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짜는 아무것도 없어요” 1세대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

“공짜는 아무것도 없어요” 1세대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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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라노를 안다면 패션을 좀 아는 사람이다. 최초의 패션쇼, 최초의 기성복 브랜드 론칭을 해낸 패션 디자이너의 선구자가 노라노다. 그의 삶을 조망한 다큐멘터리 영화 ‘노라노’에는 한국 패션사와 일하는 여성의 역사가 담겨 있다. 패션이야말로 여성의 삶과 동떨어질 수 없지만 소수만 누릴 수 있는 전유물로 여겨진 것이 사실. 60년간 묵묵히 옷만 만들어온 이의 삶을 통해 패션은 사치가 아닌 자신의 표현이자 삶에 관한 태도임을 깨닫는다.

“공짜는 아무것도 없어요” 1세대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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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라노(85)의 삶은 대한민국 패션의 역사 자체라고 해도 무리가 없다. 미국 프랭크 왜건 테크니컬 칼리지를 2년 만에 졸업하고 전쟁이 일촉즉발이던 고국에 돌아와 옷을 만들었고, 1952년 서울 명동에 의상실 ‘노라노의 집’을 열었다. 1956년 서울 반도호텔에서 열린 한국 최초의 패션쇼도 노라노의 작품이었다. 일반인들을 기용해 낯선 패션쇼가 친근하게 다가서도록 했다. 1950, 60년대 영화 속 여배우들의 의상은 노라노가 전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70년대엔 그간의 맞춤복 제작 노하우를 바탕으로 표준화된 사이즈를 도입해 기성복에 도전한다. 일반인도 부담 없이 노라노의 옷을 입게 하기 위해서였다. 추후 기성복이 대중화되면서 패션 업계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큰 성장을 이뤘다. 1979년, 한국산 실크로 제작한 노라노 기성복이 미국 뉴욕의 메이시백화점 15개 쇼윈도를 장식하기도 했다.

이렇게 패션계에 큰 족적을 남겼고, 지금도 여전히 현역 디자이너로 60년째 활동 중인 노라노는 자신의 성취를 포장하거나 일선에서 물러나 훈수를 두는 일에 전혀 관심이 없다. ‘언론플레이’에 익숙한 요즘 패션계와는 거리가 먼 모습이다.

이혼이라는 꼬리표를 딛고
노라노는 일제강점기에 경성방송국을 창립한 노창성과 경성방송의 초대 아나운서를 지낸 이옥경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는 인천 세관장으로 영친왕의 영어 교사까지 지냈다고 한다. 하지만 유복한 생활은 경기여고 재학 시절이 마지막이었다. 일본군위안부 차출을 피하기 위해 사진만 보고 장교와 결혼했지만 1년도 되지 않아 종지부를 찍었다. 요즘이야 ‘이혼’은 결혼의 다른 옵션이 돼버렸지만 당시만 해도 ‘이혼한 여자’는 주홍글씨와 냉대를 피할 수 없었다. 내로라하는 집안이었으니 오죽했을까. 친구들 사이에서 팔방미인으로 주목받던 10대 소녀는 하루아침에 안팎으로 손가락질을 받는 천덕꾸러기가 됐다. 하지만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경제력이 있어야 독립할 수 있으니 악착같이 학창 시절 곧잘 하던 영어 회화와 타이핑을 배워 미군정에 사무원으로 취직했고, 성실히 근무한 덕분에 유학의 기회까지 잡았다. 자신의 힘으로 디자이너가 되는 길을 하나하나 내딛었다. 그렇게 노명자(본명)는 ‘노라노’가 됐다. 문학 소녀였던 10대에 읽은 「인형의 집」(어머니이자 아내 이전에 한 인간으로 살기 위해 집을 나가는 노라의 이야기, 헨리크 입센의 대표적 희곡)의 영향이었을까.

