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코 시리즈’는 옆 나라 일본에 살고 있는 아이코(愛子)란 이름을 가진 여성들을 인터뷰하며 ‘여성이란, 여성의 삶이란 무엇인가’의 의미를 찾는 기획 기사다. 일본의 다양한 세대와 계층의 삶을 따라가보며 한국과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발견하고 그들을 통해 나의 삶을 되돌아본다. 이번 호에는 자신도 지진으로 가족을 잃었지만 좌절하지 않고 피해를 입은 환자들을 구조한 간호사 아이코를 만났다.
동일본 대지진, 일본에선 ‘3·11’로 통용된다. 미국 ‘9·11’에 버금가는 재해이자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지상 최대, 최악의 테러로 세계무역센터가 마치 종잇장처럼 무너지던 그 기억, 믿을 수 없는 역사의 현장이었다. 3·11도 그러했다. 2011년 3월 11일 여느 날과 다름없이 해가 떴고, 또 나른한 오후였다. 오후 2시 26분 18초, 미야기 현 오시카 반도 동남쪽 130km 지점에서 일본 관측 사상 최대 규모인 9.0의 지진이 발생했다. 이윽고 해일이 밀려들었다. 빠른 곳은 지진 직후 해일 도착까지 20여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 판단의 여지는 주어지지 않았다. 이 지진과 해일로 1만8천여 명이 사망 및 행방불명됐고, 수십만 명이 고향을 등져야 했다.
그로부터 2년 반이 흘렀다. 그러나 지진으로 인한 피해 복구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무려 31만 명이 전국 각지에 뿔뿔이 흩어져 생활하고 있다. 그중 10만 명이 가설 주택에 살고 있다. 피난 생활로 인한 스트레스와 체력 악화 및 과로로 작년 8월 시점에서 약 3천 명이 사망했다. 후쿠시마 지역에선 오염수가 매일 3백 톤씩 나오고 있고, 오염 제거 작업을 해도 그때뿐, 금세 방사능 수치는 허용 범위보다 높게 검출되고 있다. 2020년 올림픽 유치 현장에서 아베 총리는 원전 오염수가 ‘언더 컨트롤’되고 있다고 말했지만 과연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일본인 모두가 의심하고 있다.
여전히 지진 복구 작업이 한창인 미야기 현 이시노마키에 살고 있는 아이코를 만났다. 이시노마키 적십자병원 김 아이코(59) 부원장 겸 간호부장은 3·11 당일, 병원에 근무 중이었다. 그녀 역시 지진으로 남편을 잃었다. 그럼에도 환자들을 돌본 김 부원장에게 올해의 나이팅게일상이 수여됐다. 나이팅게일상은 국제적십자사가 주최하는 상으로 사랑과 봉사로 간호를 실천한 간호사를 표창한다. 김 아이코 부원장을 통해, 3·11 동일본 대지진이 일본에 남긴 흔적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그녀가 태어난 해, 1954년
김 아이코는 1954년에 태어났다. 일본에선 유달리 영화와 관계가 깊은 해였다. 영화 ‘고질라’가 개봉된 해였고, 세기의 섹스 심벌 마를린 먼로와 남편 조 디마지오가 일본을 방문했다. 한국전쟁으로 전쟁 특수를 얻어 마쓰시타 전기가 첫 전기 청소기를 내놓았고, NHK의 지방 방송국들이 문을 열었다. 3·11 동일본 대지진으로 큰 피해를 남긴 원전 운전이 시작된 것도 같은 해다. 일본이 아니라 러시아에서 원자력발전소가 세계 최초 가동을 시작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녀는 그런 해에 태어났다.
이름에 ‘김’자가 들어가서 한국인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을 듯해요.
자주 받는 편이에요. 남편 성이 ‘김’이에요(일본은 결혼하면 부부가 성을 하나로 통일시켜야 하는데, 주로 남편 성을 따른다). 남편이 스님이에요(일본 불교는 종파에 따라 다르지만 승려도 대부분 결혼을 한다). 오랫동안 절을 운영하고 관리해온 집안으로 성이 ‘김’이에요. 재일동포는 아니고요.
어릴 때부터 꿈이 간호사였나요?
아뇨. 특별히 미래의 어떤 직업에 대한 동경은 없었어요. 그냥 평범하고 소심한 아이였어요. 농가에서 느긋하게 자랐어요. 부모님이 직접 기른 걸 먹으며 두 남동생과 함께.
간호사를 선택하게 된 계기는요?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일본은 경제 성장기였어요. 자립을 하려면 자격증을 따는 게 유리했고, 교사와 간호사 중에서 간호사의 길을 걷기로 했죠. 간호사가 된 친구가 있어서 대충은 알고 있었어요. 저도 망설이지 않고 간호학교에 입학했지요.
