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한 전 회장의 아내, 엄정희 교수의 ‘48년을 뒤돌아보며’
엄정희(63) 교수는 대기업 회장의 아내, 소위 사모님이다. 인터뷰 요청에 홍보실 직원이 나서 일정을 조정하고 현장에 합류했다. ‘재미없고 형식적인 인터뷰가 되려나?’ 했더니 아니었다. 정작 엄 교수에게서는 높으신 ‘사모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원으로 시작해 최고의 자리까지 오른 남편의 치열한 자수성가의 길을 어떻게 함께했을까 싶을 정도로 맑고 순수한 소녀 같았다. 그녀의 내조는 뜨거운 애정에서 비롯됐다. 그것은 이번에 출간한 엄 교수의 48년 일기 모음집 「오리의 꿈」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 기나긴 세월의 가치를 담은 책이다.
“제 친정어머니는 아마추어 시인이세요. 오는 88세 생신에 아홉 번째 시집을 출간하시죠. 알게 모르게 어머니가 습작하시는 모습을 보고 자랐더니 뭔가 쓰는 것이 생활화됐어요.”
한 권의 책에는 삶의 희로애락, 가정생활의 사계절을 고스란히 담았다. 눈물 나게 사랑하고 때론 참을 수 없는 시련에 가슴 아파하고 또 새로운 꿈을 향해 나아가는 엄 교수의 인생 이야기다. 남편의 도움도 만만치 않았다. 두 사람은 소문난 잉꼬부부다.
“책의 개요를 남편이 직접 짜주었어요. 그래서 정리하기 쉬웠죠. 그동안 남편과 함께 다양한 계절을 지나왔지요. 사랑의 계절, 원하던 아들과 딸을 낳아 행복했던 계절 그리고 첫째 아이를 하늘나라로 보내고 제가 위암 선고를 받은 시련의 계절까지…. 남편과 책을 만들며 그런 기억들을 함께 되돌아보는 시간도 가졌어요.”
성공가도를 달려온 남편과 많은 것을 공유하고, 누릴 수 있었지만 그만큼 역경도 많았다. 결혼 5년 만에 힘들게 얻은 아들 성주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해, 체육 시간에 넘어져 한순간에 의식을 잃고 먼저 세상을 떠났다. 아들을 잃은 슬픔, 그 어떤 고통으로 가늠할 수 있을까. 엄 교수는 ‘나를 두고 먼저 하늘로 가버린 나의 꽃 같은 아들… 죽음이 삶보다 쉬워도 1, 2배가 아니라 10배는 쉬웠다’라고 기록했다. 그녀는 그렇게 삶의 끝에 서서 사경을 헤매다 위암 판정까지 받았다. 그러나 남편과의 애정은 더욱 견고해졌다. 그들의 역경은 사랑의 밑거름이 됐다.
“현재는 완치 판정을 받은 상태로 지내고 있어요. 모든 마음의 정리가 되고 안정을 찾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죠.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그래도 행복했어요.”
엄 교수는 위암을 이겨냈고 늦은 나이에 가족상담학 공부를 새로 시작했다.
56세, 인생 시간 오후 2시일 뿐

이승한 전 회장의 아내, 엄정희 교수의 ‘48년을 뒤돌아보며’
“A학점을 받지 않겠습니다. 공부를 즐겁게 하겠습니다. 함께 가는 음악회를 빼먹지 않겠습니다. 세 가지 약속이 담긴 각서를 받고서야 남편은 허락해줬어요.”
그녀는 딸 같은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며 이화여대 교육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이후 백석대에서 상담학 박사과정까지 끝냈다. 현재는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며 가족상담가로 활동하고 있다.
“제 역할은 무너진 가정을 세우는 ‘홈 빌더’라고 말할 수 있어요. 사람은 연약해서 자기가 아팠던 만큼 남을 품을 수 있다고 하잖아요. 저도 많은 아픔이 있었기 때문에 내담자를 만났을 때 품을 수 있는 힘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제 적성에 맞는 건지, 일하는 게 재밌어요. 상담할 때는 ‘내가 이 사람을 위해서 그동안 공부했다’라는 마음으로 임해요.”
대기업 사모님은 우리에게 먼 세상 속 존재같이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그런 그녀에게 인생 상담이라니. 엄 교수가 갖고 있는 타이틀은 상담에 방해가 되진 않을까?
“가족에 대한 강의를 하며 자연스럽게 제가 살아온 세월, 역경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되지요. 내담자들도 그런 제게 진정성을 느꼈기 때문에 자신들의 상처를 쉽게 내보일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사실은 저도 ‘내조의 여왕’이란 별명이 달갑지는 않아요. 누군가의 아내보다 나, 엄정희로 살아가고 싶어요.”
