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30대 일본 주부의 하루는…
![[일본 통신원 김민정이 만난 열두 명의 아이코]76년생 주부 히로이시 아이코가 들려준 내 인생의 우선순위](http://img.khan.co.kr/lady/201302/20130214145802_1_20130214_ico_1.jpg)
[일본 통신원 김민정이 만난 열두 명의 아이코]76년생 주부 히로이시 아이코가 들려준 내 인생의 우선순위
정말 바쁜 하루를 보내시는군요.
주부들이 다 그렇죠 뭐.
피곤하거나 이런 일과가 싫증나지는 않나요?
작은 불만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만족하고 있어요. 다정다감한 남편이 있고, 아이들도 건강하고 예의 바르게 잘 자라고 있거든요. 교외의 전원주택에 살아서 공기도 깨끗해 저는 참 좋은데, 남편 회사가 집에서 1시간 넘는 거리에 있어서 좀 맘에 걸리기는 해요.
남편은 가사를 많이 도와주는 편인가요?
평일엔 일이 많아서 얼굴만 잠깐 봐요. 일주일에 이틀 쉬는데, 그 쉬는 날엔 아이들과 놀아줘요. 휴일엔 아이 데리고 놀러 가서 2, 3시간은 같이 뛰논답니다. 그리고 화장실과 욕실 청소는 남편이 담당해요. 저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고요.
두 아이의 엄마로서 고민이 있다면?
가사에 치이다 보니, 아이와 여유 있게 놀아주지 못할 때가 많아서 미안해요. 또 큰애가 유치원에서 좀 걱정스럽다 싶을 정도로 제멋대로예요. 경우에 따라 특별한 환경을 마련해줘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이에요. 사회성을 좀 더 키워줘야 할 거 같아요.
교육 방침은요?
첫째는 상대방의 마음과 몸에 상처를 주지 말 것, 둘째는 매너를 지킬 것. 남편이랑 상의해서 정했어요.
바쁜 일상의 스트레스는 어떻게 해소하나요?
주말에 남편이 집에 있을 때 아이를 맡기고 전 외출해요. 동네 엄마들이랑 맛있는 음식을 사 먹으면서 수다를 떨어요. 평소 보고 싶던 프로그램을 녹화해두었다가 보기도 하는데, 솔직히 제대로 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너무 졸려서요.
아이코와 남편은 대학 동창이다. 대학 시절엔 얼굴도 모르던 사이였다. 졸업 후 동창 모임에 나갔다가 적극적으로 대시한 남편과 1년 6개월간 교제한 후 결혼했다. 결혼하기 전 그녀는 ‘페코짱’ 캐릭터로 유명한 일본 제과업체 후지야에 근무한 전문직 여성이었다. 베이킹을 좋아했던 그녀는 막연히 식품업계 취업을 생각 중이었고 후지야 여사원의 평균연령이 높은 걸로 봐서, 여성이 일하기에 좋은 회사라 직감했기 때문이다.
10년간의 회사생활 후, 두 아이를 키우는 전업주부로
아이코가 졸업한 2000년은 취업 빙하기였다. 여성 대졸자의 취업률은 간신히 60%대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게이오대학을 졸업한 이른바 일류 재원이었지만, 취업전선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비교적 신입사원을 많이 뽑는 곳이 유리했다. 식품 업계 중에도 편의점 계통이 유망했는데, 아이코는 제조업으로 눈을 돌렸고 후지야에 무사히 취직할 수 있었다.
실제로 입사한 후엔 어떤 일을 했나요?
영업 담당자로 편의점 영업을 맡았어요. 편의점에 저희 상품을 소개하고 판촉 기획을 짜내는 일이었죠. 제가 직접 물건을 판매하러 다니는 게 보람 있었지요.

1 욕실과 화장실 청소를 전담하고 있는, 생활력 강하고 다정다감한 남편과 튼튼하게 자라는 두 아이. 2 걸어서 10분도 안 되는 친정. 친정엄마에게 아이를 맡기고 회사를 다니느라 근처로 이사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어린이집에 자리가 없어 회사를 퇴직했지만 지금도 친정 근처에 산다. 3 둘째 카이를 낳을 땐 무려 3개월을 입원했었다. 출산하는 데는 다행히 2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8시간이 기본 노동시간이지만, 일이 있으면 마칠 때까지 했어요. 피곤하기도 했지만 재미있었거든요. 제가 워낙 먹는 걸 좋아하는데, 그 좋아하는 걸 광고하고, 판매한다는 게 꿈만 같았죠. 처음엔 (업계 사람들이) 저 같은 신입사원을 상대해주지 않아서 힘겹기도 했는데 사람을 만나고 물건을 소개하고, 또 그 물건을 제가 모르는 소비자가 사서 즐긴다는 사실이 뿌듯했어요.
어릴 적 꿈은 무엇이었어요?

어린 시절의 아이코 | ‘책벌레’라 불리던 시절로 이때부터 동화작가를 꿈꿨다.
그런데 왜 식품회사에 입사하게 됐죠?
글쎄요. 식문화에 대한 흥미랄까. 제가 고등학교 시절 섭식장애를 앓았어요. 진학률이 매우 높은 명문 고등학교였는데, 성적별로 갈 수 있는 대학을 나누고 그에 따라 반 편성이 이뤄졌어요. 그때 큰 부담을 느꼈나봐요. 점점 음식을 못 먹게 되면서 몸무게가 20kg대로 빠져버린 거예요. 정말 무서웠죠.
20kg대면 초등학교 저학년 몸무게군요. 소위 거식증인데,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제 키가 150cm가 약간 넘어서 원래 몸무게가 그리 많이 나가진 않아요. 섭식장애를 극복하게 해준 건 어머니였어요. 치료하는 동안 용기와 희망을 주고 다양한 음식을 만들어주셨어요. 그리고 잠시 일본을 떠나는 게 좋을 것 같다며 덴마크 유학을 추천해주셨죠. 덕분에 고등학교를 1년간 휴학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어요. 덴마크에 가니 진학에 대한 스트레스가 없어졌어요. 스트레스가 사라지니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됐고요.