1950년대 중반까지 일본인의 절반 이상이 농업 등 제1차 산업에 종사했다. 특히나 여성의 경우, 60% 이상이 부모나 남편을 따라 농업에 종사했다. 그러나 그들의 자녀들은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50년부터 3년간 한국전쟁 특수를 맞은 일본은 고도의 경제 성장기에 접어들었고, 산업구조가 제1차 산업에서 제2차 산업으로 옮겨가며 섬유에서 철강, 기계 산업에 중점을 두는 등 크게 변화했다. 도시로 인구가 몰려들었고, 샐러리맨이 급증했다. 장기고용, 연공서열, 임금체계, 기업 내 조합 등 일본 특유의 고용 관습이 보급, 정착했다. 1970년대에는 여성의 고교 진학률이 상승했고, 도시 인구 집중과 샐러리맨 증가로 인해 그들의 아내가 되는 가정주부 또한 급증했다. 1970년대 일본은 20, 30대 여성의 대부분이 가정주부였고, 출산과 육아를 끝낸 30대 후반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매우 활발히 이뤄졌다. 후생노동성은 세탁기 보급이 여성들의 사회 진출을 적극적으로 도왔다고 분석한다. 1957년에 20%이던 세탁기 보급률이 1970년에는 91%까지 치솟자, 빨래에서도 육아에서도 어느 정도 해방된 여성들이 집 밖으로 활동 범위를 넓힐 수 있었던 것이다.
3·11 동일본 대지진, 남편을 잃고 환자들을 구하다
미야기 현 이시노마키 시는 기타가미 강 하구에 위치하며, 태평양과 근접해 예부터 수운 교통의 요지였다. 난류인 구로시오 해류와 한류인 쿠릴 해류가 만나는 세계 3대 어장 중 하나로 일본 유수의 수산 도시다.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 첫 해일은 10cm였다. 3시 26분 8.6m의 해일이 몰려들었다. 바다로 둘러싸인 이시노마키 시는 일부 언덕과 산을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이 해일 피해를 입었다. 인구 16만 명인 이시노마키에서만 무려 약 3천2백 명이 사망했고, 약 7백 명이 행방불명됐다. 동일본 대지진 최대 피해 지역이다. 당시 피해에 대해 현지 신문은 이렇게 적고 있다. ‘땅이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건물이 심하게 흔들렸다. 방에 있던 어부가 뒤늦게 밖으로 뛰어나왔다. 바위가 무너지고, 한 여인이 소리 질렀다.’, ‘원전에서 반도중앙부 관광도 코발트 라인까지 남은 집은 한 채도 없었다. 담요를 덮은 시체 앞에서 합장했다’ (3월 15일자). 유치원 스쿨버스가 해일에 쓸려가 원아 5명이 사망했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처럼 느껴지는 아니, 지진도 해일도 믿을 수 없는 그런 하루였다. 그리고 이후로도 여진은 계속됐다.
이시노마키 적십자병원은 지진과 해일 속에서 다행히도 살아남았다. 8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병원으로 약 3백80명이 수용 가능하다. 지진이 일어났을 때 김 아이코 부원장은 근무 중이었다.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일반 진료를 정지하고, 구급 환자 대책으로 병원 태세를 재빨리 바꿔야 한다는 생각만이 앞섰다.
저는 회의 중이었어요. 3월 9일에 규모 5의 지진이 있어서 미야기 앞바다에 지진이 일어난 줄 알았어요. 입원 환자가 3백 명쯤 있었어요. 뭔가 큰 게 왔다는 직감과 동시에 긴급 구호 상태에 돌입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어요. 재해 레벨을 최고 수준으로 올리고, 재해 피해자 대책으로 병원 태세를 바꿨어요.
사전에 그런 연습을 해두었나요?
네. 지진과 해일을 비롯한 다양한 재해가 일어났을 때 인명 구조를 위해 병원 태세를 바꾸도록 매뉴얼을 만들고 재해 대책 훈련도 하고 있어요. 매달 연수회를 열고, 1년에 1회씩 소방서와 자위대와 함께 대대적인 훈련도 해왔죠. 그날은 이 훈련에서 했던 것과 똑같이 1시간 만에 병원 태세를 긴급 구호가 가능한 병원으로 바꿨습니다.
도망가야겠단 생각은 들지 않았나요?
환자들도 입원한 상태고, 지진과 해일로 다친 사람들이 들이닥칠 것을 생각하면 제 안전 따위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어요. 재해 대책 마련을 해야겠다는 의무감뿐이었어요.
