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견디는 나무의 마음으로 전통의 맥을 잇다

‘천 년의 세월을 짓는 장인’ 숭례문 복구 공사 도편수, 신응수 대목장
숭례문에 화재가 났다는 소식이 전해지던 저녁 9시경, 신 대목장은 기분 좋게 일요일을 마무리하던 중이었다. 북한산 등산을 다녀온 뒤 독립문 근처 어느 가게에서 시원하게 맥주 한 잔으로 목을 축이고 있는데 긴급 뉴스가 쏟아졌다. 놀랍고도 당황스러운 마음에 겉옷도 제대로 챙겨 입지 못하고 곧장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때만 해도 연기만 피어오르던 상황이라 그래도 곧 불이 꺼질 거라 여겼지만 불길은 쉬 멈추지 않았고 그는 밤새도록 우두커니 서서 숭례문이 불에 타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숭례문의 소멸은 국민 모두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긴 사건이었지만, 신 대목장이 받은 허탈함과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에게 숭례문은 각별한 의미가 있는 공간이었다. 제대로 된 목수 일을 처음으로 배우게 해준 곳이었고, 훌륭한 스승을 만나 궁궐 목수로서의 인생을 시작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곳이었기 때문이다.
1963년 스무 살이 되던 해, 그는 숭례문 중수 공사에 막내 목수로 참여했다. 당시 6·25 한국전쟁으로 인해 심하게 훼손된 숭례문의 목조 부분을 모두 해체해 수리하는 보수 공사가 진행됐는데, 그는 부편수를 맡게 된 스승 이광규 선생을 따라 현장에 합류했다. 열일곱 살에 목수 생활을 시작해 주로 개인 집 짓는 일을 하던 그가 처음 숭례문의 속살과 마주했을 때 그 어마어마한 면면에 놀랐다. 모든 것이 그저 대단하기만 했고 그런 역사적인 현장의 일원으로 함께할 수 있다는 점이 뿌듯하고 설렜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승의 스승인 한국 최고의 도편수 조원재 선생을 만나 귀중한 배움을 얻을 수 있게 됐다. 묵묵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그를 눈여겨본 조 대목장은 그를 자신의 집에서 머무르게 하며 한옥 도면을 비롯한 건물의 이모저모는 물론 목수의 정신과 자세 등 값진 가르침을 전했다.
이후 두 스승과 함께 오대산 월정사 대웅전, 진주성 촉성문, 서울 숭인동 청룡사 대웅전 등의 공사에 참여했고 드디어 1970년 경주 불국사 복원 공사 때 도편수였던 이 대목장으로부터 ‘먹칼’을 받게 됐다. 대패질을 끝낸 나무에 자르거나 조각하는 자리를 표시하는 도구인 먹칼을 쥐게 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스승이 그를 후계자로 인정하고 부편수를 맡긴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리고 다시 5년 뒤, 그는 불과 서른다섯의 젊은 나이에 수원성 복원 공사 도편수를 맡았다. 그렇게 그는 고종 때 경복궁 복원 공사 도편수였던 홍편수에서 최원식-조원재-이광규로 이어지는 정통 궁궐 목수의 계보를 이었다.
국보 1호 숭례문, 새 역사를 열다
잔꾀 부리지 않고 열심히 일을 배우던 젊은 목수는 이제 50여 년 만에 국내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대목장이 돼 도편수로서 상량문에 이름을 올렸다. 화재가 난 지 1년 10개월 만인 2009년 12월, 문화재청이 그를 도편수로 선정했을 때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의 손으로 스승의 작업을 만질 수 있게 돼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작업하는 내내 스승의 모습과 가르침을 떠올리며 온 마음을 바쳐 최선을 다했다. 생계를 위해 시작한 목수 일이 평생의 목표가 되게끔 만들어준 숭례문에 대한 애착과 책임감도 더해졌다.
국보 1호 숭례문의 복구 공사는 가장 전통적인 방법에 따라 정확한 고증을 거쳐 복원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진행됐다. 사용 가능한 원래의 부재를 최대한 활용해 전통 기법으로 목재, 석재, 단청, 기와, 철물 등을 다스렸고 대신 일제강점기에 훼손된 성곽 일부와 지반 복원을 위해 좌우 날개 모양의 성루를 새로 축조했다. 작업 과정 또한 철저하게 전통 기법과 방식을 살려 이루어졌다. 목수들은 전기톱이나 대패 등을 사용하지 않고 직접 전통 도구로 나무를 다듬었으며, 석공들도 옛날 석수들이 쓰던 정과 망치로 돌을 쪼았다. 기와는 공장에서 찍어내는 대신 사람이 직접 빚고 말려 가마에 넣고 만드는 등 현재는 명맥이 끊기다시피 한 조선기와를 재현해냈다.
