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가 김난주·양억관 부부

이 부부가 사는 법

번역가 김난주·양억관 부부

댓글 공유하기
ㆍ“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오늘의 우리 부부를 있게 했네요”

1990년대 들어 일본 소설이 대중의 사랑을 받기 시작하면서 스타 작가군이 형성됐다. 무라카미 하루키,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무라카미 류, 미야베 미유키…. 그들만큼이나 독자들의 눈에 익숙해진 이름이 바로 번역가 김난주와 양억관이다. 번역가의 이름을 보고 책을 고르는 독자를 둘 만큼 일본 문학의 쟁쟁한 두 번역가가 부부라는 사실은 의외인 듯 자연스럽다. 마치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이 부부가 사는 법]번역가 김난주·양억관 부부

[이 부부가 사는 법]번역가 김난주·양억관 부부

“문화 쪽만 본다면 한국이란 사회가 근대 이후부터 일본을 계속 부정해왔잖아. 어떤 면으로 1960년대 일본은 한국의 무의식 같아. 의식은 항상 무의식을 억압하지. 하지만 무의식은 알게 모르게 올라오고, 또 의식은 그걸 가로막고…. 그래서 무의식이 됐지.”

“정말? 당신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글쎄, 그렇다면 싸이 같은 경우는 어떻게 설명할 건데?”

번역가의 처우나 위치, 인식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던 것 같다. 질문에 답을 하는 남편과 아내는 서로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진지하게 경청했다. 단 한 번도 말을 끊거나 반박하고 부정하는 법이 없었다. 상대방의 말이 다 끝난 뒤에야 수긍도 하고, 반박도 하고, 덧붙였다. 그래서일까. 부부의 답은 인터뷰 질문을 벗어나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말을 끊을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부부의 대화는 재미있고 또 유익했기 때문이다. 그저 부부가 주고받는 이야기를 전부 이해할 수 없는 짧은 배경지식이 아쉬웠을 뿐이다.

일본 문학 번역의 양대 스타 번역가라는 타이틀이 무색하지 않은 양억관(56)·김난주(53) 부부. 이들은 굳이 부부라고 소개하지 않아도 각자의 이름으로 자리를 공고하게 다진 인물들이다. 남편 양억관이 지금까지 번역한 책만 2백 권이 훌쩍 넘고, 아내 김난주는 소설만 2백 권 남짓에 어린이 동화책도 2백 권에 육박한다. 부부의 역서를 합하면 6백 권을 넘는 어마어마한 양이 된다. 이 부부에게 대표작을 묻는 것처럼 우문도 없으리라. 왜냐하면 일본 번역서 중 무작위로 골라도 부부 중 한 사람이 작업한 책이기 십상이니까. 뿐만 아니라 일본 문학을 좋아하는 독자들 중에는 양억관, 김난주라는 네임밸류를 믿고 책을 구입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번역가로서는 드물게 팬을 거느리고 있다. 그런데 부부는 그런 인기를 잘 모르는 눈치다.

큰아이 손잡고, 2천8백 매 원고 보따리 들고
“제가 처음 번역한 작품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였어요. 그때는 지금처럼 컴퓨터로 작업하지 않고 일일이 원고지에 썼죠. 다 쓰고 나니까 원고지 2천8백 매가 나오는 거예요. 그 원고 뭉치를 보자기에 싸서 한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다섯 살인가, 여섯 살이던 큰아이 손을 잡고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서 출판사에 갖다 주었던 기억이 나네요(웃음).”

한 번쯤 눈물바람을 해도 수긍이 갈 만한 어려웠던 시절의 기억일 수 있다. 현재의 성공을 더욱 빛내줄 재료로 불쏘시개 같은 에피소드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의 기억을 이야기하는 김난주의 표정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한창 천방지축인 아이의 손을 부여잡고 원고 보따리까지 들고 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려보라며 한껏 웃어 보이기도 했다. 아마도 그녀에게 과거란 눈물 젖은 빵을 먹던 서글픈 시간이라기보다는 추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기억인 것 같았다.

“그렇게 갖다 준 책이 그해 7월에 출간됐어요. 좋더라고요. 그 책을 시작으로 국내에서 하루키에 대한 평가가 바뀌었어요. 그러니 제게 의미가 있을 수밖에요. 전 번역가로서 시작이 좋은 편이었어요. 시기도 좋았고요. 일본 소설이 막 대중화되려는 때였거든요.”

김난주의 첫 번역작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는 또 있었다. 이 책은 출판사로부터 번역 의뢰를 받은 것이 아니라 무작정 번역부터 한 것이었다고.

