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 구단을 물리친 두 살배기 아기 군단
통합 우승이라는 대업을 이룬 지 꼭 1주일 만이었다. 다시 코트 위에 선 IBK 기업은행(이하 기업은행) 배구단 알토스 선수 15인의 얼굴에는 우승의 기쁨 대신 진지함이 가득했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몸을 풀고 우렁찬 구호를 내뱉으며 수비부터 공격까지 실전을 방불케 하는 연습이 이어졌다. 엄청난 속력의 강스파이크를 날리고 온몸을 내던지면서도 그녀들의 시선은 오직 배구공에 있었다. 그녀들의 운명을 결정지었던 지난 3월 29일 챔피언 결정전 4차전 때 그 눈빛과 꼭 같은 것이었다.
4차전 최종 스코어 3:1. 행운의 여신은 기업은행 편이었다. 선수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얼싸안고 코트 위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꼭 하고 싶었던 승리 세리머니를 하며 그동안 힘들었던 시간, 서러웠던 마음을 날려보냈다. 꽃가루와 카메라 플래시 세례가 쏟아졌다.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다.
기업은행 팀이 이번 시즌에 세운 기록을 보면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진다. 창단 2년 만에 정규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한 구단은 국내 4대 프로스포츠(야구, 축구, 농구, 배구)를 통틀어 처음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 2005년 프로배구 출범 이후 정규 리그 우승, 챔피언 결정전 우승으로 통합 우승을 이룬 세 번째 팀에 이름을 올리는 영광을 얻었다. 정규 리그 성적 또한 화려하다. 정규 리그 총 30경기 중 단 5회만 패했고, 공격 종합 1위(성공률 44.33%), 오픈 공격 1위(43.19%), 속공 1위(50.78%), 이동 공격 2위(52.82%), 득점 2위(2,186점)를 기록해 공격 지표 상위권을 휩쓸었다. 마지막까지 기업은행과 선두를 다투던 GS칼텍스 이선구 감독의 말처럼 ‘정규 리그 우승 팀다운 경기력’이다. 하지만 시즌 초반만 해도 기업은행을 우승 팀으로 예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난 시즌 정규 리그 4위,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는 창단 첫 시즌 성적치곤 나쁘지 않지만 우승 후보로 점쳐지기엔 부족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화려한 스타 선수도 없고, 오랜 역사가 있는 명문 구단도 아니었다. 기업은행 이정철 감독조차도 시즌 초반엔 우승이 목표가 아니었다고 솔직하게 말문을 열었다.
“이번 시즌을 시작하기 전에는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게 목표였어요. 비시즌 동안 열심히 준비했지만 우승을 생각하기엔 물리적인 시간이 아주 짧았거든요. 누구나 우승을 꿈꾸지만 현실 가능한 목표부터 이뤄야 한다고 생각했죠. 근데 경기를 하면 할수록 솔직히 우리가 정말 잘하더라고요(웃음). 목표 초과 달성이라고요? 기적이 일어난 거죠.”
여자 배구판 공포의 외인구단 탄생
2011년 8월 4일, ‘옹골차게 알차다’라는 뜻의 ‘알토란’과 ‘높고 깊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알투스(Altus)’를 합쳐 옹골차게 알찬 경기를 펼쳐 승리하자는 알토스(ALTOS) 기업은행 여자 배구단이 창단됐다. 1988년 KT&G 이후 무려 23년 만에 창단되는 여자 배구 팀이었다. 이로써 한국 여자 프로배구 ‘6개 구단 시대’의 막이 올랐다. 지난 시즌 신인 드래프트에서 배정받은 10명의 신인 선수와 5명의 경험 많은 노련한 선수 그리고 우크라이나 출신의 외국인 공격수가 창단 주축 멤버로 확정됐다. 당시 창단식에서 이 감독은 “쉽진 않지만 우리도 열심히 준비한 만큼 차근차근 나아가면 우승의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라고 포부를 밝혔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감독이 말했던 ‘우승의 순간’이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 아무도 몰랐다. 속내를 들여다보면 데뷔 무대와 마찬가지인 고교생 신인 선수들, 이미 전성기가 지난 노장 선수들, 주전에서 밀려난 선수들까지 끌어 모아 꾸린 팀이었기 때문이다. 몇 년씩 팀워크를 맞춰온 명문 구단들에 기업은행의 존재는 당연히 위협적이지 못했다. 시즌 초반 전문가들은 기업은행의 성적을 최하위로 점쳤다. 밖에서 보는 시선이 이러니 팀의 수장인 이 감독의 심정이야 오죽했을까.
