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전에 바친 트로피 ‘전주원 그리고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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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은 어머니에게 얼마나 많은 트로피를 안겼을까. 그중에서도 어머니가 가장 고대하던 바로 그 트로피. 어머니는 결국 영전에서 그 트로피를 받았다. 우승제조기 농구 스타였던 딸이 만년 꼴찌 팀의 코치로서 따낸 우승 트로피였다.

영전에 바친 트로피 ‘전주원 그리고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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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인터뷰는 원래 전주원의 어머니와 할 계획이었다. 전주원(41)이 누구던가. 1990년대 한국 여자 농구의 간판스타이자 꼴찌 팀을 1등으로 만든 명코치가 아니던가. 그래서 그녀의 어머니가 궁금했다. 딸을 훌륭하게 키운 비결을 묻고자 했다. 그런데 인터뷰 섭외 중 비보를 듣게 됐다. 전 코치의 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대신, 전 코치를 만났다. 전 코치의 입을 통해 어머니를 만나고 싶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지난 3월 19일부터 시작됐다.

그날은 여자 농구 프로팀 춘천 우리은행 한새를 이끌고 있는 전 코치에게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4년째 꼴찌를 하던 우리은행이 통합 우승(정규 리그 우승+챔피언 결정전 우승)을 차지한 날이자 어머니의 입관식이 있는 날이기도 했다. 그녀는 우승 소식을 안고 한달음에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그 소식은 그녀의 농구 인생 23년을 지켜본 어머니가 가장 바랐던 선물이었고, 그녀의 코칭 능력을 인정하는 눈부신 결과였다.

1990년대는 농구 드라마 ‘마지막 승부’와 일본 만화 ‘슬램덩크’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그야말로 농구의 시대였다. 중·고등학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농구화를 신고 다녔고 농구선수들은 아이돌 가수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당시 연세대 농구팀 팬들과 서태지 팬들이 자존심 대결을 펼친 일화는 유명하다. 연세대 농구팀의 숙소와 서태지의 자택은 각각 연세대 동·서문에 위치해 있었는데, 팬들이 서로의 세를 과시하며 신경전을 벌인 것이다.

남자 농구가 대세를 이끌었지만 여자 농구도 마니아층을 형성하며 인기몰이를 했다. 그 중심에는 단연 한국 여자 농구의 간판스타 전주원이 있었다. 1991년 농구대잔치 신인왕으로 시작해 한국 여자 프로농구 최초의 영구결번, 올림픽 사상 최초의 트리플더블(한 선수가 득점, 어시스트 등 5개 부문 중 3개 부문에서 두 자릿 수 이상의 숫자를 기록하는 것) 등 그녀가 농구계에 남긴 족적은 수도 없다.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금메달, 2000년 시드니올림픽 4강 신화에도 그녀가 있었다. ‘코트의 여우’는 두뇌 플레이에 능한 그녀에게 팬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당연한 말 같지만 전 코치를 키운 건 어머니였다. 낳고 기른 것은 물론 딸이 아무런 걱정 없이 농구에 집중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챙겼다. 처음에는 예쁘고 똑똑한 딸이 ‘험한’ 농구를 한다기에 말렸지만 결국 딸의 농구를 가장 사랑하고 지지를 보냈다. 농구계에서 전 코치의 어머니 고 천숙자 여사는 유명하다. 천 여사는 딸의 경기가 있는 날엔 항상 관중석에 앉아 있었고, 경기가 끝나면 딸뿐 아니라 팀원까지 함께 먹을 수 있도록 넉넉히 준비한 음식 보따리를 풀었다. 동료들이 당시 선수였던 전 코치에게 “어머니는 또 언제 오시느냐”라고 보챌 만큼 그 맛은 훌륭했다.

어머니가 자주 해주셨던 식혜. 그 식혜는 아직도 전 코치 집 냉장고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큰 경기를 앞두고 스트레스로 음식을 먹지 못하던 딸을 위해 어머니가 손수 만들어 보내준 것이다. 어머니는 딸이 선수생활을 접고 코치로 활동할 때도 음식 챙기는 걸 잊지 않았다.

