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시인
주로 법조인들이 보는 법률 신문이 있다. 법조계에 관련된 기사나 판례 등이 실린다. 이것도 신문인지라 사설, 칼럼이 있기는 하나 보통은 무미건조해 읽는 맛이 없다. 법을 다루는 신문의 특성이기도 하고, 평소 경직돼 부드럽지 못한 법조인의 사고 탓 때문이기도 하다. 읽지는 못하고, 그래서 차마 버리지도 못하는 신문들이 사무실 한쪽에 두껍게 먼지를 이고 쌓이는 때가 많다.
![[행복한 귀농일기]방 안에 들어앉은 호박](http://img.khan.co.kr/lady/201212/20121211172913_1_owk1.jpg)
[행복한 귀농일기]방 안에 들어앉은 호박
박 변호사는 현대의 자연철학에 대해, 인간이 뛰어난 능력으로 지구라는 한정된 자원을 너무 많이 이용하고 있다는 반성에서 출발하는데, 인간의 더 좋은 삶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는 다른 종의 동식물들의 공간을 더 이상 빼앗지 않아야 한다는 새로운 윤리와 지구 그 자체에 대해서도 존경과 경외감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고 소개했다. 그는 갈라파고스 제도를 세계자연유산으로 보호하는 이유는 가급적 인간의 간섭 없이 오래 이어온 진화 과정이 자연 그대로 계속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했다.
박 변호사의 이 같은 생각은 내가 텃밭 농사를 지으면서 느낀 것과 거의 같다. 뽑아도뽑아도 계속 나오는 풀, 지렁이를 비롯한 땅속의 온갖 벌레, 수많은 발짐승과 날짐승, 그들은 인간에게 삶의 터전을 빼앗길 위기에 놓여 생존을 위해 몸부림을 친다. 만일 인간이 그들을 귀찮게 여겨 농약, 제초제 등으로 박멸한다면 우선은 좋을지 모르지만 다양성의 토양을 잃은 인간도 언젠가 무기력하게 쓰러지고 말 것이다. 이처럼 다른 동식물들은 우리 인간과 더불어 살아가야 할 대상이므로 인간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도 그들에게 미치는 피해는 최소화해야 한다.
![[행복한 귀농일기]방 안에 들어앉은 호박](http://img.khan.co.kr/lady/201212/20121211172913_2_owk2.jpg)
[행복한 귀농일기]방 안에 들어앉은 호박
농부의 땅, 개발자의 땅
그런데 요즘 우리 밭은 난리가 났다. 전에도 말했지만 주변에서 택지 조성 공사가 한창이다. 원래 동쪽과 남쪽으로는 나지막한 산이 있고, 나머지 방향으로는 다른 사람들의 논밭이 있었는데, 이제는 사방이 다 황폐해졌다. 중장비를 동원해 순식간에 산을 깎고 논밭을 메웠다. 침입자들은 그 옆에 있는 밭주인인 할머니에게 땅을 팔라고 했으나 할머니는 거절했다. 할머니는 거의 매일같이 밭에 와 일을 했는데, 그것이 할머니에게는 커다란 낙이었다. 자식들 키우듯, 농작물을 키우는 것이 말년의 그녀에게는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즐거움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의 저항은 오래 가지 못했다. 택지를 만드는 사람들이 할머니의 밭 남쪽으로 4, 5m 되는 축대를 쌓은 것이다. 햇볕과 바람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데 어떻게 농사를 짓겠는가. 장인어른께 전해 들으니, 할머니는 그 축대를 보고 울었다고 한다. 어느 날부터 그 할머니의 밭도 흙으로 메워지고 있었다.
업자들은 장인어른께도 땅을 팔라고 했으나 장인어른은 거부했다. 그들은 경계를 분명히 한다며 측량을 새로 했는데, 내가 지은 생태뒷간이 있는 부분이 그들이 구입한 번지의 땅에 들어 있었다. 뒷간을 헐어야 했다. 뒷간을 부수는데, 지난 봄 비를 쫄딱 맞으며 산에서 솔가지를 꺾어와 지붕에 꽂던 생각이 떠오르며 마음이 울컥해졌다. 우리 땅이 아니니 당연히 비워줘야 하는데도 괜히 억울했다. 그나마 다른 곳에 터전이 있는 우리도 이럴진대, 마구잡이 개발로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긴 산과 밭의 동식물들의 비명과 절규는 어떠했을까?
