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PGA 투어 상금왕 박인비, 내게 힘을 주는 가족
아버지, 3대의 동반 라운딩
평생 잊지 못할 최고의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출발선 앞에 선 박인비(26)의 표정은 밝고 편안해 보였다. 미국 언론이 붙여준 ‘조용한 암살자(Silent Assassin)’라는 별명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아마도 시즌을 마무리한 홀가분함과 기대 이상의 좋은 성과를 거둔 뿌듯함이 만들어낸 여유인 듯했다.
“저는 원래 잘 웃는 편이에요. 친한 사람들과 있을 때는 농담도 잘하고 애교도 많이 부리고요. 그런데 경기 때도 그렇고 심지어 우승을 해도 크게 감정표현을 하지 않다 보니 그런 별명이 붙었나 봐요. 사실 저 우승했을 때 되게 기뻤거든요. 저를 잘 아는 분들은 ‘너, 정말 좋을 때 짓는 표정이 나오더라’라고 하던데, 특별한 세리머니 같은 게 없어서 그런지 그냥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나 봐요. 주변에서 다들 골프칠 때 밝은 모습 좀 보이라고 하셔서 연습해본 적도 있는데 경기 중에는 워낙 집중하고 긴장도 되니까 잘 안 돼요. 앞으로는 좀 노력하려고요. 경기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요. 이제는 공을 치고 걸어갈 때마다 활짝 웃어야겠어요(웃음).”

LPGA 투어 상금왕 박인비, 내게 힘을 주는 가족
사실 지금의 세계적인 골프선수 박인비가 있기까지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은 바로 할아버지 박병준씨(82)다. 그녀가 골프를 시작한 이유가 바로 할아버지의 소원을 이뤄드리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부터 사업을 하며 골프를 쳤던 할아버지는 늘 ‘3대가 함께 골프를 치는 것’을 바라왔고, 그 꿈을 이뤄드리기 위해 아버지 박건규씨(53)가 열 살짜리 박인비에게 골프를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박인비 골프 인생의 시작이었다.
“할아버지는 한국에서 거의 처음으로 골프를 치신 분 중 한 분이시고요. 아버지도 골프광이세요. 저는 원래 동물을 무척 좋아해서 수의사가 되고 싶었는데 두 분의 적극적인 권유에 골프채를 잡게 됐어요. 아버지는 한창 빠져 있으실 때는 일주일에 5일 이상 골프를 치러 다니셨고, 아마추어로서는 언더파까지 치셨던 실력파세요. 할아버지도 건강 때문에 실력이 많이 꺾였지만 구력이 굉장하셨고요. 지금도 파워는 좀 약해도 정확도가 높아서 잘 치시는 편이에요.”
시작은 ‘약간의 강요’에 의해서였지만 박인비는 1년여 만에 전국대회 우승을 차지하는 등 남다른 소질을 드러냈다. 전국대회를 제패하고 2001년 어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간 뒤 이듬해 US주니어선수권 우승과 함께 올해의 주니어 선수에 선정되며 주목을 받았다. 미국주니어골프협회 대회에서는 9회 우승하며 차세대 실력자로 기대를 모았다.
“맨 처음에는 솔직히 골프에 큰 매력을 느끼진 못했어요. 그냥 어른들이 시키니까 이끌려 다녔는데 시합에 나가면 성적도 잘 나오고 우승까지 하니까 재미있어지더라고요. ‘이 분야에 내가 능력이 있고 노력하면 잘할 수 있구나’ 하는 걸 알게 되고 주변에서 칭찬해주니 자신감도 생겼어요. 그러면서 제가 가야 할 길이라는 걸 깨닫게 됐죠.”

LPGA 투어 상금왕 박인비, 내게 힘을 주는 가족
“친척들과 다 같이 골프 치러 가면 다들 ‘인비가 할머니의 퍼트를 닮았구나’라고 말씀하세요. 인비 아빠도 감각이 뛰어나서 어릴 적엔 인비를 데리고 다니며 노하우를 많이 전수했고요. 인비 동생도 운동이라면 다 좋아하고 잘하는 편이거든요. 물론 본인의 피나는 노력과 연습이 없었더라면 이렇게 좋은 성적을 낼 수 없었겠지만, 그래도 가족이 조금이라도 좋은 영향을 줬다고 생각하면 가끔 뿌듯한 마음도 들곤 해요.”(할머니 서영순씨)
할아버지의 간절한 소망대로 요즘에는 1년에 한두 번 정도 정기적으로 모여 3대가 동반 라운드에 나선다. 일정상 더 자주 기회를 만들지 못해 아쉽기는 하지만, 모두가 좋아하는 일을 함께하며 보내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행복한지 모른다.