그렇게 준비한 것을 보여준 시기는 예상보다 빨랐다. 두 번째 경기에서 흥국생명을 상대로 3:0 완승을 거두며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만방에 알렸다. 신인들의 거침없는 공격과 노장들의 몸을 사리지 않는 플레이까지 완벽하게 호흡이 이뤄져 상위권 강호들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젊은 팀’의 강점은 동시에 단점이기도 했다. 대부분 선수들이 경험이 적다 보니 주요 고비에서 무너졌다. 특히 승점 1점이 중요했던 시즌 막바지에는 4연패를 당하며 결국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정규 리그 4위. 언론에선 ‘예상 밖의 선전’, ‘신생 팀이 배구 판도를 흔들었다’라는 호평의 기사가 쏟아졌다. 신생 팀의 첫 시즌 결과치곤 좋은 성적이었지만 플레이오프 진출을 코앞에서 놓친 게 내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이 감독은 팀의 전력 보강을 위해 승부수를 띄웠다.
승리 키워드, 신구 조화와 삼각편대
2011-2012 시즌을 마치고 이 감독은 트레이드를 성사시켰다. 일부 신인급 유망주를 내주는 대신 경험이 많은 국가대표 출신 남지연, 윤혜숙을 데려왔다. 20대 후반이면 이미 노장이라고 말하는 프로 세계에서 1983년생, 당시 29세 선수를 두 명이나 데려온다는 결정은 구단 운영진도 만류할 정도였다. 하지만 팀의 중심을 잡아줄 경험 풍부한 선수가 절실했기에 구단 운영진을 설득하며 두 선수를 데려왔다. 예상이 꼭 맞아떨어지듯 남지연, 윤혜숙 선수의 합류로 팀은 눈에 띄게 안정감을 찾았다. 정규 리그에서 리베로 남지연 선수는 디그(상대 팀의 스파이크가 백어택을 받아내는 리시브) 1위(세트당 4.78), 수비 1위(세트당 7.35)에 올라 수비상을 받았고, 리시브나 수비를 맡은 레프트 윤혜숙 선수는 리시브 2위(세트당 2.98), 수비 3위(세트당 6.33)에 올라 베테랑 수비수의 면모를 드러냈다.
시즌 개막 전 각 구단 주장 합동 인터뷰에서 주장 이효희 선수가 리베로 남지연 선수에 대한 기대감을 보인 것도 이런 상황을 예측했기 때문이다. 지난 시즌 기업은행은 이미 알레시아, 김희진, 박정아로 이어지는 삼각편대 공격력을 완성했다. 2011-2012 신인 드래프트에서 나란히 지명돼 창단 멤버로 입단한 후 어느새 한국 여자 배구의 미래를 책임질 ‘젊은 거포 듀오’로 자리매김한 김희진과 박정아 선수 그리고 올 시즌 MVP로 선정될 만큼 위협적인 공격력을 갖고 있는 알레시아. 이 세 선수의 조합은 외국인 선수 플레이에 의존해오던 여자 프로배구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국내 최고의 공격진용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기업은행=공격의 팀’이라는 공식도 만들었다.
