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번트증후군 아들을 화가로 키운 곽성민군의 어머니 김송희씨
“병원에 늦게 갔어요. 성민이가 처음 유치원에 입학하고 얼마 안 돼 쫓겨난 다음에 갔으니까요. 그때까지 몰랐냐고요? 아니요, 감이 오죠. 눈도 잘 못 맞추고, 말도 못하고…. 하지만 병원에 가기가 무척 무서웠어요. 그럴 거라고 짐작하는 거랑 기정사실로 확정을 짓는 것은 다르잖아요.”
곽성민군(18)의 어머니 김송희씨(47)는 아득한 과거라도 떠올리듯 엷게 웃었다. 무뎌질 만한 시간이지 싶지만 엄마의 마음은 그게 아닌가 보다. 크게 웃지도, 소리 내 웃지도 못하는 것을 보니 말이다. 어찌 그 마음을 다 안다 할까. 교복을 반듯하게 입고 엄마 옆을 늠름하게 지키고 있는 훌쩍 큰 아들이지만 엄마 눈에는 여전히 어릴 적 예쁜 아들 그 모습 그대로일 것이다. 성민군은 서울예고 3학년생으로 개인전을 두 차례나 가진 명실상부한 프로 화가다. 하지만 이 스펙의 주인공인 성민군이 다섯 살 때 발달장애 2급인 자폐 판정을 받은 서번트증후군을 앓고 있는 인물이라면? 서번트증후군이란 뇌기능 장애를 가지고 있음에도 특정 영역에서 천재성이나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는 현상을 말한다. 자폐증을 가진 레지던트가 비로소 환자와 동료 모두에게 인정받는 진정한 의사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드라마 ‘굿 닥터’의 주인공 박시온(주원 분)이 바로 서번트증후군의 드라마틱한 사례다. 그리고 여기 드라마 속 주원만큼이나 극적인 재능과 사연을 가진 주인공이 있다.
엄마는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지난 시절을 어떻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못해요, 못해. 유치원에 입학하고 채 한 달을 다니지 못하고 쫓겨난 다음에 병원에서 자폐 진단을 받고, 정신을 놓고 살았어요.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죠. 6개월을 집 안에만 있었어요.”
“이런 아이를 어떻게 유치원에 보내느냐”라는 싸늘한 비난을 듣게 된 엄마는 그대로 무너져내렸다. 짐작은 했지만 집 밖의 세상이 그리 야멸찰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제 서른을 갓 넘긴 젊은 엄마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런 엄마 속도 모르고 성민이는 곧 있을 자신의 생일 파티를 손가락을 꼽아가며 기다려온 참이었다. 색동 한복을 입고 번쩍이는 황금 왕관도 쓰고 케이크의 촛불도 끄고 싶다면서 말이다.
“아이가 3월생이라 입학하자마자 생일 파티가 있던 셈이죠. 유치원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나가라는데 아이는 뽐내는 게 좋아서 생일 파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 거예요. 어쩌겠어요. 정말 사정사정을 했어요. 생일 파티만 하게 해달라고. 그러면 그만두겠다고. 그래서 한 달 치 유치원 교육비를 내고, 생일 파티하고는 그만뒀네요(웃음).”