업자들은 그런 것에는 전혀 아랑곳없이 이번에는 장인어른 밭의 동쪽과 남쪽을 따라서 높은 축대를 쌓았다. 이제 우리 밭에서 산을 바라볼 수 없게 됐다. 우리 밭은 인공물로 둘러싸인 섬이 돼버렸다. 앞으로 전원주택 같은 것들이 본격적으로 들어서기 시작하면 또 얼마나 시끄러울까? 장인어른은 언제까지 그곳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을까? 나는?
미소를 자아내는 누런 호박
뒷간을 허물기 전, 짙은 갈색으로 바뀐 솔가지 지붕 위로 자리를 잡은 누런 호박을 땄다. 한아름 됐다. 올 농사에서 멋은 이 호박이 다 부린 것 같다. 일찌감치 지붕 위로 올라가 뒷산과 하늘을 배경 삼아 덩치를 키우고 색깔을 바꾸며 농사철 내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렇게 내게 사랑을 받던 녀석은 지금은 우리 집 거실 그릇장 위에 올라가 있다. 밭에서와 마찬가지로 녀석은 우리 집에서도 최고의 장식품이다. 녀석을 바라볼 때마다 입가에 미소가 절로 떠오른다. 그 커다란 녀석의 몸 안에 있을 무수한 씨앗들을 생각하면 금방이라도 껍질을 뚫고 새 생명이 터져 나올 것 같다. 처음 그 호박을 집에 가져올 때 아이들에게 밭 뒷간 지붕에 있던 것이라고 하니, 호박에서 냄새라도 나는 것처럼 코를 잡고는 치우라고 했다. 아이들도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그 호박을 미소 지으며 바라볼 날이 올 것이다.
요즘 밭에는 무, 당근, 쪽파, 양파 같은 것들이 있다. 가을이 한창 깊어가도록 크기가 작아 언제 다 크나 싶던 무는 싸늘해지는 날씨에 맞춰 뒤늦게 무럭무럭 덩치를 키운다. 몸통의 절반 가까이가 땅 위로 솟아 있는데도 잘 자라는 것을 보면 신기하다. 당근은 늦게 심은 탓에 뿌리가 가느다랗다. 그래도 깨물어 먹으면 당근 특유의 향긋함이 그대로 느껴진다. 낼모레 아침에는 기온이 크게 떨어진다고 한다. 내일 아침 출근 전 일찍 밭에 가 무와 당근을 뽑을 예정이다. 때론 즐겁고, 때론 힘겹고, 때론 쫓겼던 한 해 농사가 이렇게 저물어간다.
이제 ‘행복한 귀농 일기’를 마치게 됐다. 그동안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매달 글을 쓰는 것이 쉽지 않았다. 변호사 일에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탓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귀농 일기’란 표현이 실제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1백 평 정도의 텃밭 농사를 짓고 있을 뿐인데 ‘귀농’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 않은가? 이미 지난 2월호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편집자께서 내 직업을 ‘농부’라고 소개한 것도 부담스러웠다. 언젠가는 ‘농부’라고 불리는 것이 소원이지만, 아직 ‘농부’라고 말하기는 부끄러운 수준이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농업에만 전념하는 분들이 내 글을 어떻게 볼지도 두려웠다. 꾸미거나 숨기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내공 있는 농부의 눈에는 아기의 걸음마 정도로 보였을 것이다.
남 앞에 나를 드러내는 것은 자기 점검의 좋은 기회다. 1년 동안 이 지면에 글을 쓰면서 나는 왜 귀농하려고 하는지, 정말로 귀농할 수 있는지, 언제 귀농할 것인지를 끊임없이 살펴야 했다. 지금은 귀농에 대한 마음이 시작할 때보다는 한층 더 구체화됐다. 내가 10년간 한 검사를 그만두지 않고는 배겨낼 수 없었던 것처럼, 완전히 귀농하는 순간도 그렇게 다가오리라. 글을 쓸 수 있는 기회를 준 장회정 팀장님에게도 감사드린다.
필자 오원근은…
1996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10년간 검찰에 몸담았던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들은 뒤 돌연 사직서를 제출했다.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조직이 더 이상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이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변호사 겸 농부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농사일을 거들며 자연 속에서 느꼈던 행복을 되찾은 그는 지금도 농사 공부를 하며 마음 수련에 한창이다.
■글&사진 / 오원근(변호사·농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