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버려지고 핍박받는 사람들을 연기한 사사키 아이
지난 11월 초, 가네시로 가즈키의 자전적 소설 「GO」가 연극 무대에 올랐다. 극단 분카자(도쿄 기타구)의 사사키 아이(70) 대표는 “이 작품을 통해 재일동포를 생각하는 계기를 갖고 싶었다”라고 밝혔다. 극단 분카자는 1942년 사사키 대표의 양친인 연출가 고 사사키 다카시와 여배우 고 스즈키 미쓰에가 결성한, 무려 71년이나 된 원로 극단이다. 분카자는 오키나와와 홋카이도의 소수 민족이 겪는 불평등한 현실을 무대에 올려왔다. 일본 사회에서 잊힌 사람의 삶을 조명해온 극단이다. 극단 대표 사사키 아이는 NHK영화상 최우수 여우주연상, 일본 문화청 예술상 우수상, 홋카이도 구라시키 시민극장 여배우상, 기노구니야 연극상 등을 수상한 유명배우다. 무대 위에서 그녀는 가난한 농부의 딸, 짝사랑하던 청년을 전쟁으로 잃은 여인, 부족에게 버려진 노파 등 가난하고 힘없는 여성들을 대변하는 역을 연기해왔다. 무려 50여 년간 이 세상의 ‘약자’를 연기해온 배우의 속내를 살짝 들여다보았다.
![[일본 통신원 김민정이 만난 열두 명의 아이코]무대 위에서 비차별과 평화를 연기하는 연극배우 사사키 아이](http://img.khan.co.kr/lady/201312/20131204162306_1_201312_lady_444.jpg)
[일본 통신원 김민정이 만난 열두 명의 아이코]무대 위에서 비차별과 평화를 연기하는 연극배우 사사키 아이
어릴 적 꿈이 배우였나요?
아니요. 의사가 되고 싶었어요. 부모님이 극단을 하고 계셔서 감히 제가 그 무대에 서리라곤 상상도 못했어요.. 초등학생 시절에 발레를 배웠어요. 발레 공연은 해봤는데, 연극 무대는 쑥스러웠어요.
어떻게 배우가 됐나요?
고등학교를 마치고 우연히 주변에서 연기 한번 해보라는 얘기를 듣고 시작했어요. 그런데 실제로 해보니까 정말 재미있었어요. 완벽한 무대를 만들기 위해 의기투합해 성실하게 노력하는 모습이 참 좋아 보였고, 그런 모습을 보면서 크게 감동을 받았죠. 처음엔 힘들었는데, 이런 고생이라면 사서라도 해야겠단 생각이 들 정도로 연극 무대의 매력에 푹 빠졌지요.
그 후 계속 연기를 해온 건가요?
네, 연극의 매력에 압도됐어요. 수많은 사람이 힘을 모아 감동을 생산하는 일이에요.
지금까지 맡은 배역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배역은 어떤 것인가요?
모두 기억에 생생히 남아요.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땅’이란 연극이었어요. 연극과 함께 TV 드라마로도 방영된 작품이에요. 메이지 시대의 가난한 소작농 가족 이야기로 1962년 작품이에요. 저는 소작농의 큰딸 역을 연기했어요. 열심히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차별을 받는 상황을 그렸죠.
당시에 인기가 굉장했지요?
네, 그 연극과 드라마를 본 뒤 팬이 돼주신 분들이 계세요. 그때 그분들이 계속 제 연극을 관람해주고 계시죠. 화려함은 전혀 없는 매우 소박한 연극이었는데, 박수가 끊이지 않을 정도로 반응이 좋았어요. 그때는 왜 그렇게 인기가 많은지 저는 잘 이해하지 못했죠. 당시 일본은 고도 경제성장기였어요. 그렇지만 여전히 못사는 사람도 많은 시절이었어요. 민주주의, 자본주의라고는 하지만 그 은혜를 입은 사람은 일부일 뿐이에요. 그 뒷면에 봉건주의가 자리해 있죠. 연극은 메이지 시대 이야기지만 그 연극을 보고, 당시 고도 경제성장기 일본의 단면으로 받아들인 관객이 많았던 거예요.
지금과 같은 상황이군요.
네, 안타깝게도.
늘 사회에서 배척당하는 약자를 연기해오셨는데, 어떤 이유에서인가요?
부모님이 1942년에 극단을 결성하신 뒤 일본 내 활동이 어려워져서 만주로 가셨어요. 이후 일본에 돌아온 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년이 지나서였어요. 전쟁이 끝나고 모든 가치관이 바뀐 현실을 눈앞에 두고 부모님은 보편적인 인생의 가치를 생각하신 거죠. 그러다 보니 사회의 약자에 관심을 갖게 됐고 연극을 통해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기 시작했어요. 그런 부모님의 영향으로 저도 사회의 저변에 있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펼쳐가게 된 거예요.