하지만 이런 진용도 중요한 경기에선 흔들리기 일쑤였다. 이제 갓 스무 살이 넘은 어린 선수들의 경험 부족 때문이었다. ‘맏언니 라인’ 이효희, 남지연, 윤혜숙 선수는 수비의 안정감뿐 아니라 선수들에게도 심리적 안정감을 주었다. 올 시즌 단 한 번의 연패 없이 승리의 독주를 이어갈 수 있었던 것도 맏언니 라인의 힘이었다. 특히 챔피언 결정전이라는 큰 무대를 앞두고 많은 사람들이 다시 고질적인 경험 부족이 발목을 잡을까 봐 걱정을 했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기우에 불과했다. 2:0으로 경기를 잘 이끌다가 갑자기 2:3으로 뒤집혀 역전패를 당한 3차전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4차전이 열렸다. 하지만 경기 내내 훨훨 날아다니는 그녀들은 역전의 후유증은커녕 더욱 강해진 면모를 한껏 과시했다.
“나도 모르게 상대 팀에게 말려들 때가 있어요. 결국 공격 패턴을 읽히게 돼 경기 흐름을 잃게 되거나 공격이 다 막히게 되죠. 그러면 숙소에 와서 내내 자책을 하며 힘들어하는데요. 제일 먼저 언니들이 다가와서 기술적인 조언을 해주며 저를 이끌어줘요. 언니들 없으면 절대 안 돼요.”
(박정아 선수)
아파트 숙소 거실에서 다지는 팀워크
모기업 IBK 기업은행의 전폭적인 지지는 다른 구단에서도 부러워할 정도다. 항상 선수단에 관심을 두지만 훈련 방식, 선수 운영 등 경기에 대해서는 일절 간섭하지 않는다. 또 은퇴도 하지 않은 주장 이효희 선수를 벌써 정규직으로 채용해 은퇴 후 기업은행에서 일할 수 있도록 했다. 현역에서 뛰는 동안 불안정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시켜 강력한 동기부여를 해주고, 은퇴 후에는 새로운 인생을 설계할 수 있도록 하는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이렇게 지원을 아끼지 않음에도 아직까지 선수단 전용 숙소가 없다. 주변 환경, 이동 시간 등을 고려해 수원 수일여자중학교 체육관을 중심으로 체력 연습장, 아파트 숙소를 구했기 때문이다. 아파트 다섯 채에 선수와 감독, 스태프들이 나눠서 합숙하고 있는 독특한 방식이다. 처음에는 키 큰 운동선수들이 우르르 몰려온다는 이유만으로 민원을 넣었던 아파트 주민들이 이제는 든든한 지원군이 됐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반갑게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나누고, 직접 경기장에 와 열정적인 응원도 해준다. 머리가 짧은 김희진 선수를 남자로 착각해 “숙소에 남자가 들어온 것 같다”라며 이 감독에게 제보(?)하는 열혈 주민 팬도 있었다고. 아파트 주민들과 매일 마주쳐야 하고 식사를 할 때면 다른 동으로 이동해야 하는 불편함에도 선수들은 “아파트 숙소가 최고”라며 입을 모은다.
“솔직히 다른 팀은 숙소에 들어가면 자기 방에서 안 나와요. 그리고 두루 친하다고 말은 하지만 사실은 몇몇 끼리만 친해요. 하지만 우리 팀은 거실에 모여 앉아 그날 경기부터 속 깊은 이야기까지 다 나눠요. 덕분에 막내부터 맏언니까지 나이를 떠나 모두 허물없이 친하고요. 거실이 우리 팀워크의 비결이라고나 할까요.” (남지연 선수)
이번 우승의 원동력을 말해달라는 질문에 감독부터 선수까지 모두 팀워크를 꼽았다. 기업은행 팀은 맏언니 라인과 막내 사이에 열 살 이상의 나이 차가 존재한다. 운동선수 특유의 권위적인 분위기가 있었다면 큰 장애물이었을 터. 맏언니 이효희 선수가 제일 먼저 거실로 나와 다른 선수들에게 말을 건네며 장난도 많이 쳤다. 먹고 싶은 음식이 있다면 직접 만들어주고 함께 나눠 먹으며 친숙한 언니로 다가가기 위해 노력했다. 처음엔 거실에 주장이 있다고 도망가기 바빴던 선수들이 어느새 곁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팀워크는 코트 안에서 가장 빛난다. 경기를 이끌어가고 위기를 헤쳐가야 하는 건 감독이나 코칭스태프가 아닌 선수들 몫이기 때문이다. 맏언니들을 중심으로 열리는 선수단 미팅에 코칭스태프는 일제히 자리를 비운다. 선수들이 자율적으로 경기를 준비하며 경기 이해력을 높이고 상대 전력에 대해 분석을 하며 이미지 트레이닝을 진행한다. 이 과정을 통해 어린 선수들은 언니들을 의지하고, 언니들은 어린 선수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그렇게 거실 문화는 기업은행만의 끈끈한 팀워크를 완성시켰다.