전주원, 코치로 변신하다
2년 전, 전주원은 여자 농구 최강 팀인 신한은행 에스버드를 시작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최고의 선수 출신 코치가 최강 팀을 만났으니 호랑이 등에 날개를 단 격이었으리라.

“평생 해온 게 농구잖아요. 은퇴 후에도 농구와 관련된 일을 계속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그런 상태에서 지도자 제안이 왔고요. 그 제안을 거절하기엔 제가 일 욕심이 조금 많아요(웃음). 선수와 코치가 하는 일이 다르긴 하지만 지도자로서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아 덥석 맡았죠.”

덥석, 시작은 했지만 부담감이 없지는 않았다. 그녀가 한 발 한 발 내딛는 발걸음이 후배들에게 이정표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신한은행 코치직을 수락할 당시 여자 지도자가 없었다. 여자 농구팀인데도 감독과 코치는 모두 남자였다.

“제가 하는 행동에 따라서 후배들이 지도자가 되는 길이 좀 더 쉬워지느냐 어려워지느냐가 결정되는 거잖아요. 부담감을 안 가질 수 없었죠.”

그해 신한은행 에스버드는 승승장구했고 그해 통합 우승을 차지했다. 물론 코치로서 받은 성적표는 A플러스다. 그런데 이후 그녀는 의외의 선택을 했다. 4년 연속 리그 최하위를 차지한 우리은행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모두 놀랐다. 탄탄대로를 버리고 굳이 비포장길을 선택한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

영전에 바친 트로피 ‘전주원 그리고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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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말렸죠. 신한은행은 워낙 선수들이 탄탄해요. 실력도 자신감도 넘치죠. 코치로서는 일하기가 굉장히 편한 팀인 거죠. 하지만 코치의 길로 들어선 만큼 좀 더 제가 필요한 곳 그리고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곳에서 일하고 싶었어요.”

역량을 펼칠 수 있는 일을 찾아 그녀는 우리은행 농구팀에 코치로 입단했다. 전 코치의 입단을 원하는 구단에서는 높은 연봉을 제시했지만 그녀는 스스로 연봉을 낮추고 들어왔다. 이 역시 의외였다.

“연봉과 관련된 이야기는 쑥스러운데요. 그렇게 많이 낮추지도 않았어요(웃음). 단지 1년 차 코치 전주원이 이뤄낸 성과에 비해서 다소 연봉이 과하지 않았나 생각했을 뿐이에요. 이제는 지도자니까 농구선수 전주원이 아닌 코치 전주원으로만 평가받고 싶기도 하고요.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적정선을 불렀던 것뿐이에요.”

어떤 절차 하나 어물쩍 넘어가는 법이 없다. 자신감 있고 확실하다. 일을 할 때 그녀의 이런 성격은 더욱 빛을 발한다. 매번 일등만 하던 그녀는 우리은행에서 패배감을 느꼈다.

“팀워크를 회복하고 선수 개개인이 자신감을 되찾는 게 최우선 과제였어요. 그렇다면 자신감은 어떻게 되찾느냐. 정답은 훈련이에요. 지도자들은 선수들의 훈련을 늘려요. 그리고 ‘이만큼 했으니까 작년보다 훨씬 잘할 수 있다’라고 되새겨주는 거죠.”

그녀가 코치로 부임한 후 우리은행 농구팀의 훈련이 달라졌다. 시간은 비슷했지만 강도가 급격하게 높아졌다. 멀리서 전 코치의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선수들이 긴장할 정도였다고 한다. 팀 훈련이 끝나고 저녁 무렵부터 진행되는 개별 지도 역시 강도가 세졌다. 그러나 결코 후배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은 없었다.