“제가 일본에 있을 때 재미있게 읽은 책이었어요. 한국에 소개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가지고 있었죠. 출판사랑 아예 이야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고요. 그런데 하기로 한 출판사에서 기획이 엎어진 거예요. 그래도 번역을 했어요. 왜냐고요? 그냥 그 번역 작업 자체를 잘할 자신이 있었거든요. 번역가로 성공하기 위해서? 아니, 그렇게 멀리도 안 봤어요. 물론 재미도 있었고요(웃음).”

계약이 체결되지도 않았고, 보수가 보장되지도 않은 일을 ‘잘할 자신이 있다’는 확신만으로 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더구나 하루 이틀에 끝나는 일도 아닌, 작업량이 어마어마한 장편소설이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녀의 남다른 감 덕분이었을까. 첫 역서는 1992년에 출간돼 독자들과 무사히 만나게 된다. 게다가 지금까지도 스테디셀러로 사랑을 받고 있다.

“사실 번역에 관심도 없었어요. 일본에서 돌아온 뒤에 뭐라도 해야겠다 싶었을 뿐이지요. 그런 고민을 하던 중에 우연히 하루키 소설이 생각났을 뿐이고(웃음). 어린아이들이 둘이나 있는데 뚝 떼어놓고 직장에 나갈 수도 없는 상황이기도 했고요.”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번역가가 될 ‘운명’이었던 것 같은데, 말하는 그녀는 ‘우연’이라고 했다. 그건 김난주뿐 아니라 남편 양억관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양억관은 일본에 간 것조차 우연이었다고 말했다. 물론 그 우연에는 ‘김난주’라는 필연이 있긴 했지만.

내가 더 당신을 좋아했거든요!
양억관과 김난주의 인연은 생각보다 길었다. 두 사람은 경희대학교 국문과 선후배 사이로, 양억관이 76학번이고 김난주가 77학번이다. 하지만 캠퍼스 커플은 아니었단다. 군 입대나 대학원 진학 등의 이유로 학교를 다닌 시기가 달라서 서로 잘 알지 못했다고. 김난주는 대학원에 입학한 뒤 당시 신생 학과였던 일문과 조교로 일하면서 일본어와 인연을 맺게 됐다. 모든 것이 거기서부터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난주는 조교 경력을 토대로 일본 유학의 기회를 얻었다. 안 그래도 대학원을 수료할 무렵이어서 전환점이 필요했던 터였다.

[이 부부가 사는 법]번역가 김난주·양억관 부부

[이 부부가 사는 법]번역가 김난주·양억관 부부

“유학까지 우연히 간 것은 아니고요(웃음). 그렇다고 무엇이 되기 위해 유학을 간다든지, 유학을 다녀와서 어떤 일을 하겠다든지 하는 거창한 꿈은 없었어요. 그냥 일본 유학을 갈 기회가 주어졌고 그걸 잡았던 거예요. 생각해보면 전 서른 살까지 별 생각 없이 살았던 것 같아요(웃음). 요즘 젊은 사람들은 스펙 관리다 뭐다 굉장히 야무지던데 말이에요.”

김난주가 그렇게 일본으로 떠나고 1년 뒤 양억관이 뒤를 이어 현해탄을 건넜다. 이미 그때 두 사람은 연인 사이였다. 역시 국문과 대학원을 마치고 일문과 조교로 일하던 그가 일본행을 택한 이유, 바로 김난주 때문이었다.
“김난주를 따라간 거라니까요. 원래 유학을 가려고 했지만 꼭 일본일 이유는 없었어요. 미국일 수도 있었지요. 하지만 미국엔 김난주가 없잖아요(웃음). 제가 김난주를 정말 좋아했다니까요.”

옆에 있는 아내를 지나치게 의식한 답이 아니냐고 하자 웃음을 터뜨렸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제법 진지했다. 아내를 대하는 그의 말과 행동에는 깊은 존중과 존경이 배어 있었다. 그것은 숨기고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그렇게 지내온 자연스러움이 곳곳에서 묻어났다. 그는 아내를 믿고 의지했다. 사랑의 다른 말이다. 힘든 유학 생활을 함께했으니 서로에게 큰 힘이 돼주었을 것이다. 양억관이 입을 열었다.

“그렇지, 전 김난주에게 별 도움이 안 됐어요. 의지할 만한 사내가 돼주지 못했거든요. 왜? 그때는 제가 인간이 덜 됐었어요. 뭐, 지금이라고 별반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지만(웃음). 하지만 제게 김난주는 도움이 많이 됐지요. 또 제가 많이 의지했고요. 보면 알겠지만 정말 야무진 여자예요. 책임감도 강하고요. 제가 많이 좋아할 수밖에 없었지요.”