우리나라의 이혼율은 점점 증가하고 있다. 이제 1위인 미국을 바짝 쫓고 있는 실정이다. 엄 교수는 대학 강의를 하며 부모의 불화로 인해 상처받은 학생들의 사연을 접하고는 마음이 아팠던 적이 많았다고 말한다. 미력한 힘이나마 우리나라의 가정을 일으킬 수 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가난한 남자 이승한을 선택한 이유
젊은 시절 남편은 가난했다. 그녀의 주변에서는 남자의 가정 형편이 넉넉지 않아 앞으로 고생할 것이라며 결혼에 대해 겁을 주곤 했단다.
“그렇지 않아도 결혼을 하게 되면 부모님 곁을 떠나 낯선 환경에서 새 생활을 해야 한다는 두려움이 적지 않았는데, 다들 겁을 주시니 그 무렵 혼자서 자주 울었던 기억이 나요(웃음).”
엄 교수는 보물 1호라는 돌멩이 두 개를 꺼내 보인다. 결혼 전 남편에게 받은 선물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결혼을 결심했던 이유는 그의 꿈을 보았기 때문이다. 언제나 꿈을 갖고 미래를 바라보는 긍정적인 모습이 좋았다.
“남편과 39년 전 데이트하면서 결혼을 떠올린 건 그가 ‘꿈돌이’였기 때문이에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데 늘 큰 꿈을 꾸는 모습에 반했죠.”
결혼 후 꿈이 많아 바쁜 남편 덕에 온전한 휴가를 한 번 가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엄 교수는 말한다. 남편을 믿고 기다리는 것만으로 그는 물 먹은 꽃잎처럼 살아나 전진할 수 있을 거라고. 그것이 아내만이 해줄 수 있는 역할이다.
“비전이 있는 사람은 거친 파도를 눈앞에 두더라도 그것은 표류가 아니에요. 그저 항해의 일부죠. 그렇게 믿고 바라보는 것이 제 첫 번째 내조예요.”
두 번째 내조는 칭찬이다. 남편은 작은 부분이라도 칭찬을 해주면 더 분발하고 달렸다.
“그리고 마지막 내조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남편의 출근길을 배웅한 거예요. 그 안에는 당신에게 진정으로 고맙다. 당신을 위해 오늘 하루 기도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어요. 요즘도 변함없이 하고 있는데요. 경비원께서 아파트 새댁들이 제 모습을 보고 따라 하기 시작하면서 ‘남편 배웅’이 유행이 됐다고 하시더라고요(웃음).”

엄 교수가 48년간 꾸준히 기록한 일기들.
“일상의 작은 행복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에요. 그러기 위해서 늘 애쓰고요. 마치 ‘아내 잘해주기 경연대회’에 나온 사람 같죠. 밖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면 꼭 싸다 주고 생일이나 기념일에는 늘 카드도 손수 만들어서 주고요. 문방구가 문을 닫아서 직접 만들었다는데 제법 솜씨 있게 만들었더라고요.”
엄 교수는 노년으로 갈수록 부부간 친밀감을 높이려 애를 써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 속 대부분의 부부들은 날이 갈수록 친밀감은 점점 줄어들고 이름과 역할만 남기 일쑤다.
“‘70대가 다 돼서 무슨 친밀감이냐’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렇지만 요즘은 백세 시대잖아요. 서로 친밀감이 없다면 얼마나 집에 들어가기 싫겠어요. 부부는 의무적으로라도 늘 같이 있어야 해요. 떨어져 지내는 부부일수록 서로 할 말이 없어지니까요.”
지난 5월 이승한 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동안 바빴던 나날을 뒤로하고 조금은 여유로운 생활을 하며 아내와 함께 새로운 꿈을 꿀 수 있지 않을까?
“당분간 여유는 없을 거예요. 오히려 일이 많아졌어요. 홈플러스그룹의 퍼스널 어드바이저 역할도 남아 있고 유통산업협회 회장과 e파란재단의 이사장도 맡아야 하고요. 또 보스턴 대학에서 그의 경영 이론을 정립하는 ‘K-edu’ 프로젝트도 하고 있어요.”
이승한 회장은 앞으로 인재 육성과 사회 공헌에 주력할 것이다. 그의 경영 능력을 인정한 몇몇 기업에서 다양한 러브콜을 받기도 했지만 모두 고사했다. 이승한은 영원한 홈플러스인이란 본인의 뜻이었다.
“사실 이번 책 출간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는 남편에게 선물로 주려고 추진한 거예요. 기업에 사사(社史)가 있다면 제 책은 야사(野史) 정도 되지 않을까요? 홈플러스는 모든 직원과 함께 만든 회사라 정도 많이 들었죠. 많이 사랑했어요. 14년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르겠어요. 남편뿐만이 아니라 저에게도 열정 이상의 애정이었죠.”
집필 기간 48년. 그녀의 기록에는 가족을 넘어 시대의 변화가 저절로 녹아 있다. 엄 교수는 책을 통해 부부의 사랑은 어떤 아픔과 시련의 벽을 넘을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 싶었다. 그녀는 은퇴를 넘어 새로운 비전을 바라보는 남편을 위해 오늘도 기도한다.
■글 / 이유진 기자 ■사진 / 김영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