“공짜는 아무것도 없어요” 1세대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

“공짜는 아무것도 없어요” 1세대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

“당시 이름 있는 집안 자녀들은 솔선해서 군수 공장이나 위안부로 가거나 남학생들은 학도병으로 갔는데 그걸 피하려면 결혼하는 방법밖에 없었어요. 일본 유학을 준비하다가 전쟁 때문에 취소됐는데 신랑이 일본에 사니까 공부도 할 수 있겠다 싶은 마음에 결혼하기로 맘먹었죠. 고작 열일곱이었으니까요. 결혼식 사흘 전에 만났고 식 올린 뒤 1주일 만에 일본에 가서 신접살림을 차리자마자 이혼하게 됐어요. 집에서도 사회에서도 쫓겨나고 갈 데도, 능력도 없었고 ‘인형의 집’을 뛰쳐나온 노라처럼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살고 싶었어요. 가정을 깨고 나온 노라가 그때는 신여성의 대표격이었거든요.”

하지만 이혼한 이유에 대해서는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혹독한 시집살이’가 아니었다고 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됐지만 시댁의 경제적인 사정 때문이었고, 이 사실을 밝히지 않고 욕먹는 것을 감내해왔다.

“아마 상상도 못할 거예요. 전시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하고 전혀 달라요. 일제 말기에 시집살이가 힘든 일이겠어요? 부모가 하라는 대로 살다가 결혼하면 시집에서도 그러려니 하고 사는 거죠. 전쟁 보상금 때문에 말 못할 사정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결혼도 약속이니까 지키지 못해 욕먹는 것도 참았는데, 친정에서도 쫓겨날 지경이 되니 마음에 상처가 컸어요. 세상에 내가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겠다 싶었죠. 사람 일이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그래서 지금의 노라노가 있기도 한 거니까요.”

지금의 시각에서도 시대에 뒤처진다거나 어색한 느낌 없이 여전히 아름다운 노라노의 의상들. 한국 최초의 패션쇼, 최초의 기성복 브랜드 론칭, 최초의 일반인 모델 기용 패션쇼 등 그녀가 만들어온 패션계 최초의 기록이 무수하다.

지금의 시각에서도 시대에 뒤처진다거나 어색한 느낌 없이 여전히 아름다운 노라노의 의상들. 한국 최초의 패션쇼, 최초의 기성복 브랜드 론칭, 최초의 일반인 모델 기용 패션쇼 등 그녀가 만들어온 패션계 최초의 기록이 무수하다.

1947년, 도망치듯 미국 유학길에 올라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공장에서 미싱을 돌리며 주경야독을 했다. 군정청 파티 때 직접 만들어 입은 의상이 ‘히트를 쳐서’ 해군 고위 관직자들에게 추천을 받은 것이다. 틈만 나면 옷 스케치를 하며 놀고 열두 살 때부터 옷을 해 입던 노라노의 안목은 최초로 양장을 입은 신여성, 어머니의 영향이기도 했다.

“달러 송금도 안 될 때라 일하면서 공부할 수 있도록 제게 특별 비자를 만들어주셨어요. 나중에 영사관께 감사 인사를 드리니까 ‘나한테 빚진 건 하나도 없다. 성장하는 걸 보는 동안 참 행복했다. 빚이 있다고 생각하면 다음 세대에 갚아라’라고 하셨죠. 그래서 제가 50명이 넘는 유학생이 비자를 낼 수 있도록 도와줬어요.”

사람이 좋고 옷이 좋아 했을 뿐
눈썰미와 손재주가 좋고 무엇보다 사람을 좋아하는 노라노에게 패션 디자이너는 천직이었다. 기회가 닿을 때마다 외국에 나가 패션쇼를 보고, 만져보고, 옷을 사서 분해해보고, 영감을 주는 것들을 늘 가까이 했다. 책으로만 배울 수 없는 것, 늘 새롭지 않으면 뒤처지기 쉬운 것이 패션의 세계였다. 2년의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무렵, 고국은 다시 전쟁에 휘말리기 직전이었다. 친구들이 말렸지만 노라노는 미국이라는 기회의 땅에 등을 돌렸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노라노는 피난민들의 시름을 달래던 쇼 의상을 디자인하고 끊임없이 일을 했다.