기업은행 팀은 다음 2013-2014년 시즌부터 특별한 유니폼을 입게 된다. 이번 시즌 우승으로 그녀들의 유니폼에는 1회 우승을 상징하는 별 한 개가 추가됐다. 지난 시즌 복병에서 다크호스를 넘어 엄연한 우승 팀임을 알리는 빛나는 별은 그녀들의 자부심이자 새로운 원동력이 될 듯하다. 이젠 강팀 중 하나로 꼽히게 된 기업은행 팀의 다음 시즌에 모든 눈과 귀가 집중될 터. 자칫 부담스러울 법도 한데 ‘막내 군단’의 패기는 변함없었다.
“우승한 당일 날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기뻤는데요. 다음날이 되니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허무한 기분도 들더라고요. 우승한 날만 기쁘고 그 다음부터는 똑같은 일상이에요. 훈련하고 또 훈련하는 선수로서의 일상이요. 그래서 유니폼에 별을 가득 채웠으면 좋겠다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어요. 지금은 V1이지만, 앞으로 V10을 넘어 V20쯤?(웃음)” (김희진 선수)
한껏 고조된 팀 사기와 달리 이 감독은 “다음 시즌이 턱 밑까지 다가왔다. 먼 미래보단 가까운 미래에 집중하겠다”라며 말을 아꼈다. 시즌을 마친 지 고작 열흘이 채 되지 않은 시기지만, 벌써 다음 시즌을 구상하는 이 감독의 얼굴은 복잡해 보였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그가 우승을 당연한 결과가 아닌 ‘기적 같은 일’이라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감독 특유의 겸손하고 신중한 성격 탓이기도 했지만 사령탑이란 자리가 주는 무게감이기도 했다.
“창단 팀은 신혼부부와 비슷해요. 단칸방에서 시작해 하나 둘 가구를 채워가며 살림을 꾸려가는 것처럼 조금씩 부족한 부분을 메워가는 거죠. 우리 팀은 이제 겨우 살림살이 구색을 갖췄다고나 할까요? 마음 놓고 좋아하기엔 아직 채워나가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기업은행 팀의 행보는 「공포의 외인구단」이나 「슬램덩크」처럼 잘 짜인 한 편의 스포츠 만화를 보는 듯하다. 그들이 흘리는 굵은 땀방울에 응원을 보내고, 위기의 순간엔 함께 맘 졸이며 진한 감동을 받는 스포츠 휴먼 스토리 말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만화는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끝을 맺지만 기업은행 팀은 우승의 영광을 뒤로하고 다시 출발선에 설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작년과 크게 다른 점은 없다. 선수, 감독, 스태프도 그대로고 훈련의 강도도 그대로다. 다만 가슴에 새겨진 빛나는 별 하나가 그녀들의 무한한 열정과 가능성을 말해줄 뿐이다. 다시 한번 기적의 스토리를 일구기 위해 그녀들은, 기업은행 팀은 오늘도 코트 위에서 굵은 땀방울을 흘리고 있다.
■기획 / 장회정 기자 ■글 / 이선희(프리랜서) ■사진 / 김영길 ■사진 제공 / IBK 기업은행 알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