서번트증후군 아들을 화가로 키운 곽성민군의 어머니 김송희씨
“당시 부산에 살고 있었는데, 부산에 있는 유치원이란 유치원은 다 찾아가서 문의했어요. 결과요? 다 거절이죠(웃음). 주변에선 그런 절 보고 인정할 건 인정하라며 장애인들이 다니는 특수시설을 소개해줬어요. 그땐 젊었잖아요. 그냥 그걸 받아들이는 게 불편하더라고요. 저는 당시에 아이에게서 느끼는 어떤 본능적인 직감이 있었거든요.”
순간 그녀의 눈빛이 반짝였다. 남들에게는 한없이 부족해 보이는 아이였겠지만 그 아이를 배 속에서 열 달을 품은 엄마의 눈은 달랐다. 뭐라고 증명해 보일 수는 없었지만 막연하게나마 아이에게 남다른 면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다섯 살 무렵이었는데요, 펜이나 색연필, 크레파스 하나만 쥐어줘도 한참을 몰입해서 노는 거예요. 미술을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는데도요. 드로잉이라고 하죠? 부드러운 선이 나오는 거예요. 애들이 그려내는 서툰 게 아니라 배운 사람이 그린 것 같은 선이요.”
멋쟁이 커리어 우먼이었던 엄마는 아이의 범상치 않음을 확신하고 그날부터 ‘성민이 엄마’로서만 살기로 마음을 먹었다. 마음 끈을 단단히 묶었다.
쫓겨나고 냉대받는 일상
조금 불편한 몸 때문에 스스로 불행하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성민군은 합격운 하나만큼은 기막히게 타고난 아이임은 분명하다. 부산에서 최고 명문으로 꼽히는 초등학교와 예술중학교를 졸업하고 국내 예술계 최고 명문 고교로 손꼽히는 서울예고에 재학 중이니 말이다.
“컴퓨터가 추첨으로 뽑아준 초등학교 입학을 제외하곤 제발 운이라고 하지 말아주세요(웃음). 단 한 군데도 그냥, 거저, 노력도 않고 간 곳은 없으니까요. 숨지 않았어요. 괜히 주눅 들지 않으려 노력했고요. 기왕 세상 속에서 살 거면 최고에 도전하고 싶었어요.”

서번트증후군 아들을 화가로 키운 곽성민군의 어머니 김송희씨
“성민이가 초등학교 5학년일 때였어요. 기간제 교사로 오신 특수반 선생님께서 성민이를 예술중학교에 보내는 게 어떻겠냐고 하시더라고요. 성민이처럼 발달장애를 가졌으면서도 뛰어난 재능을 지닌 아이들이 예술중학교에 입학하는 경우를 몇 번 보셨다면서요. 당시 성민이가 그림 그리는 것을 무척 좋아했기 때문에 그거다 싶더라고요.”
김송희씨는 유치원 때처럼 모든 예술중학교에 입학을 문의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범위가 부산 지역에서 전국으로 확대된 것이다. 예상했겠지만, 모든 곳에서 성민군의 입학을 거부했다.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학교도 있었지만 결국 ‘입학을 시켜줘도 적응하지 못할 것이다’라며 원서 접수조차 받아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냥 물러날 성민이 엄마가 아니었다.

삼청동 두가헌 야경(2013).
그녀는 유치원에서만 쫓겨난 게 아니라고 했다. 호텔 레스토랑을 가도, 음악회를 가도 쫓겨나기 일쑤였다. 쫓겨나고 냉대받는 게 일상이었다. 참았다. 매일매일 싸울 수 없으니 집에 와 아이를 붙잡고 울며 참았다. 하지만 아이의 교육만큼은 참지 않았다. 무척이나 간절한, 포기할 수 없는 권리였기 때문이다.
태어나 가장 많이 운 날
성민군은 중학교 3학년 때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리고 최근 두 번째 개인전을 성황리에 마쳤다. 일반적인 루트를 생각해볼 때 꽤 이른 감이 없지 않다. 비록 두 번의 개인전이 성공적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그 이유가 궁금했다. 하지만 그 답으로 돌아온 김송희씨의 고백은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 아픈 일이었다. 사건은 예술중 입학 후에 있었다.

교토 가을 풍경(2012).
이미 어지간한 냉대엔 이력이 나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은 성민이의 존재 자체를 뒤흔드는 모욕이었다. 그녀는 태어나서 그날처럼 많이 운 날이 없었다고 했다. 죽을 때까지 그 말만큼은 잊을 수 없다고 했다.
“한참을 울고 다짐했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선생님보다 내 아들을 더 유명한 화가로 만드리라 하고 말이에요. 그분도 유명한 판화가셨거든요. 그런데 왜 중3 때 개인전을 했냐고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당당히 실력으로 여기까지 온 아이라는 것을요.”