연인원 3만5천여 명이 동원된 작업에는 이 시대 내로라하는 최고의 장인들이 참여했다. 석공, 단청, 기와 등 장인들이 참여하는 분야는 여럿이지만 그중 대목 분야를 총지휘하는 도편수의 역할은 매우 크다. 단순히 나무만이 아니라 전체 과정을 조화롭게 이루는 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목재 공사를 기초로 그에 맞게 기와를 올리고 단청을 만들게 되므로 어떤 건물이든 목재 공사가 가장 중요한 법. 따라서 과거에는 건물을 지을 때 도편수가 모든 작업 과정을 총지휘했고, 분야별 전문화가 이루어진 요즘에도 도편수는 가장 중요한 소임을 맡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당대 최고의 전통 궁궐 목수인 신 대목장의 어깨가 새삼 무거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신 대목장은 50년 넘는 목수로서의 연륜과 풍부한 전통 건축물 복원 경험을 살려 숭례문의 제 모습을 고스란히 재현해냈다.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우리 전통 목조 건축은 ‘정성’으로 만들어지고 완성된다고 믿는 그는 대들보부터 지붕, 추녀 등을 잇는 모든 부속물들을 못 하나 없이 일일이 깎고 끼워 맞추며 정성을 쏟았다. 삼복더위에도, 혹한의 겨울에도 작업할 때는 전통 복식을 고집했던 것도 그의 제안이었다. 기본을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평소의 철학을 바탕으로 현재의 기준이 아닌 당시의 방법에 따른 고증과 실측 그리고 복구가 이루어졌다.

1 숭례문 복구 공사 당시 전통 기법으로 목재를 다루고 있는 모습. 참여하는 이들 모두 전통 복식을 입고 있다. 2 스승인 이광규 대목장과 경주 불국사 복원 공사에 몰두하던 신응수 대목장. 3 경복궁 복원에 쓰일 목재를 살피고 있다. 4 경복궁 복원 공사 현장에서 광화문 고주(중심 기둥)에 먹을 긋고 있는 신응수 대목장.
3년가량을 매달린 숭례문 복구 공사를 끝낸 지금, 특별한 소감이 있을 듯합니다.
글쎄요. 기념식 날 시민들은 물론 대통령까지 오셔서 다들 수고했다고 인사를 해주시니 뿌듯하기도 하고, 그동안 힘들었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 같더군요. 사실 처음부터 일어나지 말았어야 될 일이라 생각하기에 ‘뿌듯하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아직도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제 손으로 숭례문을 복원할 수 있었다는 데 대해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전부터 “숭례문이 내 인생을 바꿔놓았다”라고 밝힐 정도로 의미 있는 건축물이여서 더욱 감회가 남다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를 지금의 자리에 있게 한 게 바로 이 숭례문이죠. 돈을 벌기 위해 일을 시작한 뒤 스승님을 따라 1963년 숭례문 중수 작업에 참여하면서 목수의 삶을 결심했어요. 그러면서 ‘내 길’이라는 확신도 얻었고, 좋은 스승님들과의 인연도 이곳에서 있었고요. 사실 스승님이 하셨던 작품이라 제가 직접 맡을 수 있길 간절히 원하긴 했지만, 욕심을 낸다고 해서 될 일은 아니잖습니까. 고맙게도 기회가 주어져서 다행이다 싶었어요. 한편으로는 그만큼 어깨도 무거웠습니다. 하지만 정말 최선을 다했어요.
황망한 화재 소식을 들었던 날, 누구보다 많이 놀라셨겠지요. 공사 시작 당시 숭례문의 상태는 어떠했나요?
뉴스를 보고 한달음에 숭례문으로 달려가면서도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날까 싶었습니다. 주택가에 있는 건축물도 아니고, 다른 불길에 옮겨 붙을 수 있는 여건도 아닌데 대체 무슨 일일까. 처음 제가 가서 목격했을 때만 해도 연기가 나던 상황이라 얼른 불길이 잡힐 거라 생각했지 그렇게 완전히 무너져버릴 때까지 탈 줄은 몰랐어요. 다섯 시간 동안 아무것도 못하고 그저 쳐다만 보고 있어야 하니 답답하고 속상해서 죽겠더라고요. 다음날 날이 밝고 보니 더욱 처참했어요. 불에 직접 탄 것보다 붕괴되면서 생긴 피해가 더 컸어요. 위층은 거의 다 소실됐으니까요.
복구 작업을 하는 데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무엇입니까?
중수 공사 이후 50여 년이 지났으니 곳곳에 변화가 생겼더라고요. 또 당시에는 제가 워낙 어렸고 배우는 과정이라 몰랐는데 이제는 잘못된 부분이 금방 보이더군요. 최대한 튼튼하게, 앞으로 오랜 세월을 거뜬히 버틸 수 있도록 만드는 데 중점을 뒀습니다. 예전 모습을 최대한 재현하고 작업 과정도 전통 기법을 살리고요. 거의 소실된 상층부에 비해 90%가량 남아 있던 하층부는 옛 목재를 최대한 살려 활용했어요. 기와도 100% 사람 손으로 새로 굽고, 원목도 가져다가 손으로 가공하고요. 전통 방식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다소 고생스러울 수는 있으나 역사적인 의미도 있고 미학적으로도 훨씬 아름다워요.
