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의 박찬호 “나는 마이너리거다”

마흔의 박찬호 “나는 마이너리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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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동안 야구공을 던진 남자. 메이저리그의 화려함과 마이너리그의 잔인함을 동시에 경험한 박찬호. 그가 자서전을 출간했다. 자신의 성공 비밀을 쏟아낸 책 말이다. 뻔한 교훈 이야기라고? 맞다. 그는 교훈적인 사람이다. 그게 나쁜가. 진솔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박찬호와 마주했다.

마흔의 박찬호 “나는 마이너리거다”

마흔의 박찬호 “나는 마이너리거다”

몇 달 전,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박찬호가 자서전을 쓰고 있다”라는 소식이었다. 새로운 소식이지만 놀라지 않았다. 일견 당연한 수순이었다. 한국인 최초로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에 진출해 17년간 인정받은 선수, 2011년엔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했다가 한국으로 돌아와 고향 연고 팀 한화 이글스에서 유종의 미를 거둔 ‘코리안 특급’. 여기에 고질적인 부상을 입은 드라마틱한 야구 인생의 주인공이 아닌가. 그가 자서전을 안 쓰면 누가 쓴단 말인가. 야구에 문외한인 기자도 그 정도의 감은 있다. 또 이런 종류의 감도 있다. 그의 책이 굉장히 교훈적일 거라는.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못한 가정에서 태어나 미국 프로야구에서 인정받은 최초의 한국인이라면 풍성한 이야기를 털어놓으리라.

며칠 전, 「레이디경향」 편집부로 「끝이 있어야 시작도 있다」라는 제목의 책이 배달됐다. 저자는 박찬호(40), 책의 내용은 스포츠 스타의 성공담이 아니었다. 상아색 표지 속에는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삶의 슬럼프를 어떻게 지혜롭게 이겨낼 수 있는지 알려주는 메시지가 인쇄돼 있었다. 살포시 책을 챙겼다.

은퇴 후 7개월, 박찬호의 사적인 시간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는 서울 플라자호텔 22층에서 진행됐다. 박찬호가 은퇴 기자회견을 진행했던 장소다. 7개월 동안 그는 어떻게 지냈을지가 가장 궁금했다.

“선수 시절, 제 생활은 체계적이었습니다. 하루 단위, 한 달 단위로 스케줄이 짜여 있었죠. 어떤 음식을 먹을지, 하루에 몇 시간 동안 운동을 할지 사소한 내용까지 정해놓았어요. 성적을 위해, 컨디션을 위해 하나씩 하나씩 정한 규칙들이었습니다. 팔굽혀펴기를 하고, 머릿속으로 공을 던지면서 하루를 시작했고, 22층 집까지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계단을 이용한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제는 습관들이 조금씩 변하고 있습니다.”
<STRONG>1994년</STRONG> 한국인 최초 메이저 리그 진출. LA 다저스와 계약했지만 2주 만에 마이너리그로 강등됐다. <STRONG>1997년</STRONG> 풀타임 메이저리그 선발 투수로 활약했다. 시속 161km의 강속구를 던지던 시절이다.

1994년 한국인 최초 메이저 리그 진출. LA 다저스와 계약했지만 2주 만에 마이너리그로 강등됐다. 1997년 풀타임 메이저리그 선발 투수로 활약했다. 시속 161km의 강속구를 던지던 시절이다.


그의 일상은 단순한 규칙의 연속이 아니었다. 일종의 신념이었다. 30년간의 믿음으로 유지해온 습관이 흔들리자 우울해지기도 했다. 그는 슬럼프를 자신만의 특기로 헤쳐 나가기로 했다. 무언가 벼리고, 견디는 것 말이다.

요즘 박찬호는 아침 6시 30분에 기상한다. 아이들 등굣길을 챙기고, 보통은 서재로 직행한다. 글을 쓰거나 스포츠 경영과 미술 등 다방면의 공부를 한다. 그는 은퇴 후에 하고 싶은 일이 많아졌다고 말한다.

“학교를 졸업하면 사회에 나가서 그동안 배운 내용을 활용하잖아요. 제게 경기장은 학교 같은 존재였어요. 이제 30년간 다녔던 학교를 졸업했으니, 본격적으로 제가 학교에서 배운 것들을 활용해야죠.”

모텔에서 라면 끓이던 박찬호
야구라는 학교에서 그는 우등생이 되기도 하고, 열등생이 되기도 했다. 우리는 우등생 박찬호에 대해서는 익히 잘 알고 있다. 시속 161km의 강속구와 화려한 명성에 걸맞은 연봉(18년간 벌어들인 수입은 약 1천억원이다)은 그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다.
<STRONG>2002년</STRONG> 텍사스 레인저스로 이적한 후 부상으로 ‘먹튀’ 논란이 일었다. 당시 대인기피증을 앓기도 했다. <STRONG>2005년</STRONG>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서 시즌 12승을 거두며 재기했다.