식품회사에 근무하던 시절 |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다니는 것도 업무 중 하나였다.
아이코가 태어난, ‘쨍하고 해 뜰 날’의 1976년
우리나라에선 가수 송대관의 ‘쨍하고 해 뜰 날’이 대히트를 기록했던 1976년에 아이코가 태어났다. 세계적으론 애플 1호 컴퓨터가 탄생했고, 펜탁스가 MX필름 카메라를, 시티즌이 세계 최초의 디지털 알람 손목시계를 내놓는 등 기술력 승부의 미래를 향한 첫발을 내놓은 해다. 일본에선 카세트용 기기가 발매되기 시작했고, 이 붐은 3년 후 소니 워크맨으로 이어진다. 미국과의 오랜 전쟁을 끝낸 베트남에서는 첫 선거와 새 정권이 탄생했고, 한국에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민주화를 위해 민주구국선언을 했다. 세계는 여전히 냉전 체제였고, 일본에선 일본공산당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도입하겠다는 이례적인 발표를 했고, 잡화점 도큐핸즈, 신종 컵라면이 잇달아 선보이면서 소비 시장이 열리며 이 소비가 점차 개인을 위한 것으로 바뀌던 한 해였다. 베트남은 새로운 국가 건설의 희망으로 휩싸였고 우리나라에는 조금씩 민주화의 횃불이 번지기 시작했으며, 미국과 일본은 기술력을 도구로 경제성장을 누리려 했던, 그야말로 전 세계가 ‘해 뜰 날’을 기대하던 시대였다.
일본의 해 뜰 날은 1980년의 막이 오르면서 워크맨의 세계적인 붐으로 찾아왔으며, 1980년대 중반의 거품경제로 최고조에 달했다. 1985년 일본 경제 평균주가는 3만 엔대를 기록했다. 대학만 나오면 취업이 가능하던 시절이었다. 아이코는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을 거품경제에 빠진 일본을 보면서 희망을 갖고 살아왔다. 그러나 이후 그녀가 직면한 현실은 거품경제와는 다른 세상이었다. 1990년대 초반 거품경제가 무너진 후, 일본은 20년에 가까운 불황에 허덕이고 있다. 일류 대학을 나와도 취업하기가 어렵다. 2000년 당시 여성 대졸자 취업률 60%라는 난관을 돌파해 취업에 성공한 그녀는 첫 직장에 청춘을 바쳤다. 일이 즐거웠고, 되도록이면 오랫동안 일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임신과 아이를 맡아줄 사람이 없는 상황이 그녀로 하여금 전업주부의 삶을 선택하게 했다.

2007년 결혼식 때 | 대학 동창회에서 우연히 만난 남편과 1년 6개월간 교제 후 결혼에 골인했다.
다시 일할 생각은 있나요?
언젠가 다시 복귀하고 싶어요. 하지만 근무시간이 너무 긴 일은 피하고 싶어요. 지금은 다행히 남편 수입으로 경제적으론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그래서 제가 전업주부로 살아도 괜찮아요. 아이가 어릴 때는 아이부터 생각하고 싶어요. 당분간은 일을 시작하기보다 가족과의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고 생활할 생각이에요.
아이코씨의 꿈은 무엇인가요?
일을 다시 시작하게 된다면 수입이 좋은 일보다 사회 공헌을 할 수 있는 일을 해보고 싶어요. 물론 수입도 중요하지만 많은 수입보다는 정말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에 매진하고 싶어요. 그리고 먼 훗날, 여유가 생기면 가보지 않은 나라를 다니며 스케치를 하고 싶어요.
아이코란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을 만나본 적은 있나요?
딱 한 사람 있어요. 남편 친구의 부인인데 그분은 지금 미국에 살고 있고 연구원으로 활동 중이에요. 매우 멋진 사람이죠.
아이코란 이름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또 애정이 풍부한 사람으로 자라란 의미로 아버지가 지어주셨어요. 요즘은 여자 이름에 ‘코(子)’를 붙이는 경우가 적어져서, ‘아이’란 이름은 많아도 ‘아이코’란 이름이 흔하지 않거든요. 저는 나이가 들면서 제 이름이 더 좋아졌어요.
아이들이 건강하고 반듯하게 키우는 게 그녀의 첫 번째 목표이자 다짐이다. 지금은 육아와 가사에 별다른 불만이 없다. 일상생활을 반듯하게 해내고 싶은 욕심과 일상의 평화가 쌓여 인생의 평화로 이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기회가 되면 다시 일을 하고 싶다. 그러나 밤샘을 하거나 비상식적인 상황과 맞닥뜨려야 하는 일은 피할 수 있다면 피해보고 싶다. 직장인 시절에 갈고 닦은 매너와 손님의 말을 경청하는 자세는 엄마로서의 삶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기회가 되면 또다시 세상 밖으로 나가 사회 공헌에 힘쓰고 싶다는 아이코의 꿈이 꼭 이뤄지길 바란다.
■기획 / 이유진 기자 ■글&사진 / 김민정(일본 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