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속 삶의 좌표를 잃어버린 당신에게 함세웅 신부의 메시지

세상 속 삶의 좌표를 잃어버린 당신에게 함세웅 신부의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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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서 “힘들다”, “아프다”라는 아우성이 들려온다. 흔들리는 청춘부터 상처 입은 노년까지, 개인의 삶은 다양하지만 하나같이 고되고 또 허탈하다. 정치적 갈등, 경제 양극화, 사회적 불안은 우리를 더욱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상처와 상심을 쉽게 다독이긴 어렵겠지만 결국에는 다시 현실을 껴안을 수밖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창립의 주역이자 한국 민주화운동의 한복판에서 활동해온 함세웅 신부로부터 그의 삶에서 터득한 처방전을 빌려보기로 했다. 스스로를, 그리고 서로를 믿으며 한 걸음씩 나아가는 법을.

세상 속 삶의 좌표를 잃어버린 당신에게 함세웅 신부의 메시지

세상 속 삶의 좌표를 잃어버린 당신에게 함세웅 신부의 메시지

절망과 무력감에서 헤어나기 힘든 당신에게
지난해 8월, 은퇴 감사미사를 집전하고 성당 사목 현장에서 물러났습니다. 본당 사제로서 책무를 내려놓고, 이제 원로사목자로서 또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본당을 떠나게 되면 과연 어떨까 걱정도 했었는데, 여러모로 무척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어요. 오랜만에 휴식도 갖고, 44년간의 사제 생활을 찬찬히 돌아보며 감사할 수 있어서요. 마치 여행 중에 있는 것 같아요. 부모님, 가족, 형제자매들, 신자들, 동지들까지 그동안 만났던 모든 분들을 떠올리고 기억하며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본당을 떠나던 날 묘하게도 태풍이 불어 닥쳤습니다. 묵은 것을 쓸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라는 암시로 저는 해석했습니다. 새 주거 환경에서 저는 ‘하느님 앞에서의 단독자’라는 실존적 주제를 되새기며 ‘하느님과의 직거래’라는 성령의 은총에 힘입어 큰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요즘 부쩍 지나온 날들에 대한 소회와 의미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힘들었던 고비의 순간을 되새겨보는 기회도 생기고요. 저는 가톨릭대학교에 입학한 해에 4·19민주혁명을 체험했고, 그 다음 해에는 부끄러운 5·16 군사반란을 목격했습니다. 로마 유학생활을 마친 뒤 돌아와 제 ‘첫사랑’인 응암동 성당에서 지낼 때 지학순 주교가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해 구속되었습니다. 당시는 정치적·사회적 상황에 대한 신학적 고민이 계속되던 시기였죠. 명동성당에 미사를 드리러 갈 때마다 서대문형무소 앞을 지나가야 했는데, 그곳에 서면 마음이 아프고 몸에 전율을 느꼈습니다. 동료 사제들은 물론이고 언론인, 법조인, 지식인 등 비슷한 고민을 하던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현재의 잘못된 정치 구조를 바꿔야만 한다는 걸 깨달았지요. 시대와 함께 호흡하고, 저희가 몸담고 있는 종교와 하느님의 가장 대표적인 속성인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 나서야 한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사제는 성당 안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세상 한복판에서 일해야 한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독재정권을 타파하고 민주주의와 인권 회복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종교인에게 주어진 민족적 사명일 테니까요. 이러한 소명으로 전국의 사제들이 모여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결성하고 꾸준히 시대의 요청에 응답해왔습니다. 사제단 출범과 함께 민주주의와 인권회복을 위해 명동성당을 나와 길거리에서 처음 시위를 벌일 때는 저도 개인적으로 두렵기도 했습니다. 또 유신독재, 군사정권과 맞서면서 품었던 기대와 희망이 꺾일 때에는 좌절하고 허탈해하기도 했고요. 그러나 시민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할 때 저희는 이것이 바로 은총의 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두 차례의 감옥 생활은 매우 힘들었지만 오히려 저를 다시 세우는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감옥을 ‘영적 단련소’, ‘제2의 신학교’라 생각하며 ‘감옥의 영성’을 정립할 수 있었습니다. 신학을 종합할 수 있는 은총의 장소였죠. 처음 구속됐을 때 검찰 조사 후 서대문형무소로 옮겨졌는데, 새벽 2~3시쯤 도착했더니 정말 쓰레기통보다 더 너저분한 방에 들어가라고 하더군요. 너무 놀랐지만 워낙 피곤했던지라 그대로 잠이 들었죠. 아침에 일어나니 앞으로 제가 지낼 방이라며 청소를 하라고 물을 떠다 줬어요. 몇 시간에 걸쳐 깨끗하게 만든 뒤 아침기도를 올리고 있는데 교도관이 와선 방을 옮겨야 하니까 나오라고 하는 거예요. 억울해서 가지 않겠다고, 내 방이라고 우겼더니 교도관이 감옥에서 자기 방이 어디 있느냐며 어이없어 했습니다. 마지못해 따라갔는데 훨씬 넓고 깨끗하고 좋은 방인 거예요. 저는 모든 것을 빼앗긴 감옥에서도 고작 몇 시간 청소 좀 했다고 그 방을 사유화하고자 했던 본능이 여전히 제 안에 남아있다는 생각을 하며 혼자 웃었습니다. 또 1977년 광주교도소에서 당시 25년간이나 투옥되어 있던 비전향장기수들을 만나면서도 많은 가치들을 배웠습니다. 부러지고 꺾이며 절망적인 순간에 놓인다고 해도 자신의 신념과 신앙을 지켜나간다는 것. ‘내 몸에 박힌 가시’를 품고 이겨내야 하는 이유가 분명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이 계속됨을 믿는 당신에게
지금 깊은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는 그저 관념적인 말로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분명 삶은 축복이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만들어나가는 건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성서에서 우주와 세상의 창조를 ‘코스모스’라고 해요. 조화라는 뜻입니다. 고통이나 절망 등은 깨진 상태, 즉 카오스예요. 결국에는 카오스를 코스모스로 바꾸는 과정이 창조입니다. 그건 자신만이 할 수 있어요.