1989년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 사이에는 이미 첫아이가 있었다. 김난주는 도쿄 쇼와여자대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그 뒤 오쓰마여대와 도쿄대에서 공부하다 1990년에 귀국했고, 양억관은 도쿄도립대 철학과 대학원 연구생으로 1년을 보낸 뒤 도쿄대를 거쳐 아시아대 경제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1992년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내 따라 일본 가고, 아내 따라 번역하고
사랑하는 연인을 따라 일본 유학까지 갔던 양억관은 귀국한 뒤에는 사랑하는 아내를 따라 번역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귀국하고 나니 먹고사는 문제가 막막합디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해야 하나 고민을 했지요. 그때도 제게는 아내가 큰 힘이 됐어요. 왜냐면 이미 번역 일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말하자면 제 롤모델이 된 거지요(웃음). 그래서 아내 따라 저도 일본에서 재미있게 읽었던 책을 번역하기 시작했어요.”

첫 책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 과정도 김난주와 놀랄 정도로 흡사했다. 다짜고짜 번역부터 시작했고 이후에 대학 후배가 출판사를 소개해준 것이다. 그 뒤로 양억관은 지금은 없어진 출판사 고려원을 중심으로 그야말로 분야를 막론하고 번역을 했다. 오죽하면 양억관이 자신의 역서 리스트를 보며 “슈퍼마켓이 따로 없을 정도”라고 표현했을까.

“일이 들어오면 가리지 않고 다 했어요. 그건 단순히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지요. 누가 번역해서 부자 됐다는 소리 들어봤어요?(웃음) 제 번역 리스트는 슈퍼마켓이에요. 만화부터 철학책까지 다 있으니까요. 사실 거창한 직업의식이 있던 것도 아니었고요. 그냥 이것보다 더 잘할 만한 일도 없고, 그렇다고 딱히 번역 일 그만둘 만큼 하고 싶은 일이 있던 것도 아니었고요.”

무심하게 답했지만, 슈퍼마켓을 넘어 대형 마트라 불러도 좋을 만큼의 작업량을 보면 그가 얼마나 자신의 일에 성실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부부의 번역 작업은 같은 듯 보이지만 또 많이 다르다. 물론 많은 독자들은 두 사람이 일본 소설을, 더 정확히는 일본 현대소설만 작업한 것으로 알고 있겠지만 각자 분야와 대상 작가에는 조금 차이가 있다. 김난주는 거의 대부분이 소설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출판 관계자들과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어린이 동화책을 번역해도 재밌을 것 같다”라는 한마디를 듣고 계기가 돼 2백여 권의 그림책 번역 작업을 하게 됐다. 이에 반해 양억관의 책은 절반 정도만 소설이다. 나머지는 인문서부터 만화까지 장르가 다양하다.

“김난주가 대단한 거죠. 소설 번역이 어려워요. 일본어 공부할 때도 그랬어요. 전공서나 인문서 같은 건 논리적인 문장이니까 빨리 읽히는데 소설은 그렇지가 않지요. 의미를 비틀고, 상징이 있고 말이죠. 처음 일본어를 배울 때도 전 소설 읽을 실력이 안 됐어요. 김난주는 제 일본어 선생님이에요(웃음). 요즘도 모르는 게 있으면 자주 물어보지요.”

양억관은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진지하되 단 한 번도 잰 체하는 법이 없었다. 시종일관 자신은 실력이 없다든지, 정통으로 파고들며 공부를 하지도 않았다든지,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든지 하는 말들로 얼버무리기 일쑤였다. 어쩌면 인터뷰 자체가 멋쩍고 쑥스러운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아내의 실력에 관한 신뢰는 아낌없이 표현했다. 적당히 점수 좀 따겠다고 던지는 말들이었다면 몇 번 하고 말았을 텐데 양억관은 시종일관 그랬다. 이번엔 김난주가 나선다.

[이 부부가 사는 법]번역가 김난주·양억관 부부

[이 부부가 사는 법]번역가 김난주·양억관 부부

“남편은 절 너무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어요(웃음). 제가 먼저 일본에 유학갔을 때 일본의 국립국어연구원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어요. 시험을 봐서 합격했거든요. 남편은 늘 그 경력을 굉장하게 생각해요. 제가 뭔가 체계적으로 배웠다면서요(웃음). 그런데 사실 저도 일본어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유학을 가 지독하게 독학했거든요.”

