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된 화물차 운전사 이정훈

시인이 된 화물차 운전사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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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자동차 핸들을 잡은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무렵이었다. 운전석에 앉은 아버지의 무릎에서 운전을 배웠다. 왜 그랬는지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운전을 자세히도 가르쳐주었다. 운명이었을까. 아들은 커서 운전사가 됐다. 그리고 운전을 하며 시를 생각한다. 아버지와 함께 보냈던 그 어린 시절을 목적지로 내달리면서….

시인이 된 화물차 운전사 이정훈

시인이 된 화물차 운전사 이정훈

발뒤꿈치에 나던 땀
마흔 살 되던 무렵이었다. 예고도 없이 찾아온 알 수 없는 열병이 그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밥 한 술 뜨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곤혹스러운 일이 됐고, 잠 한 숨 푹 자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 돼버렸다. 어쩌다 잠이 들라치면 두 시간을 넘기지 못하고 깨어났다. 어느 날은 잠에서 깨어보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바닥에 닿았던 데는 죄다 흥건히 젖어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발뒤꿈치에서도 땀이 난다는 사실을.

“보름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니 더는 안 되겠다 싶어 병원을 찾아갔죠. 네, 정신과요. 그런데 웃긴 건… 진료실에 들어가 의사 선생님과 딱 마주 보고 앉으니 알겠더라는 거죠. 제 병을 말이에요(웃음).”

당시를 회상하는 이정훈(47)은 담담히 웃어 보이며 우울증이었노라 간단히 답을 한다. 하지만 단순 우울증으로 알고 넘어가기에는 그가 다 말하지 않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많이 아팠다던 마흔 살은 그가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조금 더 채근해보았다. 시를 써야 하는 그 운명이 안에서 곪다 못해 터져버린 것은 아닌지 말이다. 신 내림을 거부한 무녀는 병이 난다. 혹 그는 ‘시 내림’을 거부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사람이 마흔 살 즈음이 되면요, 말할 데가 없어져요. 가족이든, 친구든, 동료든 어디에든 말이죠. 인생이 허무하고, 자괴심이나 열등감 같은 것이 물밀 듯 밀려왔던 것 같아요. 왜 아픈지 마음은 알았는데, 몸과 머리가 몰랐던 거죠. 어느 날 의사 선생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종이에다가 내 안에 남아 있는 걸 써보래요. 그게 뭔지 말이에요. 그런데 마흔 평생 뭐 하나 적을 게 없더라고요.”

책을 좋아하긴 했지만 이정훈은 시인이 되겠다는 생각을 구체적으로 가져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그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무엇을 종이에 남기기 위해 찾아간 곳은 시 교실이었다.

“제 마음속에 남기고 싶은 어떤 흐릿한 풍경들이 있어요. 차창 밖으로 지나가버리면 그만인, 붙잡을 수 없는 과거의 어느 날 같은 기억이죠. 그것은 사진으로 찍을 수도 없고, 그림으로 그려놓을 수도 없어요. 그 시간을 잡아보려면요. 왜 시였느냐고 하면 그렇게밖에 답을 하지 못하겠네요. 그리고 시를 쓰는 데는 특별히 돈이 들지도 않잖아요. 종이하고 연필만 있으면 되니까(웃음).”

큰 소리를 내는 법도 없고, 소리 내 웃는 법도 없었다. 하지만 이정훈의 말과 표정은 그의 마음을 짐작해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어떤 말은 큰 소리로 강조하는 것 같았고, 어떤 표정은 박장대소라도 하는 듯 보였다. 그렇게 그는 ‘왜 시였는지’ 한참을 이야기했다. 그 모습은 영락없는 시인이었다. 포털 사이트에서 찾아낸 시 교실 중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을 선택해 처음 시를 배우기 시작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느낌은 문예 아카데미의 선생님 또한 마찬가지였나 보다.

“제가 시를 배우던 곳이 종로에 있던 민예총 문예아카데미 시 창작 교실이었어요. 처음 그곳에 갔을 때는 시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어요. 윤동주, 김소월밖에요. 첫 수업에 나가니까 다음 시간까지 뭘 하나 써오래요. 그래서 난생처음 시라는 걸 써 보게 된 거예요. 그런데 그 시를 선생님께서 보더니 ‘어우! 습작을 굉장히 오래하셨는가 봐요?’ 하며 놀라시더라고요.”

