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평균 6백 회 수화통역, 청각장애인과 세상의 경계에 선 베테랑 수화통역사

조성현 수화통역사의 손으로 읽는 세상
“이정희 후보 사퇴의 최대 수혜자라고 하더군요(웃음). 말씀이 좀 빠른 것뿐이지 힘들지는 않았어요. 수화는 표정 전달이 50%예요. 말하는 사람의 억양과 감정까지 함께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말씀을 천천히 하는 분들의 경우엔 아무래도 그런 것들을 전달하기가 수월하죠. 방송을 한 지 20년이 넘었는데 그렇게까지 이슈가 됐던 건 처음이에요. 여기저기에서 연락도 많이 받고 나름 재미있었어요.”
조그만 원형 화면 속 바쁘게 손가락을 움직여 뉴스를 전달하는 그를 보며 어떤 목소리일까, 궁금했던 적이 있다. 화면 밖 조성현씨는 편안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진 친근한 옆집 아저씨 같은 인상이었다. 1992년 처음 방송에서 수화통역을 시작해 1994년부터 지금까지 KBS 5시 뉴스의 수화통역을 맡고 있는 그는 이제 방송사 수화통역사 중 제일 고참이다. 그를 거쳐간 앵커만 해도 수십 명, 19년을 한결같이 방송과 청각장애인들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해왔다.
“예전에 뉴스를 같이했던 스태프를 우연히 만났는데 저를 보고 ‘그대로이십니다’라고 인사를 하더라고요. 제가 ‘이 사람아, 나도 많이 늙었지’라고 하니 헤어스타일이 그대로라고 하더군요(웃음).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헤어스타일이 거의 똑같아요. 손이 잘 보여야 하기 때문에 옷도 계절에 상관없이 항상 검은색만 입고요. 시선을 다른 곳에 뺏기지 않도록 강한 색깔의 넥타이도 피해요. 근데 빨강, 노랑, 파랑 빼면 할 넥타이가 없어요(웃음).”
얼마 전 방송이 아닌 한 인터뷰에서 황색 계열의 넥타이를 맸다가 특정 정당을 연상시킨다는 내용의 항의도 받았었다. 뉴스에서 정치적인 이슈를 다루다 보니 그런 것들이 예민하게 작용한다. 특히 선거 연설이나 대선 후보 토론 방송 때는 더더욱 그렇다.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출마하셨던 15대 대선부터 토론 수화통역을 맡아왔어요. 대선 후보 토론 같은 경우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공평하게 전달하는 것이 중요해요. 혹시라도 있을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 후보들의 공약과 정책을 자세히 체크하고 원고도 미리 보고 들어가요. 최대한 공평하게 한다고 하더라도 저도 사람인지라 컨디션에 따라 달라질 수 있거든요. 숫자나 수치가 들어 있는 내용은 꼼꼼히 확인하고 단어의 선택도 좀 더 고려하는 편이에요. 제가 실수하면 청각장애인 유권자들에게 잘못된 정보가 전달되는 것이기 때문에 책임감을 느끼죠.”
“뉴스 수화통역은 정확하고 공평하게, 넥타이도 함부로 못 매요”
수화가 열어준 새로운 세상
조성현씨가 수화를 처음 접한 것은 1989년, 군대 제대 후 복학하기 전이었다. 청각장애인복지회관인 청음회관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기도 했던 그는 의외로 화학공학과 출신의 공대생이었다. 당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수화통역의 길을 택했을 때 주위에서 “미쳤다”라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졸업 후 친구들은 대기업에 취직해 1백만원이 넘는 월급을 받으며 회사를 다닐 때 그의 월급은 34만원이었다.
“교회에 수화를 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우연히 그 친구가 다른 청각장애인 친구와 수화로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그 전까지 청각장애인은 물론 장애인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같은 한국 사람인데 대화가 안 된다는 게 이상했고 손짓만으로도 그렇게 즐겁게 웃으면서 대화를 한다는 게 무척 신기했어요. 그때부터 배우기 시작해서 나중에는 학교를 휴학할 정도로 열심히 했어요. 자원봉사를 다니며 청각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하다시피 했죠. 실제로 수화를 배운 건 3개월 정도고 현장에서 사람들을 만나며 몸으로 익힌 것이 더 많아요.”