1943년 사사키 아이 대표가 태어난 해, 일본은 이미 패전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해 1월 뉴기니 섬에서 일본군은 전멸당했고, 과달카날 섬, 키스카 섬에서 차례차례 철수했으며, 미국의 공습은 점점 강도를 더해왔다. 그해 9월 우에노 동물원은 폭격으로 동물원으로서 제구실을 못하게 됐고 도망간 동물들이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칠까봐 맹수와 독사를 독살하고 위령제를 지냈다. 전쟁은 이미 끝을 보이고 있었다.
연극을 통해 한국과 두 손을 맞잡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패배로 끝난 뒤, 전쟁의 가해자였던 일본은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신이었던 일왕이 인간임을 인정했고, 적이었던 미국이 동맹국이 됐다. 아시아만 바라보던 일본이 미국을, 유럽을 동경하기 시작했다. 어제와는 다른 오늘이 펼쳐지는 가운데 극단 분카자는 급변하는 정세와 민심에 위화감과 괴리감을 느낀다. 일본 사회의 밑바닥을 사는 서민들을 주인공으로 사회의 현실을 조명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만주에 억류됐던 경험을 통해 전쟁을 주제로 한 연극도 적극적으로 상연했다. 1947년에는 우리 판소리 문학인 「춘향전」을 무대에 올렸다. 춘향 역은 분카자를 대표하는 배우이자 사사키 아이의 어머니인 스즈키 미쓰에가 맡았다. 사사키 아이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침략 전쟁에 대한 반성도 없고 만연하는 구미 문화 풍조를 걱정하던 아버지가 한국을 생각해 ‘춘향전’을 상연했다.” 아버지의 조수 중에 재일동포가 있었던 것도 ‘춘향전’을 택하는 계기가 됐다.
1947년에 어머니가 연기했던 춘향 역을 1972년에 맡으셨는데, 극단 30주년 창립행사로 ‘춘향전’을 상연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때는 일본이 한국을 잘 모르던 시기였어요. 한국을 제대로 소개하기 위해 ‘춘향전’을 상연하게 됐죠. 한국에 훌륭한 러브 스토리인 「춘향전」이 있음을 알리고 싶었고, 열녀의 이야기인 동시에 민중의 저항정신을 그리고 있다는 점도 어필하고 싶었어요. 변학도와 춘향의 대립은 탐관오리와 민중의 저항으로 읽을 수 있죠.
그 후 한국 관련 연극은 상연하지 않았는데, 오랜만에 올해 재일동포의 정체성을 그린 ‘GO’를 상연했습니다. 이번에 작품을 무대에 올린 소감은?
일본인들은 재일동포에 대해서 잘 모른 채 살고 있어요. 「GO」를 처음 읽었을 때 신세대 재일동포 소년의 삶을 이해하기 쉽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한국과 관련된 작품을 하고 싶었는데, ‘춘향전’ 이후로 못하다가 오랜만에 이 작품을 올렸죠. 관객 중에 “그동안 재일동포의 현실을 전혀 몰랐다”라는 분들이 많았어요. 그런 분들에게 재일동포에 대해 알릴 수 있어서 반가웠어요.
‘GO’의 주인공은 자신이 재일동포란 사실을 여자친구에게 밝히기를 꺼리는데, 재일동포가 자신의 민족정체성을 숨기고 살아야 하는 현실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일본인이 많이 미안해해야 합니다. 정치가가 전쟁의 책임을 지지 않고 사죄도 하지 않고 있어요. 그리고 한일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반한 시위며, 한국 차별 시위를 벌이고 있지요. ‘무지’는 차별의 근원입니다.

사사키 아이의 연극 스틸 사진들 오키나와 전투에 참여한 홋카이도의 소수 민족 아이누의 이야기를 그린 ‘은방울 떨어지는 주변에서-슈리 1945’. 눈먼 길거리 가수 이야기를 그린 ‘떠돌이 악사가 오지 않아’. 부족에게 버림받은 노파를 연기한 ‘두 명의 노파’. 춘향을 연기하는 사사키 아이. 1972년. ‘빨간 입술 지워지기 전에’의 한 장면.
한마디로 걱정이에요. 제가 고등학생 시절에 일본은 ‘60년 안보투쟁’을 했고, 그 후 ‘70년 안보투쟁’도 있었어요. 젊은이들이 미일조약에 반대한 움직임이었지요. 일본이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변화해야 하는지 누구나가 토론을 하던 시절이었어요. 시위를 통해 정부에 반대를 하던 시절이었죠. 그런데 지금 일본의 평화헌법이 개정될지도 모르는데, 분위기가 무척 냉랭해요. 다시는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깨려고 하는데, 아무도 뜨거운 논쟁을 하지 않는 현실이 걱정이에요.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식민지로 삼았던 일본의 전쟁사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요?