이정훈의 첫 시였다.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 스스로 그것이 시라고 할 수 있는지 구분이 되지 않을 때였다. 선생님의 반응은 그에게는 꽤 고무적으로 다가왔다. ‘아, 내가 시에 소질이 있나?’ 생각이 들며 반신반의하던 불안감이 사라지기도 했고, 제대로 찾아왔다는 안도감도 들었다. 이유를 알 수 없던 마흔 살 열병의 실마리가 조금은 풀리는 기분이었으리라.

“그 무렵은 지독히도 힘든 시간이었어요. 몸과 마음, 생활이 전부 엉망진창이었죠. 한번은 부부싸움을 했는데, 서로 ‘나가!’라면서 고성을 주고받다 제가 짐을 쌌어요.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했죠. ‘뭐, 어영부영 싸다 보면 시간이 흘러서 밤도 되고, 그러다 보면 잘 때 되고, 내일 나가야지 하다 보면 끝나겠지’ 하고 말이에요. 그런데요, 제 짐을 다 싸는 데 채 두 시간이 안 걸리는 거예요. 아, 그때도 얼마나 충격이었는지…. 그렇게 집을 나왔네요.”

우울증, 이혼, 알 수 없는 창작에 대한 욕구가 한꺼번에 그를 덮쳤던 때였다. 착하고 성실하게만 살아왔다고 자부했다. 그래서인지 억울한 마음에 속절없이 스스로가 가여워 잠 못 들기도 했다. 그런 그가 시라는 목적지를 알려주는 이정표를 만나고서야 비로소 숨을 쉬게 된 것이다.

시는 내게 귀향이다
“‘쏘가리, 호랑이’를 비롯한 이정훈의 작품은 요즘 우리 시단에서 보기 힘든 신화적 상상력의 눈부신 질주를 보여준다. 그 상상력은 강물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를 산맥에 치달리는 호랑이로 치환시키는 마법을 가능케 한다. 우리 민족 고유의 향토적 풍광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시는 마치 이 땅에 산업사회가 도래한 적이 없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언어의 구체성과 밀도를 획득하고 있다.”

이정훈의 당선작 ‘쏘가리, 호랑이’ 당선 평 중 일부이다. 첫 시부터 시적으로 야무지게 영글어 있던 그의 시성(詩性)은 지난 1월 초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의 영광을 안긴 ‘쏘가리, 호랑이’에서도 유감없이 나타났던 모양이다.

“3년 전 즈음에 썼던 시였어요. 처음 쓴 다음 산문으로도 바꿔보고, 행갈이도 해봤죠. 지금도 완성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이제는 제 손을 떠났으니…. 어떻게 쓰게 됐냐고요? 추운 겨울밤에요. 잠도 안 오고 심심하면 뭐 하세요? 전 고기를 잡으러 가요. 어떻게 겨울밤에, 그것도 도시에서 고기를 잡으러 가느냐고요? 그러니까요. 못 가니까 눈을 감고 생각을 하는 거죠. 심심하면 강으로 가 고기를 잡던 때를요.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고기를 찾아 훑었던 것처럼 그렇게 기억을 훑으면서 시를 써요.”

어느 인터뷰에서 이정훈은 자신에게 시란 일종의 귀향이라고 했다. 자신이 세상의 모퉁이에서 마음 다쳐 울고 싶을 때, 혹은 이게 아닌데, 아닌데 하면서도 생활에 지쳐 몸을 추스를 엄두가 나지 않을 때 방학 날 귀향하던 기분으로 시를 쓴다면서 말이다. 기억 속 고향에 도착하면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가 참외 하나를 깎아 내밀기도 하고,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운전을 배우기도 하고, 작살을 들고 강에 나가 쏘가리를 잡기도 한단다.

“제 시를 신화적이라고도 하지만 제겐 그렇지가 않아요. 생생하기만 한 과거의 추억이자 기억이죠. 실제로 큰아버지는 전쟁으로 죽었고, 저희 아버지는 손가락이 세 개나 없어요. 불발 수류탄을 분해하다 하나를 잃었고, 방앗간 벨트에 나머지를 잃으셨죠. 마흔 즈음에서야 비로소 깨달았던 것 같아요. 할아버지와 큰아버지, 아버지와 저로 이어지는 어떤 좌절과 패배의 끈질긴 족보 같은 것을요. 그제야 전 비로소 몸과 마음이 평온해질 수 있었습니다.”

소 장사를 하던 할아버지, 전쟁에 나가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은 큰아버지, 손가락은 세 개나 없으면서도 장가는 세 번이나 갔던 아버지가 이해되는 순간 그에게 시가 찾아왔다고나 할까.