조성현 수화통역사의 손으로 읽는 세상
“그들의 순수함에 끌렸던 것 같아요. 수화를 하며 청각장애인뿐 아니라 시각장애인, 지적장애인, 자폐아와 같은 더 많은 장애인들을 만날 수 있었고 제가 이제껏 보지 못했던 세상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좀 더 많은 것이 보이더라고요. 예전에는 제 주위에 청각장애인이 한 명도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몰랐기 때문에 보지 못했던 거예요. 지금은 이렇게 얘기를 하다가도 옆에서 누가 손을 움직이면 ‘탁’ 시선이 가요. 생각보다 많은 청각장애인들과 함께 살고 있구나, 라는 걸 알았죠. 아마 다른 분들도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순간 보이실 거예요.”
청음회관에서 자원봉사를 하다 취직도 했고 방송도 하게 됐으며 수화 동아리에서 지금의 아내도 만났다. 그야말로 수화로 바뀐 인생이다.
“초창기에는 수화통역을 하는 방송이 많지 않았어요. 방송 3사가 할당량을 나눠 돌아가면서 했는데 장애인에 대한 배려보다는 강제성이 있었죠. 산만하고 보기 싫다고 빼라는 항의 전화도 많이 받았고요. 그즈음 청각장애인 자녀가 있는 어느 가정의 얘기를 들었는데, 그때까지 아들 때문에 TV를 장롱 속에 넣어뒀대요. 아들이 소리를 들을 수 없으니까 가족이 다 같이 TV를 보지 않기로 한 거죠. 그러다 뉴스에서 수화통역을 하는 걸 보고 다시 TV를 꺼내서 아들과 함께 봤다고 하더라고요. 그 얘기를 듣고 계속해야겠구나 싶었어요. 예전보단 환경이나 인식이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선진국에 비해선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아요. 앞으로 더 노력해야죠.”
말을 움직임으로 전하다 보니 체력 소모가 만만치 않다. 수화통역사들은 대부분 목과 어깨 쪽이 안 좋다고. 이번 대선 토론 때도 거의 매일 침을 맞으며 수화를 했다. 손가락 관절염 정도는 이제 웃으면서 넘길 정도로 수화에는 도가 튼 베테랑이지만 그에게 여전히 어려운 것이 있다.
“뉴스를 하며 딱 한 번 운 적이 있는데, ‘미선이 효순이 사건’ 때였어요. 원래 뉴스 통역을 할 때는 전달자 입장에서 최대한 감정을 싣지 않고 팩트만 전달하려고 하거든요. 그런데 그때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더라고요. 가슴 아픈 내용의 뉴스를 전할 때면 울컥할 때가 있어요. 20년 동안 수화통역을 했어도 여전히 컨트롤하기 쉽지 않은 부분이에요.”
좋은 소식만 전하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뉴스라는 것이 늘 좋은 소식보다 나쁜 소식이 더 많게 마련이다. 이 세상에 좋은 소식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는 요즘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얼마 전 서울시에 아동복지단체 등록을 했어요.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많이 개선되고는 있지만 성인들의 인식을 바꾸는 건 참 힘들더라고요. 일반 아동들과 장애인 아동들의 교육부터 시작해 바꿔나가면 그 아이들이 성인이 됐을 때는 세상이 좀 더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요. 20년 넘게 수화를 했으니 이제 젊은 친구들에게 자리를 비켜줘야죠. 다시 한번 시작해보려고요.”
4시 45분 뉴스 시작 15분 전, 그를 보내줄 시간이 다가왔다. 마지막으로 수화로 독자들에게 전하고픈 말을 수화로 청한 기자에게 그가 가르쳐준 단어는 ‘희망’과 ‘사랑’이었다. 손으로 전하는 따뜻한 마음, 그와 함께한 시간은 영하의 날씨를 녹일 정도로 훈훈했다.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안진형(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