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덟이던 지난 1999년, 신장암으로 짧으면 6개월, 길어봐야 2년밖에 살지 못한다는 선고를 받았던 스기우라 다카유키. 그러나 13년이 지난 지금 그는 건강을 되찾았고, 결혼을 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어떻게 그에게 이런 기적이 찾아왔을까?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암 환자 지원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 스기우라 다카유키를 만나봤다.
시한부 인생 극복 체험
암에 걸리기 전까지 스기우라 다카유키는 평범한 청년이었다. 학창 시절엔 학생회장을 했고, 대학교를 졸업한 뒤 회계회사에 근무했으며, 술자리도 좋아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좋아하는, 무엇보다 직장과 일에 전념하는 생활에 만족하는 삶을 살았다. 이런 그에게는 근면, 성실, 우수란 단어가 따라다녔다. 남다른 점이라면 ‘내 자신을 위해 사는 게 아니라 타인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사는 삶이 약간 피에로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라는 정도. 그러나 충분한 수입과 마음 맞는 동료들이 있어서 인생에 회의를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 그의 인생이 180도 달라진 계기는 갑작스레 찾아온 병 때문이었다. 신장에 통증이 오고 갑작스러운 출혈이 있었다. 병원에선 피가 뭉쳤을 뿐 큰 병은 아니라고 진단했다. 그로부터 3개월 뒤 그는 암 선고를 받았다. “짧으면 6개월, 길어봐야 2년밖에 살지 못한다”라는 충격적인 진단에 몸서리를 쳤다.
스기우라 다카유키(이하 스기우라) 믿을 수가 없었어요. 당시 전 고작 스물여덟 살이었어요. 학생 때는 공부에, 회사 다니면서는 일에만 전념했어요. 못해본 게 너무나도 많았는데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니…. 연애도 제대로 못해봤고, 결혼도 못했고, 하고 싶은 일이 뭔지도 못 찾은 때였는데 말도 안 된다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공포, 불안, 절망감에 빠져 지냈죠.
LADY 암이 발견된 뒤 어떤 치료를 받았나요?
스기우라 바로 수술을 받았고, 두 차례에 걸쳐 항암치료를 했어요. 2개월 정도 걸렸어요. 제가 걸린 암은 신경모세포종으로, 주로 소아의 대뇌에서 발생하는 병이죠. 이 암이 신장에서 발생한 케이스는 당시 일본에선 20건 정도밖에 없었어요. 게다가 대부분이 치료를 해도 2년 이내에 죽음을 각오해야 합니다. 저도 그런 선고를 받았고요. 그렇지만 저는 2년? 아니, 벌써 13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살아 있답니다.
LADY 기적과도 같은 일인데, 암과 어떻게 싸워오셨어요?
스기우라 ‘기적’이란 얘기를 많이 들어요. 근데 기적이라기보단 저 자신이 다시 태어난 느낌이 들어요. 제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안 부모님께서는 자신들의 목숨을 걸어서라도 제 병을 고쳐보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 얘기를 듣고 부모님보다 먼저 죽는 불효를 저지를 순 없다고 결심했어요. 그때부터 암과의 싸움이 시작됐어요. 암과 싸우기 위해서 저는 성격, 몸, 생활습관 등 모든 걸 고치고자 마음먹었어요. 내 몸을 위해 건강한 식생활하기, 타인에게 너무 신경을 써서 스트레스 받지 않기, 바른 생활습관 익히기 등을 하나씩 실천해나갔어요. 먼저 식사요법을 시작했습니다. 현미와 채소가 중심이 된 식사를 했고, 고기와 생선은 거의 입에 대지 않았어요. 암에 좋다는 한약을 먹고, 한국에서 온 인삼도 먹었습니다.
LADY 그런 음식이 암을 이길 수 있게 해줬다고 생각하나요?
스기우라 음식도 어느 정도 효과를 주었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식사요법만으로 완벽히 낫는 것은 아니에요. 철저히 식사요법을 지켰는데 결과가 좋지 못한 경우도 있지요. 그래도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시도해보는 게 암 환자의 현실이자, 희망이지요.
“병실에서 꿈꿨던 대로 마라톤을 완주하고
결승선에서 기다리던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식도 올렸어요”
LADY 식사요법 외에 실천한 것들이 있다면요?
스기우라 암환자들이 쓴 책을 읽었어요. 그들의 병이 어떻게 나았는지 힌트를 얻기도 했지만, 암도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얻을 수 있었죠. 그리고 매일 암이 나으면 무엇을 할지 상상했어요. 대학 시절에 호놀룰루 마라톤대회에 나갔었는데 그 감동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었어요. 병실에 누워서 제가 땀 흘리면서 마라톤을 하는 모습, 결승선에서 기다리는 아름다운 여인과 포옹을 하는 모습, 그리고 그 여인과 결혼식을 올리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상상했어요. 살고자 하는 욕구가 솟구쳐 올랐죠.
