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계 최초의 하버드대 로스쿨 종신교수 석지영의 일과 자녀교육 매뉴얼
처음부터 법학자? 그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발레리나, 피아노 영재, 문학박사 등을 차례로 거쳤다. 자신의 삶의 철학을 담은 「내가 보고 싶었던 세계」(북하우스) 출간을 기념해 고국을 찾은 그녀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가 보고 싶었던 세계와 지금 보고 있는 세계에 대해.
발레학교와 줄리아드 예비학교 출신
문득 그녀가 계속 발레를 했어도 지금에 못지않은 명성을 얻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녀의 성정과 의지로 미루어보았을 때 말이다. 석 교수는 한때 발레리나를 꿈꾸었다. 6세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 간 그녀는 학교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영어도 한마디 못 하는 유색인종일 뿐이었다. 발레리나 동생을 둔 어머니는 가계가 어려운데도 딸에게 발레를 가르쳤다. 어머니는 내성적인 딸을 바꿔줄 취미 정도로 생각했지만 발레는 어린 소녀의 탈출구가 됐다. 그녀의 노트는 신문과 잡지에서 오래낸 무용수들의 사진으로 채워졌으며 미국 최고의 발레학교 중 하나인 아메리칸발레학교(SAB) 진학으로 이어졌다.
문제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졌다. 발레는 교양수업일 뿐 직업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 부모님이 대입 내신에 포함되는 9학년 이후에는 그만둘 것을 SAB 입학 조건으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녀는 발레리나의 꿈을 접었다.
“어린아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잖아요. 당시는 상황도 좋지 않았고요. 사실 지금도 부모님의 결정이 옳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발레리나가 됐다면 지금보다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토슈즈를 벗은 그녀는 방황했다. 부모님과의 관계도 악화됐다. 그때는 갈등을 현명하게 풀지 못했다고 스스로 말할 정도다. 학교생활도 엉망이 됐다.
“중·고등학교 때 성적이 좋은 편은 아니었어요. 수업에 집중하지도 못했고 숙제를 안 하기도 했죠. 일종의 반항이었던 거 같아요. 당연히 성적도 들쭉날쭉했지요. 그것 때문에 부모님과 갈등도 있었고요. 행동 하나하나부터 제 외모까지 어머니는 저의 모든 것을 못마땅해했어요.”
딸의 예술적 재능을 잠재우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은 어머니는 딸을 피아노 앞에 앉혔다.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쳤던 그녀는 이번에는 줄리아드 예비학교에 합격한다. 줄리아드는 전 세계 최고의 음악 영재들이 모이는 학교로 명성이 높다.
“발레를 하지 못해서 힘들었죠. 그 갈등을 현명하게 견뎌낸 거 같진 않아요. 하지만 다행히 발레 이외에도 다양한 것들을 할 수 있었어요. 에너지를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게 된 거죠.”
문학도에서 법학도, 다시 한번 터닝포인트
그녀는 학창시절을 영재학교에서 보냈지만 성적이 상위권도 아니었고 꾸준히 공부하는 습관도 없었다. 다만, 철학과 문학 시간에는 활발했다. 그녀가 발레와 피아노 이외에 좋아하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소설 읽기였기 때문이다. 학교 선생님들은 그녀가 아이비리그 중에서도 학생들의 예술적 성향을 높게 평가하는 예일대에 걸맞은 인재라는 사실을 포착했다. 예일대에서는 그녀를 받아들였고, 그녀는 학부에서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다 영국 옥스퍼드대로 캠퍼스를 옮겨 문학박사 학위를 거머쥐었다. 그녀는 26세에 박사 학위를 땄지만 문학자의 길은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고 느꼈다. 문학을 좋아하고 문학작품을 읽는 것은 즐겁지만 쓰는 것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글을 계속 써야 한다면 괴로울 거 같았어요. 일을 억지로 해야 할 것 같았죠. 초조함을 덜 느끼는 분야에서 일을 하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발레를 했던 경험에 미루어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 행복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왔던 그녀는 문학자의 길에서 미련 없이 빠져나왔다. 삶에 실용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분야에 대해 고민하다 하버드대 로스쿨에 입학했다.
“예일대에서 고홍주 당시 예일대 법대 교수의 글을 읽은 것이 계기가 됐어요. 인권문제에 관한 글을 보면서 법이 사회에 가치 있는 일이라고 여기기 시작했지요. 하지만 법을 이렇게 좋아하게 될지는 몰랐어요. 제가 법과 사랑에 빠진 건 하버드대 로스쿨에 입학한 후였어요. 수업을 듣다가 갑자기 ‘아,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발레리나는 포기해야 했지만 운 좋게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찾은 거지요.”
그녀가 문학을 공부했던 시간은 헛되지 않았다. 그때 쌓은 글 읽기 능력은 복잡한 법률 자료를 이해할 수 있는 바탕이 됐다. 몇 명의 스승에게서 용기를 얻은 그녀는 문학보다 단도직입적이고 정확성, 명확성을 가진 법학적 글쓰기에도 점차 익숙해졌다. 로스쿨 졸업 후 미국 대법원 법률서기, 뉴욕 맨해튼검찰청 검사로 재직한 다음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그녀에게 영감을 준 다른 스승들처럼 그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방식으로 세상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일을 하는 중 그녀는 논문을 쓰고 여러 저널에 글을 기고하며 커리어를 쌓았고 드디어 2006년에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가 될 수 있었다. 이후 우리가 아는 대로 그녀는 4년 만에 종신교수직을 따냈다.