그러나 아내로부터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마음」 강독을 받고 난 뒤 일본 소설 읽기가 한결 쉬워졌다고 하는 양억관의 말을 듣고 나니 “김난주가 선생님이다”라는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닌 듯했다. 그나저나 부부끼리는 운전 강습도 못한다는데 이 부부에겐 전혀 적용되지 않는 말인 것 같다. 공부를 가르쳤다니!

번역가로 산다는 것
“같은 일을 하면 좋은 점이요? 제가 모르는 것을 물어볼 수 있다는 게 가장 좋죠. 전 아내의 답을 100% 신뢰하거든요. 야구에 관련된 어린이 책을 번역하면서 평소 하던 대로 했죠. 그런데 아내가 보고는 그야말로 다 뜯어고쳤더라고요. 보니까 창피해서(웃음). 의성어나 의태어도 풍부하게 쓰면서 애들 책다운 맛을 살렸어야 했는데 제가 그러질 못했던 거예요. 아마 제가 번역한 그대로 편집자한테 보냈으면 욕을 바가지로 먹었을 거예요.”

부부가 같은 일을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궁금했다. 동종 업계에 종사하는 것을 넘어 동업을 하는 부부들도 있지만, ‘번역’이란 일이 가지는 작업의 특수성이 있으니 말이다. 더구나 누구 한 사람 처지는 법 없이 우리나라 대표 번역가로서 명성까지 가졌으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학 실력과 상관없이 막힐 때가 있어요. 오랫동안 이 일을 해왔는데도 이상하게 안 풀리는 대목들을 만나게 돼요. 그럴 때 남편한테 물어보면 의외로 쉽게 풀리는 경우가 많아요. 특히 예전에 한 번 야구관련 용어를 번역하는데 아무리 자료를 찾아도 모르겠는 거예요. 얼마나 끙끙댔던지. 그런데 남편이 단번에 해결해줬어요. 제가 워낙 야구를 모르니까 아주 간단한 규칙이었는데도 헤맸던 거죠(웃음).”

이런 얘기를 들으면 이 부부가 어지간히 서로 돕고 협업하는 것 같겠지만, 그것은 굳이 좋은 점을 꼽아보라니 들려준 사례였을 뿐 의외로 부부는 상대가 번역한 책은 거의 읽지 않는다고 한다. 어느 정도로 안 읽는가 하면, 드물게 맡은 협업 작업 때도 여지없이 각자 작업해서 각자 출판사에 넘겼을 정도라고. 에쿠니 가오리와 쓰지 히토나리가 「냉정과 열정 사이」의 출간 10주년을 기념해 펴낸 소설 「좌안」과 「우안」을 각각 작업했을 때를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겠다. 각각 남녀 주인공의 시점에서 한 권씩 나눠 쓴 그 작품의 번역을 이 부부가 맡았던 것. 작가의 작업 방식에 맞춰 양억관은 남자의 소설을, 김난주는 여자의 소설 번역을 담당했다.

“그때도 서로의 원고를 읽어보지 않았어요. 번역을 위해 꼭 확인해야 할 사항들만 체크했고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같은 장면에서 남녀 주인공이 대화한 내용을 양쪽 책에 똑같게 나오도록 편집자가 고쳐놨더라고요. 원작은 그렇지 않았거든요. 같은 사건이라도 남자의 기억과 여자의 기억이 다른데 말이에요. 나중에 얘길 해서 원래대로 고쳤어요.”

조금은 무심하게 보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듣다 보니 이제껏 같은 일을 오랫동안 함께해올 수 있었던 부부의 지혜로운 비법인 듯했다. 어느 한쪽이 더 잘나가거나, 어느 한쪽이 슬럼프를 겪다 보면 서로의 작업 에너지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식의 지나친 관심이나 과도한 지적으로 서로를 대했다면 같은 일을 해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부부는 각자의 독립성을 완전히 인정해주었다.

[이 부부가 사는 법]번역가 김난주·양억관 부부

[이 부부가 사는 법]번역가 김난주·양억관 부부

“우린 지금도 서로 무슨 작업을 하고 있는지 잘 몰라요(웃음). 전 아이들을 돌봐야 했으니까 집에서 일을 해왔고요. 남편은 일산에 작업실을 마련해두고 출퇴근하고 있어요. 그런데 말이 출퇴근이지 워낙 생활 패턴이 달라서 얼굴 보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가끔은 남편 수배령을 내리기도 해요(웃음).”