“공짜는 아무것도 없어요” 1세대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

“공짜는 아무것도 없어요” 1세대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

“미국은 제가 살 곳이 아니었어요. 배운 게 있으니 당연히 돌아가서 일해야 한다고 생각했고요. 전쟁이 터진다는데, 죽음을 무릅쓰고 돌아왔으니 딴 길을 갈 수 없었죠. 성공하려고 한 게 아니라 단지 좋아서였어요. 사람도 좋아하고 옷도 좋아하고 입는 것, 입히는 것 다 좋아해요. 그렇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고요. 어떡하면 사람들에게 더 좋은 옷을 입힐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살았다는 건 축복 아닐까요? 60년 동안 계속했다는 건 사람들이 제 옷을 사줬다는 거니까요.”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전쟁의 와중에서 부산에서는 ‘여성 국극’이라는 국악 뮤지컬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일본에 ‘다카라즈카’라고 여성들끼리 연기하는 극단이 있었는데 그걸 한국식 국악 뮤지컬로 바꾼 것이 여성 국극. 임춘앵이라는 당시 최고의 스타에게 노라노는 ‘한 땀 한 땀’ 의상을 만들어 입혔다. 전쟁이라 물자가 귀하니 맥주 깡통을 오리고 담뱃갑 안의 은박지로 반짝이는 의상을 만들곤 했단다.

“초창기에는 고객이 드물기도 했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걸 좋아해서 공연이나 영화 의상을 많이 했어요.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1956년에 프랑스 파리에 가서 패션쇼를 봤어요. 쿠튀르 의상은 우리하곤 거리가 멀어 이걸 어떻게 가져가야 할까, 고민이 많았죠. 파리에서는 디테일을 많이 배웠어요. 비싼 옷을 사가지고 와서 다 분해해서 보는 거죠. 제 옷이 가격에 비해서 고급스럽게 보인 비결은 디테일에 있었어요.”

“공짜는 아무것도 없어요” 1세대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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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산업이 발전하고, TV가 차츰 보급되면서 배우들은 앞다퉈 노라노의 의상을 입겠다고 했고, 제작자들은 허리띠를 졸라매며 난색을 표했다고 한다. 최은희, 김지미, 조미령, 문희 등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과 패셔니스타 윤복희가 그녀의 단골이었고 지금까지도 ‘절친’으로 지내고 있다. 하지만 노라노에게 최고의 뮤즈는 배우 엄앵란이라고.

“앵란씨가 갓 데뷔했을 때 ‘단종의 서’에 제 옷을 입고 나와서 스타가 됐잖아요. 헵번 스타일의 우아한 의상이 제 작품이었죠. 최은희는 카리스마가 독보적인 여배우였어요. 몸이 불편한데도 얼마 전 제 영화 시사회 때 와서 눈물을 쏟고 가더라고요.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지금이야 배우들 몸값이 어마어마하지만 당시엔 그렇지 않았거든요. 젊고 열정이 불같을 때였죠. 같이 밥이라도 먹으면 밥값을 못 내게 하고 패션쇼 하면 흔쾌히 모델로 서주고 그렇게 지냈죠.”

시대를 풍미한 윤복희의 미니스커트와 ‘펄 시스터즈’의 판탈롱 스타일링도 그녀의 작품. 윤복희와는 하와이에서 처음 만나 친해진 후로 지금도 막역하게 지내고 있다.

“하와이에 패션쇼를 하러 갔는데, 그 호텔에서 마침 윤복희가 공연을 했어요. 신문 기사를 보고 반가워서 인사를 나눴죠. 나중에 귀국해서 의상을 부탁하러 찾아왔더라고요. 쇼 의상을 많이 만들었는데 그중에서도 앞은 미니고 뒤는 긴 스커트가 기억에 남아요. 그걸 입고 노래하는 장면이 무척 좋았어요.”