“성별에 따른 차이가 있잖아요. 여자 선수들은 감성이 섬세해요. 같은 말을 하더라도 ‘돌직구’보단 상황에 맞게 돌려서 말하면 더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이 되죠. 이런 식이에요. 예를 들어 슛 성공률이 떨어지는 선수가 있다고 가정해볼게요. 이미 선수 자신도 이런 부분 때문에 많이 고민하잖아요. 그런데 이런 선수에게 ‘슛 성공률이 왜 이렇게 떨어져. 연습 좀 더 해’라고 강하게 말하면 자존심에 상처를 받거나 반감이 생길 수 있죠. 이보단 ‘슛 성공률이 높았던 거 같은데, 요즘 조금 떨어졌네. 하루에 슛 연습 몇 개 하니? 아, 그래? 그럼 좀 더 해볼까. 슛 연습을 좀 더 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다른 방법을 함께 찾아보자.’ 이렇게 말하는 거죠.”

아무리 좋은 감독이나 코치라도 경기장에 나설 수 없다. 결국 코트에서 직접 뛰는 것은 선수들이다. 선수의 기분이 상하면 가진 능력을 100% 발휘하기 어렵다. 최고의 선수였던 전 코치는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도전하던 딸과 걱정하던 어머니
전 코치가 선수들과 구슬땀을 흘리고 있을 때 어머니는 직접 준비한 음식을 싸들고 어김없이 연습장을 찾았다. 어머니의 방문은 신한은행에 있을 때보다 더 잦아졌다.

“어머니는 굉장히 오래전부터 제 건강을 챙겨주셨어요. 선수 때부터요. 입이 까다롭진 않지만 체력이 중요한 직업이다 보니 건강에 대해 각별히 신경을 써주셨죠. 더욱이 제가 시즌 중에는 밥을 제대로 못 먹는 편이에요. 아무래도 긴장이 되니까요. 그럴 때 어머니가 항상 반찬을 만들어 오셨어요.”

1993년 농구대잔치 때, 딸이 좋아하는 음식을 잔뜩 싸서 부산까지 갔던 일화는 유명하다. 어느 부모인들 그러지 않겠냐마는 그녀의 어머니는 지극정성으로 딸을 보살폈다. 코치가 된 다음에는 그만둘 만도 하지만 어머니는 떡이며 식혜며 갖은 반찬을 가지고 연습장과 경기장을 찾았다.

“제가 코치가 됐어도 어머니는 여전하셨어요. 선수들이 건강해야 경기에서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잖아요. 저희 어머니는… 동네 아주머니 같은 분이세요. 다른 사람들 챙겨주기 좋아하는 그런 분이요. 평생 다른 사람만 돌보다 가셨어요.”

그녀는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어머니의 정성과 마음 씀씀이가 생각났던 것이리라. 우리은행 선수 중 전 코치 어머니의 음식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이 있을까. 그녀의 어머니는 세상을 등지기 하루 전에도 경기장을 찾아 손수 만든 식혜를 건넸다.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날인 지난 3월 17일, 여느 때처럼 손녀와 함께 딸의 경기를 지켜보던 어머니는 그날따라 체한 사람처럼 가슴을 두드리셨다고 한다. 가족은 ‘단지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이튿날 새벽, 어머니는 심장마비로 세상을 등졌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이른 아침, 고요한 농구팀 숙소에 전 코치의 울음소리가 퍼졌다. 끈끈한 모녀 관계를 잘 알기에 그 누구도 그녀에게 섣불리 말을 건네지 못했다. 더욱이 다음날은 2012-2013년 여자 프로농구 챔피언 결정전 3차전이 예정돼 있었다. 위성우 우리은행 감독은 전 코치에게 어머니 빈소를 지키라고 했지만, 그녀는 예상을 깨고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통합 우승까지 단 1승만 남겨놓은 경기였다.

영전에 바친 트로피 ‘전주원 그리고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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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팀을 옮기고 난 후 어머니가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아무래도 신한은행보다는 전력이 약해서겠죠. 그래서 기도를 많이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어머니가 다니는 절에 가면 연등에 우리 선수들 이름이 다 쓰여 있대요. 어머니가 선수들 한 명 한 명씩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를 드리셨나 봐요.”