암을 고치러 떠난 여행, 모든 문제는 내 안에
LADY 암 치료 직후 해외를 여행했는데, 마지막으로 다른 세상을 보고 싶어서였나요?
스기우라 수술 뒤 항암치료를 통해 암이 어느 정도 치유됐지만, 아직도 제게는 시한부 인생이란 꼬리표가 붙어 있었죠. 치료 직후 회사에 복귀했는데 역시나 몸 상태가 좋지 않았어요. 이대로 죽을 순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바로 사표를 냈어요. 2년 이내에 암이 재발하는 걸 막기 위해서 공기가 좋은 곳으로 여행을 가보고 싶었어요. 세상도 보고, 건강도 찾기 위해 떠난 여행이에요.
LADY 어느 곳을 여행했나요?
스기우라 일본에서 바다가 가장 아름다운 오키나와에 갔다가, 인도네시아 발리에도 갔죠. 우연히 발리에서 어머니와 여행 중이던 배우 야마모토 타로씨(현재는 반원전 활동가로 활약 중이다)를 만났어요. 제가 성격이 밝다보니 다가가서 인사를 하게 됐고, 암에 걸린 사실과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얘기까지 하게 됐어요. 그것을 계기로 금세 친한 사이가 됐고, 도쿄에 돌아와서는 함께 요가를 배우기도 했어요. 야마모토씨는 배우라서 그런지 몸 관리를 철저히 하고 있었어요. 그런 사람을 만난 것이 제게는 건강을 찾는 좋은 기회가 됐죠. 그때 야마모토씨가 제게 핀드혼에 가보라고 권했어요.
스기우라 영국 스코틀랜드 북쪽에 있는 곳이에요. 1960년대에 피터 캐리란 사람이 이주해서 북극권의 얼어붙은 땅에 채소와 나무, 풀과 꽃을 심어 사람이 살 수 있도록 바꿔놓았어요. 그래서 기적의 땅이라 불려요. 거기에는 명상을 통해 자연 에너지, 또 인간 사이의 교감을 느끼는 공동체가 있어요.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히지도 않고, 전 세계 사람들이 와서 같이 일하고, 같이 먹고, 교감을 나누는 곳으로 그곳에서 암을 극복한 사람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핀드혼을 찾아서 3개월을 지냈어요. 명상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중요한 건 핀드혼이란 장소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하루하루를 어떻게 사느냐가 앞으로의 인생을 결정할 것이란 걸 말이에요.
기적을 나누는 희망의 메신저
핀드혼을 떠난 스기우라는 하와이를 돌아본 뒤 일본에 돌아왔다. 이후 건강식을 먹고 스트레스를 덜 받는 생활을 시작했다. 핀드혼에서 ‘힐링의 여왕’이라 불리는 뉴에이지 가수 수잔 오즈본의 프로듀서인 우시지마 마사토를 만난 것이 인연이 돼 보이스 트레이닝을 받기도 했다. 내면의 소리를 꺼내놓으니 몸도 절로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원래 노래를 좋아하는 그는 회사원 시절에도 노래 경연에 몇 차례 출전한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노래가 정신적 치유까지 해주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노래를 부르면서 그는 해방감을 느꼈고, 자신의 몸과 마음이 점차 맑아지는 체험을 했다.
스기우라 회사원 시절에 노래 경연대회에서 우승한 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제가 계속 노래를 하리라곤 상상도 못했죠. 2005년부터 암 투병 중인 분들에게 희망을 전해주고자 「메신저」라는 잡지를 혼자 만들기 시작했어요. 제가 병실에 누워 있던 시절 암 투병기를 읽으면서 희망을 얻었거든요. 저처럼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가 병이 나은 사람, 아프지만 열심히 사는 사람을 수소문해서 찾아가 인터뷰를 하고, 그 내용을 잡지에 실었어요. 그랬더니 투병 중인 분들로부터 많은 호응이 있었어요.
LADY 그 전에 출판 관련 경험이 있었나요?
스기우라 그런 건 아니었어요. 암 환자들을 위한 건강서나 투병기는 많은데, 생생한 목소리를 담은 잡지는 본 적이 없었거든요. 투병 중인 사람들이 원하는 정보를 빨리 전해주고 싶고, 무엇보다 서로가 응원하며 교류하는 잡지가 있었으면 하는 욕구가 솟구치더라고요. 그런 잡지가 없기에 나선 거죠. 아무 경험도 없으면서 말이죠(웃음).
LADY 어떻게 잡지 발행과 음악 활동을 병행하게 됐나요?
