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재 화가 박수근의 붓을 이어받다! 박인숙·천정현
박수근 화백의 장녀 박인숙(70) 작가는 중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하다 2006년에 교장으로 퇴임했다. 이후 전속 화랑이 생길 만큼 평단에서 인정받고 있는 화가다. 아버지의 기법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특유의 소녀 감성으로 동화 같은 그림을 그린다. 아버지를 추억하며 그의 생전 모습을 담은 연작 시리즈도 그리고 있다.
“학교에 재직할 때보다 작품 활동을 하는 지금이 더 바빠요. 아트페어에 참여도 하고 개인전도 해야 돼요. 얼마 전에는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아트페어에도 다녀왔어요. 친구들은 갱년기 우울증이다 해서 고민도 많다는데, 저는 그럴 새가 없네요. 감사해야죠.”
최근에는 그녀의 아들이자 박수근의 외손자 천정현(42) 작가와 함께 인천 예일고등학교 내 예향갤러리에서 ‘박수근 3대 가족전, Happiness!!’라는 전시회를 열었다. 박수근 화백은 5남매를 두었는데, 세 남매는 세상을 떠났고 장남 박성남씨와 장녀 박인숙씨만이 남았다. 장남 박성남 작가 역시 경기도 파주에서 작품 활동에 매진하고 있으며 그의 아들 박진흥 작가도 선조부의 뜻을 잇고 있다. 결국 박수근 화백의 자녀와 손자들이 모두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박인숙 작가의 막내아들 천 작가도 직장을 다니다 느지막이 붓을 들었다.
“저는 공예과를 나와 디자인 관련 일을 하다가 뒤늦게 그림을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생활이 불안정하다고 생각해 작품 활동을 포기하고 취업을 했죠. 그런데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 거예요. 결국 어머니의 권유로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죠.”
할아버지에 이은 어머니의 감성을 닮은 막내아들. 할아버지처럼 한국화, 특히 인물을 잘 그린다. 박인숙 작가는 “예술 계통은 3대에서 가장 재능이 있는 예술가가 나온다는 말이 있다”라며 아들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뒤늦게 시작한 만큼 차곡차곡 담아뒀던 화력이 꽤 세다.
“직장생활이라고 항상 보람된 것은 아니잖아요. 그때보다 생활은 보장돼 있지 않지만 마음은 정말 편해요. 그림을 그리는 몰입의 순간만큼은 행복합니다. 배고픔도, 피곤함도 잘 모르겠어요.”

천정현 작가의 작품.
“그림은 제게 힘을 주는 존재예요. 미술관은 그림을 모르는 남편이 지어주는 것이 아니고 제가 벌어서 지어야 하니까 열심히 그려야지요(웃음). 내 공간에 나만의 그림, 때로는 다른 사람의 그림을 거는 상상만 해도 정말 행복해요.”
가족에 대한 사랑은 컸지만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그림에 몰두했던 아버지. 그 탓에 빈곤한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박인숙 작가는 가난이 싫어 배우자의 첫째 조건을 ‘생활력’으로 삼을 정도였다.
“아버지가 생활면으로 무능했기 때문에 가난이 싫었어요. 한번 넘어져도 털고 일어날 수 있는 생활력 강한 남자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해서 결혼한 사람이 지금의 남편이에요. 아주 완고하고 강한 ‘상남자’ 스타일이죠. 나이가 들고 보니 남편과는 감성적인 면이 좀 안 맞아요(웃음). 그렇다 보니 또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나네요.”
박수근 화백. 세상에 그런 아버지는 없었다. 언제나 다정다감하고 편안했으며 없는 살림에도 가족에게 최선을 다한 가장이었다.
아! 아버지 박수근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박인숙 작가는 눈물부터 글썽이기 시작했다. 그리움에 사무쳐 붓을 들어 아버지를 그린 작품도 있다. 빨래터에 자리를 잡고 그림을 그리는 모습, 뒷마당에서 닭을 잡으려 뛰어다니시던 아버지의 모습들….
“언제나 표정이 온화하셨어요. 자식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말씀이 없으셨죠. 특히 딸인 제가 귀여움을 많이 받았어요. 가난한 살림에 철없이 뭘 사달라고 조르면 빚을 내서라도 사주셨어요.”
신문지를 접어 만든 봉투에 든 엿가락 두 개, 오징어 한 마리, 군고구마 세 개…. 아버지가 귀가하시는 시간에는 아버지의 큰 손에 ‘오늘은 무엇이 들려 있을까’ 하는 기대감에 초롱초롱 눈을 깜빡였다.