“손녀까지 오순도순 골프를 치러 다니는 게 제 소원이었는데 이렇게 인비가 세계적인 선수가 됐으니 정말 자랑스럽고 대견하고 그래요. 인비가 주니어에서 활동할 때는 제가 아들이랑 교대로 운전해가면서 시합도 전부 따라다니고 그랬어요. 지금은 직접 가서 보는 것은 무리라 집에서 TV로 경기를 챙겨보죠. 어떻게 보면 제가 인비의 가장 열렬한 ‘팬’이에요. 인비 경기를 보는 게 살아가는 큰 낙이거든요.”(할아버지 박병준씨)
변함없는 지지와 응원을 보내주는 가족
촉망받던 기대주 박인비는 지난 2008년 US여자오픈골프대회에서 우승을 거두며 성공적으로 프로 무대에 안착했다. 한국인으로는 다섯 번째 메이저 대회 우승이었고, 박세리의 US여자오픈 최연소 우승 기록(만 20세)을 1개월 앞당긴 최연소 우승자이기도 했다. 순식간에 세계 정상에 우뚝 선 영광을 맛봤지만 이후 극심한 슬럼프에 빠졌다. 미국에서 3년간 우승하지 못했고 2011년에는 공동 6위가 최고 성적이었다. 그중 가장 힘들었던 때는 2009년이었다. 주변의 기대도 컸고 스스로도 자신의 기록이 우연이나 운이 아닌 진정한 실력임을 증명하기 위한 두 번째 우승이 간절했기에 더욱 조바심이 났다. 대회장에 나가기가 두려웠고 하루에도 수백 번씩 ‘골프를 그만둘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LPGA 투어 상금왕 박인비, 내게 힘을 주는 가족
그런 그녀를 일으켜 세운 것 또한 가족의 힘이었다. 어떤 말로도 위로가 잘 되지 않는, 그런 절망 속에서도 자신을 믿고 지지하는 가족의 응원은 큰 의지가 됐다. 특히 가장 가까이서 그녀를 지켜보고 시간을 함께 보내는 어머니 김성자씨(52)의 역할이 컸다.
“옆에서 제가 직접 해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는 게 무척 마음 아팠어요. 부모 입장에서는 성적 자체보다 그 성적에 영향을 받는 자식의 모습이 먼저 보이거든요. 경기 때도 잘 치다가 조금 실수가 나오면 인비가 스스로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을지 알기 때문에 속이 상해요. 제가 대신 힘들어해주고 싶지만 결국에는 본인이 이겨내야 하는 거니까 늘 ‘힘내라’, ‘우리 딸 최고’ 이런 말밖에 못해주죠. 그나마 다행인 건 그래도 인비가 무던하고 대범한 편이라 뭐든 마음에 오래 담아두진 않는다는 거예요. 얼른 툭툭 털어내고 다음 경기에 집중하려고 노력하더라고요.”(어머니 김성자씨)
우승을 하지 못해도, 좋은 성적을 내지 못 해도 변함없이 응원하고 사랑한다는 가족의 메시지는 박인비에게 세상 그 무엇보다 든든한 재산이자 다시 뛰어보고 싶은 의지의 원동력이 됐다.
“부모님께는 항상 감사한 마음뿐이에요. 제가 하는 일을 존중해주시고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지요. 저한테 많은 것을 양보하고 희생해야 했던 동생한테도 고맙고요. 아무래도 부모님의 관심이 저한테 쏠리고 뭐든 제 중심으로 돌아가다 보니 서운하고 속상했던 적이 많았을 거예요. 마음속에 상처가 있을지도 몰라요. 그래도 크게 내색하지 않고 참고 이해해주는 걸 보면 미안하기도 하고 앞으로 제가 더 잘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곤 해요.”
최근에는 동생 박인아씨(25) 또한 골프선수 생활을 준비 중이다. 대학에서 운동생리학을 전공한 인아씨는 관련 분야를 좀 더 체계적이고 전문적으로 연구해볼 생각도 가지고 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언니와 엄마를 따라 골프장을 드나들었던 영향인지 자연스레 관심이 이쪽으로 향하게 됐다. 박인비에게 냉철하고도 실질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는 동생이기도 하다.
지금처럼 언제나 행복한 골퍼로
2012년 박인비는 다시 화려하게 비상했다.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맹활약을 펼쳤고 에비앙 마스터즈와 샤임다비 LPGA 말레이시아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6월부터 10개 대회 연속 톱 10에 랭크되는 기록을 남겼고, 그 결과 LPGA투어 상금왕과 베어트로피 2관왕에 올랐다. 그야말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인 셈이다. 골프를 포기하겠다 생각할 만큼 아슬아슬해 보였던 그녀가 이토록 놀라운 반전을 이뤄낸 계기는 무엇일까.