1 노라노의 60주년 패션쇼를 찾은 왕년의 스크린 히로인들. 2 요즘 가장 각광받는 톱모델들이 노라노의 의상을 재해석하는 시간도 가졌다. 3 60주년을 기념해 특별히 제작한 노라노의 스카프.

1 노라노의 60주년 패션쇼를 찾은 왕년의 스크린 히로인들. 2 요즘 가장 각광받는 톱모델들이 노라노의 의상을 재해석하는 시간도 가졌다. 3 60주년을 기념해 특별히 제작한 노라노의 스카프.

일하는 여자를 위한 옷
한편 기성복 시장이 점차 커지면서 스타들의 자리를 일반 고객들이 채우기 시작했다. 패션 디자이너라고 하면 화려한 스타일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노라노는 한결같이 시크한 블랙 룩을 고수한다. 자신이 일하는 여성이었기에 노라노는 일하는 여성을 위해 심플하면서도 우아하고 활동성이 뛰어난 옷들을 디자인했다.

“패션이 예술이라고요? 샤넬 정도 되면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샤넬 재킷은 오늘날까지 입을 수 있잖아요. 옷은 무엇보다 실제로 입을 수 있고 여성의 생활과 가까워야 해요. 예술품인 사람을 보조하는 것이 옷이라고 생각해요. 디자이너는 패션쇼 무대에서 인사할 때 빼곤 우아하거나 화려하지 않아요. 노동자인 동시에 장인이지요. 유학 시절 선생님께서 시간을 쪼개 일하고 손마디마다 굳은살이 박여야만 일류 디자이너가 된다고 하신 말씀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요. 저도 하도 가위질을 해서 손마디가 다 튀어나오고 어깨 인대는 늘어났어요. 블랙을 선호하는 이유도 정작 따로 있어요. 일하느라 바쁜데 언제 옷 색깔을 맞춰 입어요?”

“공짜는 아무것도 없어요” 1세대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

“공짜는 아무것도 없어요” 1세대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

‘한국의 코코 샤넬’이란 호칭에는 어림없다고 휘휘 손을 내저으면서도 “내 옷이 편하고 좋아 굳이 명품을 사 입지 않는다”라는 그의 말에는 짙은 자부심이 배어 있다. 하이힐만 고집하던 젊은 시절만큼은 아니지만 아침마다 속눈썹을 붙이고 곱게 아이섀도를 바른 자태는 절대 나이를 짐작하기 힘든, 천생 디자이너다.

“구태여 남 앞에서 제 일을 얘기하지 않은 이유도, 예전엔 워낙 먹고살기 힘들었잖아요. 패션은 사치품이라는 인식 때문에 조용히 일만 하며 살았죠. 그런데 60년을 하다 보니 지금은 우리나라도 패션계가 커지고 디자인에 대한 인식도 많이 달라졌어요. 환경은 좋아졌지만 브랜드와 자본의 싸움이 됐죠. 어쨌거나 시대의 흐름을 읽는 안목과 취향이 가장 중요해요. ‘사치의 반대말은 빈곤이 아니고 취향 없음’이라고 하잖아요. 과하게 입어서 옷이 사람을 가려도 안 돼요. 자기가 뭘 입으면 빛이 나는지 아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멋쟁이예요.”