시인이 된 화물차 운전사 이정훈

시인이 된 화물차 운전사 이정훈

신춘문예 당선? 장난치지 마!
이정훈은 마흔에 처음 시를 쓰기 시작해 서른 번 정도 신춘문예에 응모했다. 경험 삼아 부담 없이 내기도 했고, 당선을 간절히 바라며 원고를 보내기도 했다. 그렇게 보낸 시간이 4, 5년 정도다. 하지만 당선은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더는 시를 쓰지 말자 포기하려고 했었단다. 신춘문예 당선자라는 타이틀이나 정식 등단에 목을 맸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디선가 자꾸만 부풀어 오르는 기대감이 그를 괴롭혔었나 보다. 어엿한 생업이 있었고,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을 적어낼 시를 만났으니 그것으로 족하단 생각으로 그는 신춘문예 당선의 희망을 완전히 접었다.

“그랬더니 신춘문예에 당선됐다고 전화가 걸려왔어요. 어느 신문의 누구누구라면서요. 그런데 마침 그 이름이 우리 모임 총무 이름이랑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당선되셨어요’라는 말을 듣자마자 대뜸 ‘장난치지 마! 새끼야’라고 해버렸지 뭡니까(웃음). 당선된 기분이요? 소감이요? 장난인 줄 알았다니까요.”

아직도 혹시 무슨 착오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가끔 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기는 했다는 말은 잊지 않았다. 여기서의 묵은 체증이란 비단 당선을 간절히 바랐던 마음만은 아니었다. 끝을 모르는 어떤 방황의 이유를 알게 된 것 같은 청량감이었다. 인생이란 참 얄궂은 것인가 보다. 그가 가장 괴로울 때 시가 찾아오더니, 시를 포기하자니 당선이 그의 발목을 잡은 꼴이 됐으니까.

“주변 반응이요? 이제 막 대학에 들어간 큰딸에게만 전화하고 다른 곳에는 알리지도 않았어요. 그러다 화물연대에서 단체 문자를 보냈나 봐요. 원래 크고 작은 대소사를 그렇게 나누거든요. 그래서 다들 알게 됐죠. 언제 그런 것도 했냐고 하대요(웃음). 친구 놈 하나가 만년필을 선물로 주기도 했죠. (시인이) 만년필 하나는 있어야 한다면서 굳이 서울까지 나가 사왔더라고요.”

38번 국도를 달리는 나의 트럭, 나의 시
이정훈의 신춘문예 당선이 특히 화제가 됐던 것은 화물 트레일러 운전사라는 특이한 이력 때문이었다. 시인이 되고자 했던 집배원의 이야기가 아름다웠던 어느 영화처럼, 시인이 된 운전사랄까. 그가 처음 운전을 시작한 것은 승차 요금이 1백원 하던 시절, 동네 한 바퀴를 돌던 마을버스였다. 그러다 기왕 운전을 하려면 큰 차로 하자 싶어 트레일러 운전을 배웠는데 그때 그의 나이 스물 여남은 살 무렵이었다. 그리고 꼬박 20년 동안 화물차를 몰았다.

“휘발유가 1리터에 5백 몇 십원, 경유가 3백 몇 십원 하던 시절이었는데 기사 월급이 1백만원 조금 넘었어요. 대졸 초임이 60, 70만원 정도였으니 괜찮은 벌이였죠. 또 전 운전이 좋았어요. 운명이었나 봐요. 역마살이 있는지, 차를 타고 계속 돌아다니는 게 나쁘지 않았어요. 그나저나 뭐 따질 것 없이 돈을 벌어야 하기도 했어요. 대학 3학년 때 결혼을 해 이미 가장이 되어 있었던 터라, 아이 분유 값이 필요했죠(웃음).”

화물차 운전사의 등단이라는 이야기를 접했을 때 그에게는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가난으로 인해 못다 이룬 학업에 한이 남는다는 뭐, 그런 뻔한 스토리가 있지 않을까 편견 어린 짐작을 했다. 부끄럽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정훈은 대학을 두 군데나 다닌 이른바 ‘먹물 중 먹물’이었다. 비록 처음 입학한 대학은 중간에 그만두었지만 말이다. 그 이유를 묻는 질문에는 시절이 하 수상하던 때라고만 했다. 그렇다보니 적령기에 한 결혼임에도 대학 3학년이라는 학생 신분이었고, 아이 분유 값이 급해 바로 밥벌이에 나서야 했다. 하지만 이정훈은 자신의 일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것 같았다. 운명이라고 표현할 만치 말이다.