이런 각별한 마음을 아는지 선수들도 어머니를 잘 따랐다. 마지막 결승전, 선수 모두 왼쪽 가슴에 검은색 리본을 달고 경기에 나섰다. 그리고 그날, ‘만년 꼴찌팀’은 정규 리그와 챔피언 결정전 통합 우승의 위업을 달성했다. 창단 7년 만에 이룬 쾌거였다. 축포가 터지고 꽃가루가 휘날리는 경기장에서 전 코치는 선수 한 명 한 명과 포옹을 나누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정말 고맙다. 엄마가 많이 좋아하실 거야”라는 말을 남기고 우승 행사 중 경기장을 떠나 빈소로 향했다. 입관식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원래는 입관식이 경기 전에 잡혀 있었어요. 입관식이 예정대로 진행됐다면 경기장에 가지 못했을 거예요. 그런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입관식이 조금 연기됐어요. 아버지가 그러시더라고요. 경기장에 다녀오라고. 어머니가 선수 이름 하나 하나 부르면서 새벽에 기도를 하셨으니까, 끝까지 딸이 경기장을 지키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할 거라고. 그게 맞는 거라고. 아버지의 말씀을 들었지만 고민이 됐죠. 그런데 누군가에게 입관하기 전까지는 돌아가신 게 아니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렇다면 엄마가 그토록 고대하던 우승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경기장으로 향했죠.”

딸에게 물려줄 어머니의 유산
축하 행사는 최대한 단출하게 진행됐다. 우리은행 자체 행사 역시 모조리 취소됐다. 경기 후 위 감독과 선수단도 바로 빈소를 찾아 고인의 영전에 트로피를 바쳤다.

장례 일정이 끝난 후 그녀는 휴식을 취하며 마음을 추스르고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농구를 시작해 승승장구해온 전주원. 단 한 번도 어머니의 속을 썩인 적이 없던 그녀였다. 질풍노도의 사춘기에도 운동을 하느라 방황을 겪을 시간도 없었다. 마음과 몸이 피곤할 땐 조용히 음악을 듣는 정도였다. 언제나 어머니 편이었고 어머니의 자랑거리였던 전 코치. 그녀도 어머니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을까.

“아무래도 어머니와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점이 가장 아쉬워요. 칠순이시라 여행 보내드리려고 계획 세우고 있었는데, 갑자기 가버리셨어요. 함께 여행 간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는데…. 10년 전 금강산 여행이 마지막이 돼버렸네요.”

애석하게 가버린 어머니는 아직도 딸의 생활습관에 그대로 살아 있다. 딸은 은연중에 엄마를 흉내 낸다고 하지 않던가. 그녀 역시 어머니와 닮은 점이 많다고 말한다. 또 어머니처럼 딸을 키운다고 한다.

“어렸을 때 제가 교육 받은 대로 하게 되더라고요. 저희 어머니는 방목 스타일이셨거든요. 챙겨주시긴 했지만 자율성을 강조하셨어요. 초등학교 때 아버지가 농구를 시키셨거든요. 어머니는 싫어하셨어요. 공부를 하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하셨겠죠. 부상의 위험도 있고요. 하지만 결국 인정해주셨어요. 제 의견을 존중해주셨죠. 그리고 그 안에서 즐거움을 찾으셨어요. 나중에는 항상 경기장에 오실 정도로 제가 농구하는 모습을 좋아해주셨죠. 저도 비슷해요. 딸이 알아서 크게 놔두는 편이에요.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죠. 그 일을 찾으면, 저도 엄마가 했던 것처럼 마음속으로 격려해주고 싶어요.”

권위나 순위를 중시하는 스포츠계에서 코치라고 하면 어깨에 힘을 줄 만도 하다. 게다가 그녀가 누구던가. 코트를 날아다니던 천하의 전주원 아니던가. 하지만 인터뷰 내내 그녀는 겸손했다. 권위보다는 배려가 느껴지는 코칭 철학도 가지고 있었다. 90분가량 이어진 인터뷰 말미, 기자는 전 코치의 어머니를 어렴풋하게 그릴 수 있었다.

■기획 / 장회정 기자 ■글 / 박은혜(프리랜서) ■사진 / 김영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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