“공짜는 아무것도 없어요” 1세대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

“공짜는 아무것도 없어요” 1세대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

노라노는 누가 무얼 입건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어떤 순간에도 옷이 아니라 사람이 먼저 보여야 하니까. 베스트, 워스트를 꼽고 평점을 매기느라 바쁜 이들하고는 확연히 다른 관점이다. 패션 기자 출신의 스타일리스트 서은영이 찾아와 60주년 기념 패션쇼 기획을 자청하고, 다큐멘터리 감독이라는 이들이 찾아와 자신을 찍겠다고 했을 때도 썩 달가워하지 않았다. 평생 옷만 만들어온 자신의 삶을 생전에 조망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는 주변의 설득으로 카메라 앞에 섰고, 지금은 쏟아지는 인터뷰와 관심에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내 얘기를 세상에 내놓는 건 어떻게 보일지도 모르고 맘먹기 어려운 일이에요. 어느 날 젊은 친구들이 찾아왔는데, 열정적이고 순수하더라고요. 크게 잘못되지는 않겠다고 느꼈어요. 우리 조카가 말하길, 제가 세상을 떠나면 누군가는 꼭 영화를 만든다는 거예요. 기왕이면 살아생전에 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해서 결정했어요. 근데 다 찍고 보니 더 젊고 예쁠 때 찍을 걸 그랬나, 하고 아쉽기도 하고(웃음).”

그녀의 삶을 통해 한국 패션사의 흐름을 담아낸 ‘노라노’는 오는 11월 20일부터 열리는 암스테르담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하며 더욱 화제를 모으고 있다.

맨입으로 되는 게 있나요?
60년이 넘도록 하루 9시간을 일할 수 있는 건강과 날씬함의 비결은 명쾌했다. 열심히 몸을 움직여 일하고 시간을 내 운동을 하며 욕심이나 스트레스 없이 단순하게 사는 것이다. 말은 쉽지만 한결같이 그렇게 사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일 시작할 때 허리가 22인치였는데 60년이 지난 지금은 26인치예요. 맨입으로는 안 되지(웃음). 젊었을 때는 파티나 댄스홀 가서 춤추는 게 운동이었어요. 워낙 운동신경이 좋은 편이었거든. 50이 넘어가면서는 1주일에 한 번씩 등산을 했고요. 15년 정도 했지. 요즘은 매일같이 운동해요. 아침에 일어나서 커피 마시고 공원에 가서 45분간 걸어요. 도산공원을 세 바퀴쯤 돌고, 퇴근 후에는 실내 자전거 타고 팔운동 하고요. 엎드려서 하는 일이라 어깨에 부담이 많이 가서 매일 관리를 해요. 근데 이보다 더 중요한 건 마음의 자세예요. 욕심을 버리는 게 건강의 비결이죠. 욕심이 생기면 스트레스가 쌓이고 그게 병이 되니까. 저는 돈에 관해서는 일절 관여하지 않고 옷 만드는 데 전념하죠. 산다는 건 생산적으로 노력하는 거예요. 놀고먹는 건 죽기를 기다리는 거나 다름없어요. 잘 살기 위해서는 건강도 중요하고 젊은 사람들하고 어울리면서 시대 감각도 잃지 않으려 해요.”

노라노는 1990년 중반에 접어두었던 미국 진출을 다시 준비하고 있다. 예전과 모든 면에서 달라진 패션계는 총성 없는 전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찌 보면 패션 한류의 선구자인 노라노도 겸허한 자세로 준비할 수밖에 없는 건 대중은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국내 시장에 집중하면서 해외에 나갈 준비를 늘 하고 있었죠. 30년간 세계를 돌면서 마케팅을 하고 어떤 제품을 얼마에 팔아야 하는지를 봤으니까요. 이렇게 보고 있으면 흐름이랄까, 같은 방향으로 가는 게 있더라고요. 1980년대에 미술 책을 사다가 프린트 모티브를 보고 작업했는데 입생 로랑도 같은 시기에 비슷한 프린트를 쓴 걸 봤어요. 패션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큰 흐름은 같이 가는 것 같아요. 워낙 요즘은 뭐든 실시간이니까 음악이나 드라마처럼 패션도 한류를 일으킬 때가 아닐까요?”