물론 시대가 많이 달라졌다는 데는 동의합니다. 제가 얼마 전부터 인권의학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는데, 요즘 특히 ‘치유’에 관한 공부를 열심히 합니다. 사실 저는 신학생 시절 ‘어떤 고통이든 너 스스로 이겨내라’라고 배웠어요. 스스로 극복하지 못하면 신심이 약해서라고 질책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전문가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굉장히 위험하고 폭력적인 시선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하시더군요. 상처를 개인의 탓으로 돌려서도, 극복을 강요해서도, 혼자의 짐으로 지워서도 안 된다고요.

세상 속 삶의 좌표를 잃어버린 당신에게 함세웅 신부의 메시지

세상 속 삶의 좌표를 잃어버린 당신에게 함세웅 신부의 메시지

그래서 요즘, 더욱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자 합니다. 고통을 잔뜩 지고 오신 분이 있으면 제가 무슨 말을 하기보다는 묵묵히 듣고 조용히 손을 잡아드립니다. 저뿐만 아니라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사람을 찾기 힘들어요. 전부 다 자신의 이야기만 하려고 하지요. 남들이 내 고통을 알아차릴 때까지 쏟아내야지만 숨통이 트일 거라 생각하기에 그렇겠죠. 모두가 자신이 가장 힘들고, 가장 어두운 곳에 홀로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두가 힘들고 어렵습니다. 당신이 느끼는 감정 하나하나가 결코 대수롭지 않은 것도, 크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어둠을 체험한 사람만이 빛의 밝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이를 ‘십자가를 통한 부활’이라고 합니다.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 부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저 또한 버티기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 많았지만, 이런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고 있었기에 어떠한 경우에도 희망을 지니고 살 수 있었습니다.