“제가 처음 핸들을 잡은 게 초등학교 6학년 때였어요. 우리 집에 낡은 포니 한 대가 있었는데, 왜 그랬는지 아버지가 운전석으로 날 불러 무릎에 앉히고는 참 자세히도 운전을 가르쳐주셨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운명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제게 운전이 말이죠.”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난 이정훈은 여덟 살 되는 해 서울로 유학을 왔고, 강원도 춘천에서 대학생활을 한 뒤 분당에서 십수 년을 살았다. 그리고 지금은 제천과 안성을 잇는 38번 국도를 화물차로 오가며 살고 있다. 운전석은 이정훈에게 어머니의 자궁 같은 편안한 공간이라고 한다. 원하는 담배를 마음껏 피울 수 있으며, 오롯이 주어지는 사색의 공간이 돼주기 때문이다.

“사실 기사들은 자기 화물차를 색시나 작은집에 비유해요(웃음). 요즘은 노동자로 시인이 돼야 하는 건지, 시인으로 노동자가 돼야 하는 건지 고민도 돼요. 동료가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우리 화물차 운전사들은 공장에 주유소, 타이어 가게, 공업사, 세무서, 경찰서, 하다못해 기사 식당까지 먹여 살리는데 제 식구만 못 먹여 살린다고요(웃음). 그래도 운전은 계속할 거예요. 시 쓰기를 멈추지 않는 것처럼요.”

시종일관 담담함을 잃지 않는 이정훈에게서 더 이상의 불안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마도 그가 운전하는 화물차가 향하는 목적지가 정해졌기 때문이리라. 더 이상은 발뒤꿈치에서 땀이 나지 않게 됐다는 그의 다음 시가 무척이나 궁금해진다. 그나저나 38번 국도에 가면 시인을 만날 수 있을까.

쏘가리, 호랑이
나는 가끔 생각한다
범들이 강물 속에 살고 있는 거라고
범이 되고 싶었던 큰아버지는 얼룩얼룩한 가죽에 쇠촉 자국만 남아
집으로 돌아오진 못하고 병창 아래 엎드려 있는 거라고
할애비는 밤마다 마당귀를 단단히 여몄다
아버지는 굴속 같은 고라댕이가 싫다고 산등강으로만 쏘다니다
생각나면 손가락만 하나씩 잘라 먹고 날 뱉어냈다
우두둑, 소리에 앞 병창 귀퉁이가 와지끈 무너져 내렸고
손가락 세 개를 깨물어 먹고서야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갔다
아버지가 밟고 다니던 병창 아래서 작살을 간다
바위너덜마다 사슴 떼가 몰려나와 청태를 뜯고
멧돼지, 곰이 덜걱덜걱 나뭇등걸 파헤치는 소리
내가 작살을 움켜쥐어 물속 산맥을 타넘으면
덩굴무늬 우수리 범이 가장 연한 물살을 꼬리에 말아 따라오고
내가 들판을 걸어가면
구름무늬 조선표범이 가장 깊은 바람을 부레에 감춰 끝없이 달려가고
수염이 났었을라나 큰아버지는,
덤불에서 장과를 주워 먹고 동굴 속 낙엽잠이 들 때마다
내 송곳니는 점점 날카로워지고
짐승이 피를 몸에 바를 때마다
나는 하루하루 집을 잊고 아버지를 잊었다
벼락에 부서진 거대한 사스레나무 아래
저 물 밖 인간의 나라를 파묻어 버렸을 때
별과 별 사이 가득한 이끼가 내 눈의 흰 창을 지우고
등줄기 가득 가시가 돋아났다 심장이 둘로 갈라져,
아가미 양쪽에서, 퍼덕,
거,리,기,시,작,했,다
산과 산 사이
沼와 여울, 여울과 沼가 끊일 듯 끊일 듯 흘러간다
坐向 한번 틀지 않고 수십 대를 버티는 일가붙이들
지붕과 지붕이 툭툭 불거진 저 산 줄기줄기
큰아버지가 살고 할애비가 살고
해 지는 병창 바위 처마에 걸터앉으면
언제나 아버지의 없는 손가락, 나는

*병창: 절벽이란 뜻의 강원도 사투리.
**고라댕이: 골짜기란 뜻의 강원도 사투리.

■ 기획 장회정 기자 ■ 글 강은진(객원기자) ■ 사진 민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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