60년의 세월과 영화가 묻어나는 얼굴을 찬찬히 보면서 정말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얼굴에 보인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러니 앞만 보고 달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란 생각이 든다. 패션에 대한 관심을 떠나서, 그의 삶은 한 번 귀 기울여 들을 만한 이야기다.

“오랫동안 열심히 살아온 것을 요즘 보상받는 게 아닌가 싶어요. 화면에 나온 제 모습을 보면 좀 부끄럽기는 해도, 젊은 관객들이 많이 와서 봐줬으면 좋겠네요.”

Mini Interview
“극장에 치맛바람 일으켰으면”
영화 ‘노라노’ 연출한 김성희 감독


“공짜는 아무것도 없어요” 1세대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

“공짜는 아무것도 없어요” 1세대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

영화 ‘노라노’를 만든 ‘연분홍치마’는 독립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팀이다. 주로 여성과 성소수자의 이슈를 다룬 작품을 만들었고, 지난해 용산 참사를 다룬 ‘두 개의 문’을 내놓은 데 이어 올해 ‘노라노’를 선보인다.

연분홍치마는 치열하고 사회운동 성향의 작품을 꾸준히 만들어왔다. 이번 작품은 어떤 의미에서 하게 된 것인가? 의외의 작품이라는 평을 종종 듣는다. 아마도 상류층의 여성이나 패션이라는 소재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이번 작업도 여성주의 문화 활동을 해온 연분홍치마의 맥락에서 ‘역사 쓰기’라는 공통의 문제의식을 지닌다. 그간 여성의 역사 쓰기가 가져온 한계에 질문을 던지고 고민해보고 싶었다. 계급뿐 아니라 젠더(사회적인 성) 측면에서 여성의 역사를 재평가하고 의미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작업을 하면서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라는 위치만큼이나 여성으로서의 삶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당대의 삶을 지키고 버텨온 여성의 경험을 당신의 목소리로 반추하고 서술함으로써 ‘여성의 역사 쓰기’를 시도하고자 했다.

“공짜는 아무것도 없어요” 1세대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

“공짜는 아무것도 없어요” 1세대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

노라노 선생님과는 세대 차이가 크고 공유하는 정서가 달라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다. 아무래도 다른 시간과 공간을 살아온 만큼 낯선 순간들도 있었다. 내가 평생에 걸쳐 강남에 간 횟수보다 작업을 진행하며 그곳에 들락거린 횟수가 더 많았을 만큼 낯선 공간과 세계였다. 세대가 다른 누군가의 기억과 경험을 추려내고, 의미화하고, 담아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리고 선생님이 평가받고 싶은 부분과 우리가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부분이 달랐다. ‘패션 디자이너’가 아닌 ‘여성’의 삶에 주목하는 제작진에게 서운해하신 적도 있고.

시사회를 보고 나온 일반 여성 관객들의 반응이 궁금하다. 세대별로 참으로 다양한 반응을 접했다. 미래를 상상하는 데 좋은 힘을 얻기도 하고, 과거를 추억하느라 애틋해지기도 하는 것 같았다. 특히 일을 하는 여성 관객들에게 많은 응원을 받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직업 세계에서 여성으로서 지녀야 하는 긴장감에 ‘격하게’ 공감해주기도 하고, 그 긴장감 넘치는 세계에서 60년을 넘게 버텨온 노라노 선생님의 시간에 눈물 흘리기도 했다.

용산 참사를 다룬 전작 ‘두 개의 문’이 관객 7만 명을 넘어선 걸로 아는데, 이번 영화의 개봉 목표는 무엇인가? ‘노라노’가 여성 영화의 새로운 붐을 일으킬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특히 독립영화 관객으로서는 드문 중·장년층 여성 관객들을 많이 만날 기회를 마련하고자 한다. 10월 31일 개봉인데, 극장에서 ‘치맛바람’을 일으킬 수 있도록 노력 중이다.

■글 / 위성은(객원기자) ■사진 / 원상희 ■사진 제공 / 시네마달, 연분홍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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