“사람의 힘을 믿고, 또 그러한 사람들 사이에서 힘을 얻을 수 있기에 긍정적으로 살아나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신학을 공부하면서 신앙과 사제의 존재 이유는 이웃에게 다가가는 삶이라고 확신했습니다. 함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위하고 아끼는 마음을 갖는 것, 자신이 아닌 타자가 중심이 되는 인생 말입니다. 힘든 일이나 고통을 당할 때면 그런 삶의 목적을 상기시키곤 했죠. 하느님은 고통보다는 사람과 함께하시며 우리 삶의 현장에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와 함께 아파하고, 노력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죠. 종교와 무관하게 모두 되새겨볼 만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같이 아픔을 극복하면서 살아가야 할 존재를 인식하는 거죠. 지금도 주위를 둘러보면 더한 허탈감과 절망감에 놓인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마치 죽음 같은 고립에 휩싸인 사람 말입니다. 아마도 우리가 서로를 확인하고 연대할 때, 그들도 나도 고통과 허탈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우리는, 계속 삶을 아름답게 살아나가야 하니까요.

나의 성장을, 세상의 전진을 꿈꾸는 당신에게
다소 이분법적이긴 합니다만, 인간은 양면성을 갖고 있고 따라서 고통도 내외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겉으로 상처가 봉합되면 금방 나을 줄 알아요. 중요한 것은 ‘전적 치유’이고, 이는 자신에 대한 내적 성찰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먼저 자신을 들여다보고 반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저는 인간이 갖고 있는 내면적인 힘을 믿습니다. 믿음은 치유의 가장 중요한 바탕이라고 하더군요. 자신의 삶에 집중하고 가치를 부여하는 것, 그리고 긴장을 내려놓고 충분히 스스로를 믿는 것. 사실 신앙생활은 이미 집중과 감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가장 권위있는 치유 행위입니다. 믿음과 신뢰의 삶이 치유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신학생 시절, 빨리 사제가 되고 싶었습니다. 시간이 더디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져 괜한 조바심만 내던 신학생들에게 한 교수신부님은 “여러분은 이미 사제가 된 것처럼 지내십시오. 목표가 확실하다면 언젠가 자연스럽게 사제가 될 테니, 지금부터 사제로서의 마음가짐과 행동으로 살아가면 훨씬 큰 뜻이 있습니다”라고 하시더군요. 그 말씀이 무척이나 마음에 와 닿아서 그때부터 늘 앞으로 만날 모든 분들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들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고 봉헌하기로 했던 거죠. 그리고 이제껏 그 첫 마음을 간직하며 살아왔어요. 그러니 저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똑같이 살아갈 겁니다. 저를 위해서,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내외적인 치유를 위해서. 역사와 민족 속에서 한 명의 시민이자 신앙인으로 노력할 겁니다. 요즘 지나친 절망감 때문에 무력과 비관에 빠진 사람들이 많죠. ‘노력한다고 해도 달라질 게 없다’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많고요. 그런데 전도서를 보면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라고 돼 있어요. 천 년 역사, 만 년 역사에 비춰보면 이토록 절망적인 이 상황도 한 점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젊은이들의 허탈함은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저는 그럴수록 더욱 힘을 내서 더욱 적극적으로 ‘나쁜 사람들의 세상’을 바꿔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구정물 웅덩이에 깨끗한 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고 해서 웅덩이가 당장 맑아지지는 않겠지만 그 한 방울만큼은 분명 깨끗해진 거니까요. 아름다운 삶을 ‘조화롭게’ 창조해나갈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젊음은 분명 큰 축복입니다. 그리고 미숙한 사람들을 사랑으로 감싸면서 동지로 만드는 것이 젊은이들이 할 수 있는 창조의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여러분도, 역사와 민족 그리고 이 사회 안에서 극복하고 희망하면서 앞으로 걸어 나갑시다.

■글 / 이연우 기자 ■사진 / 민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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