문학과 예술, 스포츠를 사랑하는 아이로

아시아계 최초의 하버드대 로스쿨 종신교수 석지영의 일과 자녀교육 매뉴얼
“저는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학교에서 근무하는 교수예요. 당연히 제 어머니가 그랬듯이 24시간 동안 아이들을 돌봐줄 수 없어요. 스스로 완벽한 엄마가 아니란 사실을 인정하는 게 중요해요.”
겸손하게 말하지만 법대 교수답게 그녀는 자녀교육에 대한 몇 가지 법칙을 가지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절대 비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비교를 많이 해요. 무엇이 더 낫다, 다른 집 아이들은 이런 부분을 잘하더라, 하면서요. 하지만 저는 절대 비교하지 않아요. 저만의 스타일이라고 말하기보단 미국 부모들이 보통 비교를 잘하지 않는 것 같아요.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거죠. 규칙이 있다면 ‘언제나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스스로 결정한다’ 정도예요.”
그녀의 말처럼 자신에게 가장 재미있는 것을 찾기 위해서는 주변의 압박이 없어야 한다. 자신의 능력에 맞는 것을 찾을 수 있고, 흥미와 재능이 있는 일을 하면 자연스럽게 성과가 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석 교수의 신념이다.
“저에겐 아들과 딸이 한 명씩 있는데요. 아들이 한때 발레를 배웠어요. 하지만 발레학원에서 남자는 아들 혼자였죠. 부끄러워하고 가기 싫어하기에 가지 말라고 했죠. 그래서 학원을 그만뒀어요. 어느 날인가 아이들과 ‘프린세스 브라이드’라는 영화를 보고 있었어요. 주인공이 펜싱을 하는 장면이 나오자 아이들이 펜싱을 배우고 싶어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는 펜싱을 배우게 했어요. 막상 학원에 데리고 갔는데 초급반 학생은 우리 아이들밖에 없었던 거예요. 진도를 따라가지 못하니 금방 흥미가 떨어졌나 봐요. 그만하겠다고 말하더라고요. 저는 당연히 그럴 수 있지만 3개월은 배우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죠. 어떤 일에서 재미를 느끼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노력이 필요한데 그게 3개월인 것 같다고요. 3개월 뒤에도 재미가 없다면 그만두어도 된다고 말했지요. 지금은 재미있어 하면서 계속 다니고 있어요.”
꿈을 찾은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지 말 것
석 교수는 예술과 스포츠, 문학과 법학을 넘나들었던 경력답게 아이들이 다재다능하길 원한다. 그것이 인생을 즐길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녀 역시 법학으로 머리가 복잡해질 때면 소설을 꺼내들고, 일주일에 두 번씩 요가나 필라테스로 기분을 전환한다. 아이들은 이제 스포츠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석 교수가 겨울이면 유타 주에 가서 스키를 타고, 여름이면 보스턴의 해변에서 시간을 보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외에도 봄이면 함께 여행을 가며 다양한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한다고. 아이들은 석 교수의 스포츠와 예술에 대한 열정뿐 아니라 문학에 대한 열정도 물려받았다. 그녀 역시 자녀들과 문학에 대한 열정을 공유하고 싶다는 욕심도 내비쳤다.
“아이들과 책을 공유하고 싶어요. 우리 아이들이 책을 사랑하지 않으면 조금은 슬플 거 같아요. 실망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받아들여야죠. 다행히 아직까지는 책을 좋아해요. 매일 밤이면 아이들과 30분이나 1시간 정도 함께 책을 읽어요. 요일을 정해서 제가 고른 책을 읽어주기도 하고, 아이들이 읽고 싶어 하는 책을 읽어주는 날도 있고요.”
이외에도 아이들은 (어머니의) 한국식 혹은 (아버지의) 유대식 교육을 받는 등 풍부한 경험을 하며 지내고 있다. 가끔은 외할머니의 한국식 교육도 받는다.
“아이들을 보기 위해 가끔 어머니가 집에 오세요. 그럴 때마다 아이들이 항상 농담을 하죠. 할머니는 1분도 감시의 끈을 놓치지 않는다고요(웃음). 제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사고라도 날까 봐 목욕탕까지 따라갈 기세예요. 걱정 많은 스타일이시거든요.”
아이들의 아빠는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인 노아 펠트먼. 지금은 부부가 헤어진 상태라 아이들은 엄마와 아빠의 집을 오가며 일주일씩 생활하고 있다.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법은 무엇일까요?”
인터뷰 말미에 기자는 불쑥 질문을 던졌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적성을 찾아 진로를 거듭 수정했고, 현재는 예술을 사랑하는 로스쿨 교수인 그녀이기에 대답이 사뭇 궁금했다.
“급하게 생각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해요. 여러분이 무언가를 해야겠지만 모든 것을 할 필요도 없고, 또 하기도 힘듭니다. 열린 마음을 갖고 묵묵히 준비하면서 기회를 기다리세요. 이미 꿈을 찾은 사람과 비교하면서 성급하게 자신을 몰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세요.”
대답을 마친 석 교수가 활짝 웃었다. 과연, 그녀다웠다.
■기획 / 장회정 기자 ■글 / 박은혜(프리랜서) ■사진 / 이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