여진도 계속됐는데 어떤 심정이었는지요?
지진은 계속되고 환자는 점점 증가하고, 매뉴얼만으로는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도 있었어요. 다행히 전국 적십자병원의 도움으로 버텨낼 수 있었죠. 지진 첫날은 평소와 비슷하게 약 60명의 구급 환자가 실려 왔어요. 그 다음날부터 환자가 크게 늘었죠. 둘째 날은 7백90명, 셋째 날은 무려 1천2백50명이 병원에 실려 왔어요. 이런 상태가 1주일쯤 계속됐죠. 이시노마키의 다른 병원들이 해일로 큰 타격을 받아서 모든 피해자를 저희 병원에서 받아야 했고, 오는 환자는 100% 다 받았어요.
평소 때의 20배가 넘는 환자들로 넘쳐나는 병원은 마치 야전병원 같았다. 구급 환자들의 목숨을 구하는 동안 그녀의 집은 해일에 휩쓸렸다. 남편이 걱정됐지만 눈앞의 환자를 생각하면 병원을 떠날 수 없었다. 지진이 일어난 날은 병원 바닥에서 밤을 지새웠다. 상황이 안정돼 남편을 찾아봤지만,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시체 안치소를 다 돌아도 남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2011년 4월 1일, 남편을 찾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절 경내의 무너진 건물 아래서 발견된 남편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남편도 끝까지 사람들을 위해 경전을 읽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애도할 시간조차 부족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을 살려야 했다. 황급히 병원으로 돌아가 부상을 입은 사람들을 치료했다. 김 아이코 부원장의 헌신은 전 세계 언론을 타고 전해졌고, 올해의 나이팅게일상을 받게 된 것이다.
나이팅게일상을 받은 소감은 어떤가요?
저보다 더 활약하신 분들이 많은데 제가 받게 돼 쑥스러워요. 제가 그분들의 대표로 상을 받았다고 생각하려고요. 남편에게도 그렇게 전해주고 싶어요.
둘째 아드님도 간호사가 됐다던데, 어머니를 본받았나보군요.
되려고 해서 된 게 아니고, 들어갈 수 있는 학교의 커트라인이 간호사가 되는 길이었어요(웃음).
삶의 해답은 오로지 열심히 사는 것
삶과 죽음의 현장에서 느끼신 삶의 의미란 무엇일까요?
지진을 경험하고 알게 된 사실이 많아요. 먼저 삶과 죽음은 정말 한순간이라는 점이에요. 그리고 누군가는 대피해서 살아남았는데 가족이 걱정돼 찾아다니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어요. 인간의 본능인 삶에 대한 욕구보다 더 위대한 사랑도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저는 운이 좋았던 것이 병원이 높은 지대에 있기도 했지만 현장에서 서로를 돕는 사람들이 곁에 있었다는 거예요. 살다 보면 서로가 서로를 열심히 도와야 함께 살아남을 수 있는 그런 순간들이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변해도 무척 많이 변했어요. 가족이 줄었고, 지진 이후 타 지역으로 떠난 직원들도 있어서 직원도 많이 줄었어요. 제 자신은 좀 외로워요. 저희 집이 해일에 잠겼기 때문에 전혀 사용하지 못하다가 요즘은 2층은 사용할 수 있게 돼서 집에서 혼자 지내는 시간이 생겼는데, 많이 적적하죠.
남편은 어떤 분이셨나요?
제가 출산 후에도 계속 일할 수 있도록 도와준 가정적인 사람이었어요. 두 아들을 남편이 많이 봐줬어요. 제가 야근이 있는 날은 꼼짝없이 아이들을 돌봤지요. 아이들도 저를 많이 도와줬고요. 건강하게 자라준 덕에 제가 일을 할 수 있었던 거죠.
끝으로 바라는 게 있다면요?
이 절망과 고통을 꼭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그 지진과 해일이 어떤 것이었고, 어떤 피해를 주었는지 잊지 않기를. 도쿄가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된 데 대해 부정적인 의견도 있는데, 올림픽을 통해 피해지를 다시 한번 돌아보는 그런 계기가 됐으면 좋겠어요.
3·11 동일본 대지진, 그 여파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충격이었다. 원전 사고가 언제 수습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필자가 겪은 바로는 ‘무섭다’, ‘두렵다’라는 단어의 차원을 넘어선, 어떤 본능적인 두려움이다. 머릿속은 그저 멍한 상태로 눈물밖에 나지 않는… 그래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 기적에 감사하며 살아가야 한다. 김 아이코 부원장처럼 슬픔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땅에 얼마나 많은지, 과연 헤아릴 수 있을까.
■기획 / 이유진 기자 ■글 / 김민정(일본 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