같은 일을 하기 때문에 안 좋은 점은 무엇이냐고 슬쩍 물으니 “‘부부’라고 알려진 뒤 인터뷰 요청이 들어오면 꼭 같이해야 하는 게 참 싫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동행자로, 동반자로
미주알고주알 사는 얘기도 궁금했다. 아무리 뜨겁게 사랑해서 결혼한 부부라 해도 살다 보면 ‘미워 죽겠어’ 하는 순간이 얼마나 많은가. ‘저 웬수’라는 말이 정말 ‘원수’에게 붙이는 말이 아니니까. 남편이 미워 보일 때는 언제인지 얘기를 좀 해달라고 했다.

“그런 적 없는데요(웃음). 제가 정말 양억관씨를 좋아해요. 살면서 어려운 일이 왜 없겠어요. 하지만 제가 그것들을 다 참고 견디는 건… 이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했다는 책임감이랄까요. 물론 살면서 서로 사랑하느니, 좋아하느니 하는 말을 주고받은 적은 없지만요(웃음).”

미울 때를 물었더니 진짜 좋아한다는 답이 돌아온다. 더구나 싸우지도 않는단다. 엄밀히 말하면 싸우질 못한다나. 아이들의 일과에 생활 리듬이 맞춰 있는 김난주와 밤낮이 바뀐 생활을 하는 양억관이 함께 ‘깨어 있는’ 시간도 거의 없거니와 김난주가 한 소리라도 할라치면 그가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는 탓이다. 어쨌든 부부싸움이 없다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럼 이번엔 남편에게 아내의 좋은 점을 물었다. 그랬더니 바로 “성질이 더럽다”라고 말한다. 존경해 마지않던 아내에 대한 첫 공격이다. 예상되는 답이 나오는 법이 없다. 확실히 문자를 다루는 사람들답다. 김난주는 익숙한 듯 그냥 웃고 만다.

“아내는 번역하는 데도 빈틈이 없어요. 그런 자세는 생활에도 고스란히 반영이 돼요. 엄마로서 아이들에게 굉장히 잘하고 아내로서의 소임도 완벽하게 해내죠. 그에 반해 제 생활은 좀 중구난방이거든요(웃음). 이 사람 없이는 못 살지. 제 인생 전체의 버팀목이 김난주라니까요.”

전문 번역가라는 직업이 없던 시절부터 지금껏 번역만으로 밥벌이를 해올 수 있었던 것은 남편과 아내가 부부로, 동료로 서로에게 버팀목이 돼준 덕분이다. 그것을 부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어떤 질문에도 “고맙다, 좋아한다, 덕분이다”라는 말이 빠지지 않았다. 번역이란 결코 녹록지 않은 작업이다. 연이은 타이핑 작업에 손가락이 붓기 일쑤고 목 디스크는 필수다. 하루 종일 앉아만 있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외국 작가의 의중을 텍스트로 헤아리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일까. 더구나 한국 사회에서 번역자란 결코 대접받는 위치에 있지도 않다.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번역은 작품의 장면, 장면을 다 연결해 전체를 완성하는 작업이에요. 그걸 가지고 잘했나, 못했나를 구분하고요. 소설 번역에서 한 문장만 빛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런데 그걸 모르고 (원서의) 문장과 (번역서의) 문장을 일대일 대응으로 생각하고 자기가 아는 단어 수준에서 번역이 틀렸다고 지적하는 이들이 있죠.”

작품의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번역가의 단어 선택을 존중하고 작업 주관을 읽어내야 하는데 그저 해석으로만 받아들일 때 가장 힘이 빠진다고 했다. 그만두고 싶을 때는 없었을까. 하기 싫을 때는 있었어도 그만두고 싶었을 때는 없었다고 망설임 없이 답하는 김난주와는 달리 양억관은 언제나 다른 일을 꿈꾼다고 했다. 다만 다른 일을 할 재주도 없고, 번역 일보다 더 잘할 자신도 없을 뿐이라며 머쓱하게 웃는다. 요즘은 식당을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단다.

번역가로서 꿈이나 마지막 포부 같은 것이 궁금했다. 그야말로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거장들이니까. 그러나 이번에도 여지없이 질문의 의도를 빗겨난 답들이 돌아왔다. 김난주는 인생이 다하기 전까지 지구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싶다며 좀 더 열심히 여행을 다니겠다고 했고, 양억관은 남북통일이 돼 개마고원에서 남향으로 집을 짓고 싶다고 했다. 부부는 그들이 번역한 소설처럼 재밌는 사람들이었다. 아! 그래서 그렇게 술술 잘 읽히게 번역할 수 있었으려나.

■기획 / 장회정 기자 ■글 / 강은진(프리랜서) ■사진 / 박동민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Ladies' Exclusive

      Ladies' Exclusive
      TOP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