2002년 텍사스 레인저스로 이적한 후 부상으로 ‘먹튀’ 논란이 일었다. 당시 대인기피증을 앓기도 했다. 2005년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서 시즌 12승을 거두며 재기했다.


반대로 열등생 박찬호에 대해선 얼마나 알고 있을까. 국내외 팬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던 그가 마이너리그에서 보냈던 시간들 말이다.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메이저리그가 천국이라면 마이너리그는 지옥이다. 내려가는 순간, 지금까지 누렸던 혜택이 모두 사라진다. 의료보험은 물론, 제대로 된 교통편이나 식사도 제공되지 않았다. 시골과 시골을 오가며 경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가족과 함께 지내기조차 어렵다.

지난 2007년, 그는 조그마한 모텔을 전전하며 모텔 방에서 혼자 라면을 끓여 먹었다. 아침이면 햇반에 김, 참치 캔, 김치를 반찬으로 혼자 식사를 했고 일요일에는 낮 경기가 끝나면 자동차로 40~50분 걸리는 한국 식당을 찾아 밥을 먹곤 했다. 야구를 사랑했기에 열등생 생활을 견딜 수 있었다.

지독히 현실적인 사람
그의 다음 이야기는 이렇다.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선수는 마이너리그에서 재기했다. 여기서 끝났다면 그는 승부욕 넘치는 스포츠 선수로만 남았을 것이다. 그는 조금 다른 울림을 준다. 단순히 과거의 환상을 잊지 못하는 선수가 아니다. 박찬호는 냉정하다. 지독히 현실적으로 살아간다.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이성적으로 현실을 판단한다. 그의 성품을 살펴볼 수 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2006년 이후 그는 거의 매해 고비를 맞았다. 그는 예전과 같은 속도의 공을 던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기회조차 오지 않았다.

<STRONG>2007년</STRONG> 뉴욕 메츠에서 방출된 후 휴스턴 애스트로스와 마이너 계약을 하며 야구 인생 중 가장 긴 마이너리그 생활을 했다. <STRONG>2009년</STRONG> 필라델피아 필리스에서 생애 최초로 월드시리즈에 구원 등판하는 등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다.

2007년 뉴욕 메츠에서 방출된 후 휴스턴 애스트로스와 마이너 계약을 하며 야구 인생 중 가장 긴 마이너리그 생활을 했다. 2009년 필라델피아 필리스에서 생애 최초로 월드시리즈에 구원 등판하는 등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다.

“2007년, 뉴욕 메츠에 스스로 방출을 요구했습니다. 소속 팀이 없는 상황에서 다른 팀에서 오퍼가 오진 않는지 기다렸지요. 몇몇 팀에서 콜이 있었지만 모두 마이너리그였습니다. 그 팀에서 제게 접근하는 이유는 오로지 과거 커리어 때문이었고요.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던 것이죠.” (「끝이 있어야 시작도 있다」 235쪽)

힘과 기량은 점점 부족해졌고, 그는 깔끔하게 스스로를 인정했다. 스포츠 선수의 운명이라고 냉정히 말씀하지 마시길. 박찬호는 한국인들의 꿈과 희망을 안은 채 메이저리그에 입성한 선수다. 어느 곳에서나 환영받았던 선수가 냉담한 시선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기는 말처럼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약간의 스타 의식이 있었어요. 식당에 가서 종업원들이 조금만 불친절하면 이제 인기가 떨어져서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자격지심이 생겼던 거죠(웃음).”

박찬호는 과거가 아니다. 그는 명확히 현실을 인식했다. 은퇴 후의 행보는 그런 그의 성품을 반영한다. 그는 스스로를 마이너리거라고 생각한다.

<STRONG>2010년</STRONG> 뉴욕 양키스에서 부진을 면치 못해 시즌 중 피츠버그 파이어리츠로 옮겼다. 여기서 통산 1백24승을 올렸다. 미국 프로야구에서 뛴 아시아 선수 중 가장 높은 숫자다.

2010년 뉴욕 양키스에서 부진을 면치 못해 시즌 중 피츠버그 파이어리츠로 옮겼다. 여기서 통산 1백24승을 올렸다. 미국 프로야구에서 뛴 아시아 선수 중 가장 높은 숫자다.

“저는 마이너리그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해요. 항상 메이저리그를 꿈꾸면서 공부하고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성숙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마이너리그라고 생각하면 나태해질 틈이 없습니다.”

그는 인터뷰 중 여러 번 “지능을 갈고 닦고있다”, “공부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야구공을 내려놓은 박찬호. 그는 자신의 약점을 알고, 당당히 드러낼 수 있으며 그 상황을 유머로 승화시킬 수 있는 남자다. 자신만의 철학이 뚜렷한 자신감과 여유가 있는 마흔의 남자, 멋지지 않은가.

■기획 / 장회정 기자 ■글 / 박은혜(프리랜서) ■사진 / 김영길 ■사진 제공&참고 서적 /「끝이 있어야 시작도 있다」(박찬호 저, 웅진지식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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