니다. 물론 다른 여성단체들도 많은 활동을 해왔습니다. 지금은 여성의 지위가 많이 향상됐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김 고문은 “앞으로가 더욱 중요하다”라고 강조한다. 정보화 시대에는 여성의 역할이 지식이나 수준이 높아졌다고 해서 그걸로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21세기는 남녀가 함께 사회 참여에 앞장서고,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돼야 합니다. 여성이 주최자가 된 만큼 사회와 국가 발전은 물론 경제 발전에도 실질적인 역할을 해야 합니다.”
김 고문이 생각하는 여성의 남다른 경쟁력은 바로 ‘모성애’다. 모성애를 바탕으로 한 여성 특유의 친화력과 부드러운 정서는 남성에게 없는 여성만이 가진 장점이기 때문이다. 그는 여성의 이런 장점이 인류의 평화를 이룩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현재 여성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바로 여성의 높아진 의식수준에 발맞춰 과거보다 더욱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
“과거에는 남성들에게 가려져 기를 못 펴고 여성운동을 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여성들이 가진 자질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돼 있고, 또 여성의 지식수준도 매우 높아져 충분히 자질을 갖췄어요. 때문에 여성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적극적으로 여성의 사회 참여를 이끌어야 하고, 성 차별 없이 사회의 일꾼을 선발해야 된다는 것을 주장해야 합니다.”
올해 85세인 김 고문의 꿈은 ‘남북 평화통일’이다. 젊었을 때는 살아 있는 동안에 통일 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도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으니 답답할 뿐이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김 고문이 직접 ‘통일’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다고 한다.
“비추미여성대상을 받고 제가 달라진 점이 있어요. 해리상이 저에게 세상에 도움이 되라고 채찍질을 하는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죽을 날만 기다리지는 않을 작정입니다. 비추미여성대상의 상금 3천만원 역시 저의 염원인 통일운동을 하는 데 가치 있게 쓰고 싶어요. 제 인생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글 / 김민주 기자 ■사진 / 원상희 ■사진 제공 / 김정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