박인비는 우선 스윙을 교정하면서 테크닉적인 면에서 발전이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그 비밀은 ‘사랑’에 있었다. 2011년 8월 약혼한 한국프로골프(KPGA)투어 프로 출신 남기협씨(33)가 2012년 시즌부터 함께 투어를 돌며 코치 겸 매니저 역할을 하게 된 것. 그녀가 출전한 모든 대회를 함께한 약혼자는 엄격한 코치이자 다정한 오빠이자 가족에 이은 또 한 명의 ‘내 편’이 되어줬다.

LPGA 투어 상금왕 박인비, 내게 힘을 주는 가족
“선수생활을 했던 사람이라 순간순간 제 기분을 무척이나 잘 알아요. 어떤 말이 도움이 될지, 지금 무엇이 위로가 될지를 파악해서 제게 맞춰줘요. 5년 가까이 만났는데 그동안 제 성격도 대부분 파악했대요. 실수했을 때나 경기가 잘 안 풀릴 때도 금방 마음을 다잡을 수 있게 해주고 무엇보다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만들어요. 경기 때마다 누군가와 경쟁해야 하는 게 부담되고 힘들고 그랬는데 그런 부분을 오빠가 잘 메워줬어요. 원래 투어를 다니면 자꾸 자리를 옮기니까 잠을 잘 못 잤었거든요. 그런데 마음이 편안해지니 컨디션도 좋아지고 그런 부분들이 성적까지 연결된 것 같아요.”
그동안 실력 있고 유명한 코치들에게 레슨을 받아왔지만 현재 그녀에게는 남기협씨가 세계에서 가장 잘 맞는 코치다. 본인이 그동안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온몸으로 습득해온 노하우를 그녀가 받아들이기 쉬운 방식으로 전수해줬고, 그 결과 스윙이 많이 가다듬어졌다. 처음에 같이 호흡을 맞출 때는 ‘괜히 같이해서 잘 안 되면 어쩌나’ 하는 부담도 컸지만 지금은 정말 잘 선택한 일이다 싶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골프에 대한 관점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박인비에게 골프는 이제 더 이상 ‘외롭고 힘든 일’이 아닌 ‘즐겁고 행복한 일’이 됐다. 꽤 오랫동안 회의하고 고민해 온 인생의 행복에 대한 답을 찾게 된 것이다.
“슬럼프를 겪으면서 과연 이것이 제가 원했던 삶인지를 생각해봤어요. 최근 3, 4년 동안 골프를 치면서 매번 공이 똑바로 가지 않을 것 같은 극도의 불안감이 무척 싫었어요.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그것만 없앨 수 있다면 뭐든 하고 싶었는데, 그 감정을 느끼지 않으려면 그냥 그만두는 것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생각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보기로 했죠. 그렇다면 투어라도 재미있게 다니자는 마음을 먹고 사랑하는 사람과 여행한다는 기분으로 즐기기로 했어요. 경기하러 가서 호텔 방에만 있지 않고 오빠랑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니고 쇼핑도 하며 그 순간순간을 최대한 즐기는 거예요. 성적도 중요하지만 행복하려고 사는 거잖아요.”
여유를 갖고 편안한 마음으로 경기에 나서다 보니 자연스레 성적도 따라왔다. 2012년 시즌 시작 전 그녀의 목표는 ‘우승’이나 ‘세계 랭킹 몇 위’가 아니라 그저 ‘가다듬은 스윙 자세를 몸에 제대로 익히는 것’이었다. 어떤 조바심도, 초조함도, 욕심도 없었다. 경기를 치르는 동안에도 상금왕이 되지 않아도, 최저 타수상을 받지 않아도 조금의 후회도 없을 만큼 행복한 마음뿐이었다. 마음이 ‘행복’한 골퍼가 되니 성적까지 더해져 결국 두 배로 더 ‘행복’한 인생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인비가 에비앙 마스터즈 대회를 끝내고 저에게 ‘엄마, 골퍼란 직업을 갖게 해줘서 정말 고마워요’라는 말을 했어요. 가슴이 정말 뭉클하더라고요. 그 전엔 가끔씩 힘들어서 못하겠다거나 왜 골프를 시켰냐고 그랬거든요. ‘그런 시간을 이겨내고 스스로 감사함을 깨닫게 됐구나’ 싶어 대견하고 고마웠어요. 무엇보다 본인이 스스로 행복해하는데 뭘 더 바라겠어요. 세계 1등이 되는 것보다 더 기특한 일이죠.”(어머니 김성자씨)
그런 의미에서 박인비의 올해 목표 또한 결과가 아닌 과정에 있다. 자만하거나 게으름 피우지 않고 열심히 연습하고, 또 시즌이 시작되면 ‘지난해만큼 행복한 투어’를 해내는 것. 아마도 올 시즌이 끝난 뒤에는 더욱더 화려하게 날아오른 행복한 ‘여왕벌(그녀의 영어 이름 In Bee에서 비롯된 별명)’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글 / 이연우 기자 ■사진 / 원상희 ■헤어&메이크업 / 배승진, 박은진(파크뷰칼라빈, 02-515-84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