천재 화가 박수근의 붓을 이어받다! 박인숙·천정현
아버지는 아낌없이 사랑을 표현했다. 누군가는 같은 화가로서 “아버지의 그늘이 너무 커 부담스럽지 않느냐”라고 묻지만, 부담보다는 ‘박수근의 딸’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울 뿐이다. 박수근 화백은 언제나 가정 안에서의 평범한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착한 예술가. 인간의 선함과 진실을 그려야 한다는 것이 그가 추구하는 예술적 견해였다. 그것이 대중에게 사랑받는 이유일 것이다.
고가의 그림 속, 진짜 가치
박수근 화백의 그림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아마 ‘빨래터’일 것이다. 2007년 당시 국내 최고 경매가(45억2천만원)로 거래되기도 했고 위작 논란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들인 박성남 작가가 강력하게 진품임을 주장했고, 법원을 통해 ‘진품 추정’이라는 판결을 얻었다. 위작 논란 입장에 대해 그녀는 한 발짝 물러섰다.
“글쎄요. 아버지 그림은 동생이 가장 잘 알고 있으니 믿을 뿐이에요. 저는 감정에 관련해서는 끼어들고 싶지가 않아요. 단지 아버지 생전에는 단돈 1백만원도 손에 못 쥔 분인데 ‘억’ 소리 나며 그림이 팔렸다는 점에서 후손으로서는 참 아이러니한 생각이 들죠.”
그녀에게는 아버지의 작품이 단 한 점도 없다. 전에 어머니가 갖고 있던 8호 크기의 작품을 건네받아 장롱 속에 보관하고 있었지만 3천만원 정도에 팔아 허름한 집을 한 채 샀다.
“어머니가 시집 갈 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다며 아버지 작품을 주셨어요. 남편이 작품을 팔아 허름한 집을 사서 3층짜리 건물을 지었어요. 그 덕에 안정적인 살림을 꾸려나갔지만 아버지 작품을 쉽게 판 것이 무척 후회가 돼요.”
박수근미술관 홈페이지를 방문하면 그의 젊은 시절, 아내와 (어릴 적 세상을 뜬) 막내딸 인애와 함께 대청마루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사진이 뜬다. 그 사진 속에는 박수근 화백이 그린 작품 수십 점이 마루 주변에 빼곡히 놓여 있다. 세속적인 생각이지만 그림들을 지금 시세로 본다면 수백 억원은 족히 넘을 것이다. 아버지의 그림들은 모두 후손들의 손을 떠났다. 그렇다고 그들이 풍족하게 삶을 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천재 화가 박수근의 붓을 이어받다! 박인숙·천정현
당시 대부분의 그림은 현재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낮은 가격으로 팔려나갔다. 참고로 지금 박인숙 작가의 그림보다 훨씬 못한 가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저 평생을 고생하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장 가슴이 아파요. 안목이 있으셨으면 팔지 않고 갖고 계셨을 텐데. 그때는 정말 하루 끼니를 걱정할 만큼 어려운 형편이었으니 어머니도 어쩔 도리가 없었을 거예요.”
그러나 그녀는 아버지에게 돈으로도 얻을 수 없는 빛나는 소질을 이어받았다. 스스로 기뻐하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능력. 정말 감사한 일이다.

천재 화가 박수근의 붓을 이어받다! 박인숙·천정현
여기저기서 대박을 외치는 세상이다. 박수근 화백의 작품이 40여억원에 낙찰됐을 때도 사람들은 ‘대박!’을 외쳤을 것이다. 그러나 한 푼, 두 푼을 모아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아는 박수근 화백이 그리 바라던, 아름다운 풍경은 아니었을 것이다. 열심히 하루를 사는 힘겨운 아낙들의 모습을 담아 살아 숨 쉬는 그림. 그 속에는 돈으로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것들이 담겨 있다. 박인숙·천정현 작가는 그런 아버지, 할아버지 박수근 화백의 정신을 화폭에 담아 이어나가고 있다.
빨래터 꽃피는 봄날 아버지는 항상 큰 나무 밑에 앉아 계셨다. 개울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와 빨래터의 동네 아낙네들의 방망이 소리가 봄꽃처럼 은은하게 피어 울려 퍼졌다. 하굣길의 아이들은 이 노래에 맞춰 종종걸음을 걸었다. 그중에 제일 사랑스럽고 예쁜 어머니의 빨래하는 모습을 놓칠세라 빠른 손놀림으로 도화지에 옮기며 흐뭇해하시던 나의 아버지.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의 정겨움을 감지하면서도 그저 모르는 척 식구들의 옷을 부지런히 빠셨다. 새들도 피어난 봄날을 축하하듯 나뭇가지 사이사이로 정겹게 날아다니며 노래하던 봄날 개울가. 그립고 그립다. 그곳은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의 노래가 피어나는 곳이다. 봄날의 빨래터는 사랑과 풍요가 함께하는 곳이다. 그림&글 박인숙
박수근 화백과 그의 아내 그리고 막내딸 인애의 생전 모습.
■글 / 이유진 기자 ■사진 / 안진형(프리랜서) ■자료 협조 / 박수근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