훈데르트바서 비엔나 프로젝트(2013).
“그 선생님만이 아니었어요. 지난 세월 제가 들어온 모진 말은 아마 여러분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거예요.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고마워요. 우리를 울게 하고 아프게 한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명문 학교에 입학을 할 생각도, 전시회를 열 계획도 세우지 못했을 거예요.”
누구는 악이라고 하고, 누구는 깡이라고 했다. 하지만 김송희씨는 도전이라고 했고, 희망이라고 했다. 성민군의 남다른 재능과 헌신적인 엄마의 열정을 아는 사람들은 외국으로 가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장애아들을 생각해서라도 한 명쯤은 희망의 사례를 만들어놓고 싶었다.
도전은 계속될 것이다
사진 촬영을 위해 스케치하는 모습을 연출해달라고 성민군에게 부탁했다. 흔쾌히 적당한 자리에 앉아 하얀 스케치북을 열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적당히 시늉만 해도 될 일이었는데, 어느새 성민군은 그림에 푹 빠져 있었다. 아마도 사진 촬영 중이라는 사실을 깜박 잊은 듯하다. 천재의 모습을 살짝 엿본 기분이 들었다. 하얀 스케치북 위에는 서울예고의 전경이 멋지게 그려져 있었다. 한 번 눈으로 본 풍경을 머리에 그대로 입력해 그림으로 옮기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들었는데, 실제로 그 광경을 보게 되니 절로 탄성이 나왔다. 옆에서 그런 아들을 지켜보던 엄마의 얼굴에는 대견함이 가득했다.
“다섯 살 무렵부터 재능을 보였어요. 그런데 말을 못했어요. 다들 믿어주질 않으니까요(웃음). 그저 저 엄마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인가 보다, 하고 여기는 거죠. 무시당하지 않으려는 몸부림도 있었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어요. 정정당당히 실력으로 성민이가 평가받길 바랐어요. 그것을 위해 지금껏 노력했고요.”
가장 잊지 못할 말, 가장 가슴 아팠던 때만 물었던 것 같아 분위기 전환 차원에서 가장 기뻤던 때를 물어보았다.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서울예고 합격을 꼽는다. 그날도 태어나서 가장 많이 운 날이라고 했다. 예중 선생님의 비수 같던 말을 들었던 때가 가장 많이 울었던 때라고 하지 않았느냐 했더니, 그날은 가장 슬프게 운 날이고, 서울예고 합격 발표 날은 가장 기뻐서 운 날이란다.
“서울예고 아이들이 다 착하고 순해요. 우리 성민이를 많이 배려해주었어요. 초등학교, 중학교 친구들도요. 그 고마움은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부족한 우리 성민이가 단 한 번도 왕따나 괴롭힘을 당한 경험이 없었어요.”
지난날을 회상하는 김송희씨의 표정이 한결 부드럽게 풀린다. 졸업을 앞둔 시점이라 감회가 남다른 듯했다.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었던 남편에 대한 고마움도 새삼 크게 다가왔다.
“이번 개인전을 마치고 뒤풀이 겸 식사를 하러 호텔 레스토랑에 갔어요. 근데 거기가 어딘 줄 아세요? 성민이 어렸을 적에 가서 주문도 하기 전에 쫓겨났던 곳이에요(웃음). 훌륭하게 다 큰 아이와 그 레스토랑에 다시 가서 앉아 있으니 정말 감회가 새롭더라고요.”
성민군은 타고난 재능뿐 아니라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그림만 그리는 노력형이기도 하다. 그래서 화가 곽성민에 대한 기대가 큰 것이다. 내년 초 고교 졸업을 앞둔 성민군의 향후 계획이 궁금했다. 김송희씨는 “성민이와 나, 우리는 늘 최초였다”라는 한마디와 함께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대학 진학이나 프로 데뷔 등 구체적인 설명은 아니었지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우리는 그저 이 드라마의 끝에 뜨거운 박수만 준비하고 있으면 될 듯하다.
"미운 오리 새끼같은 아들과 그림공부하며 지나온 세월은 아름다운 전쟁이었습니다"
■기획 / 장회정 기자 ■글 / 강은진(객원기자) ■사진 / 조민정 ■그림 제공 / 곽성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