스기우라 2005년부터 잡지를 발행했는데, 잡지를 보신 분들이 저를 자주 강연회에 초대해주셨어요. 학교나 지자체 등지에서 강연할 일이 잦아졌죠. 생명의 중요성을 얘기할 때도 있었고, 암 투병의 힘겨움과 희망을 전달해야 할 때도 있었어요. 강연회는 제 단독 무대인 셈이죠. 제 강연을 들으신 분들께 더 큰 감동과 교감을 전달해주고 싶어서 어느 날부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기성곡을 불렀는데, 차츰 제 경험에서 나온 삶에 대한 강한 욕구를 저만의 언어와 저만의 소리로 전달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자작곡을 선보이게 됐죠.
LADY ‘암 환자와 함께 달리는 호놀룰루 마라톤대회’를 추진하고 계시는데, 마라톤이 암을 이기는 데 도움이 되나요?
스기우라 꿈과 희망을 가지면 생명이 연장될지도 모르죠. 저는 병실에서 희망만을 생각했어요. 병 생각을 하면 마음이 힘들어져요. 입원 당시 저는 병이 나아서 마라톤 코스를 뛰는 모습을 아주 구체적으로 그려왔다고 했잖아요. 꿈과 희망을 가지면 인간 내부의 자연 치유력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몸이 다 나아서 마라톤을 하는 것이 아니라 뛰다 보니 건강을 찾는 경우가 있어요. 무엇보다 마라톤대회 같은 경우 커다란 성취감을 얻을 수 있죠. 암 환자임에도 마라톤을 완주했다는 기쁨이 전신에 전해지죠. 몸도 마음도 완연히 살아 있어서 행복하다고 느끼는 그런 순간입니다.
스기우라 저 같은 경우는 그렇다고 봐요. 기적이란 단어로도 표현할 수 있지만, 희망과 꿈이 있어야만 기적이 생기는 거죠. 마라톤을 완주했다는 스스로에 대한 감동과 자랑스러움이 암도 이길 수 있다는 강인한 마음을 심어주지요.
스기우라는 살고자 하는 희망을 여행과 마라톤을 통해 실현시켰다.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은 지 벌써 13년이 지났지만 그는 살아 있다. 장폐색을 다섯 번이나 겪었지만 강연회 무대에 서고, 암 환자를 위한 잡지를 발간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13년 전보다 확실히 건강해졌다고 자부한다.
필자는 암이 희망만으로는 낫지 않는 병이란 걸 알고 있다. 스기우라를 알게 된 데에는 필자의 개인 사정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 필자의 어머니는 지난해 가을 암으로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누구보다 기적을 믿었다. 의사는 시한부 6개월을 선언하면서 차분한 마음으로 죽음을 준비하라고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살아야 한다는 희망이 있으면 자신에게 기적이 찾아올지 모른다고 믿었다. 어머니는 매일 밤 죽음이라는 두려움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당당했고 삶의 기적, 인간의 생명력을 믿었다. 식도암이어서 음식 섭취를 할 수 없어 체중이 날로 줄어들었고, 물조차 제대로 삼킬 수 없었으며 두 차례 폐렴까지 앓았지만, 그래도 살아야 한다고 매일 이야기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계절인 가을을 보지 못하고 결국 돌아가셨다. 그 시절 필자에게 큰 도움이 됐던 것이 바로 스기우라의 블로그(www.taka-messenger.com)였다. 암을 이기고 생환한 사람이 들려준 희망의 목소리는 “그만 포기하고 죽음을 맞이하라”라던 의사의 말보다 수천 배 더 고마운 것이었다. 직감인지 육감인지, 아니면 점점 말라서 30kg대 체중이 된 어머니의 현실 때문인지 우리 가족 모두 어머니의 죽음을 예감했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죽음 대신 삶을 희망하고 갈구했다. 그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아닌가 싶다. 살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 단지 필자의 어머니에겐 기적이 찾아오지 않았을 뿐.
스기우라는 그 믿음과 희망을 버리지 않은 채 세상으로 나아갔고 이제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모든 암 환자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기적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은 시한부 인생을 이겨낸 그의 입을 통해서 나올 때 더 큰 힘을 발휘한다. 잡지 「메신저」를 통해, 강연회와 라이브 콘서트를 통해,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믿고 인간 내면의 강인함을 믿어야 한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아직 한국어 번역본은 없지만 「생명은 그렇게 연약하지 않아」라는 그의 투병기도 화제를 모으고 있다. 오늘도 일본 전역의 암 환자들은 그가 엮어내는 리얼 타임의 희망의 메시지를 기다리고 있다.
■기획 / 장회정 기자 ■글&사진 / 김민정(「레이디경향」 일본 통신원) ■사진 제공 / 스기우라 다카유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