전반적으로 만족스럽게 복구 공사를 끝냈다고 하셨지만, 그래도 혹시 아쉬운 점은 없습니까?
화재 이후 발굴 조사 중에 석축기단 기초지대석이 땅속에 1.6m 정도 묻혀 있는 것을 발견했어요. 처음 축조 당시 숭례문은 더 높았단 뜻이죠. 1.6m면 거의 사람 키만 한 높이죠. 그걸 옛 모습 그대로 파냈다면 더 웅장하고 멋진 모습이 됐을 텐데 아쉽죠. 언젠가는 그 원래 모습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목재에 관한 부분을 총괄하셨지요. 숭례문 복구 공사에는 어떤 목재가 사용됐나요?
모두 우리나라 소나무를 썼어요. 강원도 삼척 준경묘에서 벤 소나무 열 본에 일반 시민들이 기증한 나무가 조금 들어갔어요. 대부분 강릉 목재소에서 갖고 있던 나무를 공수해 썼는데, 그동안 평생 고생하면서 좋은 나무를 찾아다니고 확보해뒀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저는 기술도 물론 중요하지만 좋은 자재를 써야 오래 가는 건축물을 완성할 수 있다고 늘 이야기해요. 나무도 전부 똑같은 게 아니에요. 더디 큰 것과 빨리 큰 것, 주변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과 적게 받은 것, 모두 차이가 있지요. 좋은 나무를 찾는 것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해요.

‘천 년의 세월을 짓는 장인’ 숭례문 복구 공사 도편수, 신응수 대목장
나무는 오래된 것일수록 좋지요. 영동 지역에서 난, 나이테가 촘촘한 것이 좋고요. 나무를 구하러 다니며 겪은 일들은 엄청 많지요. 산에서 길을 잃고 헤맨 적은 수도 없이 많고, 병원에 누워 있다가도 좋은 나무가 있다는 말에 강원도 산꼭대기까지 올라간 적도 있고요. 나무에 미치면 정말 아무것도 눈에 안 보여요. 하지만 좋은 나무를 찾아내 확보했을 때의 기분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죠.
목수로서의 사명감과 자부심이 굉장한 듯합니다. 199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 기능 보유자로 지정되며 사회적으로도 크게 인정받으셨고, 국내 내로라하는 큰 공사를 모두 맡으셨던데요.
문 화재 보수와 복원 공사를 많이 맡았고, 특히 경복궁 복원 정비 사업 도편수로 20년 동안 궁궐 전각을 복원해왔죠. 경주 안압지, 수원 장안문, 부여 무량사 극락전, 분당 대광사, 삼청동 총리공관,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광화문 등의 복원과 보수를 지휘했고요. 삼성 고 이병철 회장의 승지원이나 청와대 상춘재와 대통령 관저 등의 한옥도 세웠습니다. 아마도 저는 참 운이 좋고 복이 많나 봅니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이런 작업을 맡으려면 인연이나 시기 또한 맞아야 하는 거니까요. 항상 ‘내 집을 짓는다’라는 자세로 사명감을 갖고 임했던 것이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누군가는 저를 보고 까다롭고 고집이 세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무와 건축물 앞에서만큼은 그렇게 장인정신을 발휘해야만 한다고 봅니다.
숭례문 복구 공사가 끝났지만 여전히 매우 바쁘시더군요. 현재 몰두하고 있는 작업은 무엇입니까?
울산 태화루 복원에 매달리고 있죠. 5월 30일에 상량식을 열고 본격적으로 목공사를 시작할 예정입니다. 영남 3루 중 하나인 태화루는 영남루, 촉석루와는 또 다른 뛰어난 건축미가 돋보이는 대단한 작품이라 기대가 큽니다. 또 경복궁 소주방(음식을 만들던 곳) 복원 작업도 내년까지 계속되고요.
저는 평생 한길을 걸어오면서 훌륭한 스승님들도 만났고, 사회적으로 인정도 받고, 좋은 기회도 많이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한국 전통 건축의 맥을 이어가야 할 책임도 지고 있다고 봐요. 앞으로도 계속 전통 건축물과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을 알리고 지켜나갈 수 있는 일들을 찾아 힘을 보탤 생각입니다.
마지막으로 숭례문으로 인해 문화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게 된 시민들을 위해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이웃 나라와 비교해봐도 우리만큼 아름답고 조화로운 문화유산을 갖고 있는 나라가 드물어요. 그 하나하나, 우리 모두의 삶이 묻어 있고 더해진 것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숭례문만 해도 그렇죠. 그 문을 드나들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과 이야기, 들어오지 못한 한과 들어갔다 나오지 못한 한이 서려 있는 거잖아요. 문화재는 문화재청의 것도, 전문가의 것도 아니에요. 바로 우리 스스로가 주인이고 주체가 돼야 해요. 하나의 건축물 혹은 역사는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니잖아요. 꾸준한 관심을 갖고 미흡한 부분은 지적도 하고 꾸중도 하면서 잘 보존해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었으면 합니다.
■글 / 이연우 기자 ■사진 / 김영길 ■사진 제공 / ㈜한국전통건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