반성하고 사죄해야 합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힘들고 피곤한 건 바로 우리 자신이에요. 그럼에도 그런 점을 가르치지 않았어요. 일왕에게 반대하면 벌을 받는다는 하나의 가치관만 강조해왔죠. 지금과 같은 시대에 일본이 다시 전쟁의 길을 선택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발상입니다,
요즘 한일 관계가 썩 좋지 않은데 개선될 방법이 있을까요?
저는 젊었을 때 ‘한국’ 하면 김대중 납치사건부터 떠올렸어요. 그만큼 무서운 나라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실제로 가보고 나서 이미지가 크게 바뀌었죠. 되도록이면 서로가 친하게 지내고, 잘 모르는 부분을 이해하며, 마음을 전달해나가도록 노력해야죠. 사사키 아이란 인물을 통해 한국인이 일본인에 대해 갖고 있는 편견도 버릴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습니다.
전쟁 직후의 피폐함을 직접 체험했으며, 고도 경제성장과 1960, 70년대의 뜨거운 학생운동도 겪고 자란 일본 역사의 ‘산증인’ 사사키 아이는 과거 전쟁을 미화하고, 헌법을 개헌하려는 일본의 움직임에 따끔한 일침을 놓는다. 하지만 정치와는 별개로 양국의 교류는 계속돼야 한다는 게 그녀의 입장이다.
“예술가라면 다른 예술가가 가진 좋은 점을 존중하고 본받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정치적으로 한일 관계가 악화되더라도 교류는 계속해야죠. 작은 터널을 뚫어서라도 교류합시다. 작은 힘이 모이면 큰 힘이 될 테니까요.”
두 아이의 엄마이자 배우로서의 삶
거의 50년이나 배우로 살아왔는데, 배우를 계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연극 자체의 매력이지요. 연극은 배움의 산물입니다. 하나의 역이 주어지면 그 역할을 위해 공부해야 할 것이 무척이나 많아요. 시대적 배경이나 인물의 직업에 따라 견학할 곳도 많고 취재도 해야 하고, 책도 읽어야 하지요. 그런 과정이 매우 즐거워요.
배우이자 극단의 대표인데, 두 가지 일을 병행하는 데 어려움은 없나요?
별로요. 극단의 일은 분업으로 하고 있어서 큰 어려움은 없어요. 저는 배우 일을 더 좋아하지만요. 배우를 하듯 경영을 했다면 저희 분카자가 더 부자 극단이 됐을 텐데 말이죠(웃음).
두 아이를 키우셨는데, 그러면서도 일을 놓지 않으셨죠?
임신 6개월까지는 일을 했고 출산 후 3개월 만에 무대로 돌아갔어요. 그렇게 키운 아이들이 이제는 성인이 됐고, 손주도 셋이나 된답니다.
육아와 자녀교육에 대한 노하우가 있다면요?
제가 춘향 역을 연기할 때 재일동포 선생님에게 한국무용을 배웠어요. 그분이 무용을 가르치러 오실 때 젖먹이 아이를 데려오셔서는 강습전에 우아하게 수유를 하셨어요. 강습 중에도 아이가 울면 “잠시 기다려요”라고 말씀하시고는 매우 자연스럽게 수유를 하셨어요. 그런데 그 선생님의 그런 자태가 아주 곱고 우아하고 당당했어요. 그분한테 배운 건 춤사위뿐만이 아니었어요. 아이를 키울 때 엄마들은 아이가 울까 주눅이 드는 경우가 많아요. 무엇보다 당당하게 아이를 키워야겠단 생각이 번득 들었어요. 어깨를 펴세요. 엄마란 이유로 주눅 들 필요는 없어요.
무려 70년 이상 된 원로 극단의 70세 현역 원로배우 사사키 아이 대표는 솔직하고 담백하게 그리고 현명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오키나와 사람들, 홋카이도 소수민족 아이누, 재일동포 등 비주류·소수의 이야기를 무대에 올려 관객들에게 생각할 기회를 주는 것이 그녀의 ‘업’이다. 일본이 잊어버렸거나 뚜껑을 덮어버린 과거의 침략 전쟁을 아파하고 미안해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더불어 전하고 싶어 한다. 양심과 의식을 가진 ‘어른’으로 꿋꿋하게 서 있는 사사키 대표를 보니, 마음이 훈훈하고 든든해진다.
독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지난 한 해 동안 귀중한 지면을 빌려 일본에 살고 있는 여인들의 이야기를 전해왔습니다. ‘사랑’이라는 뜻의 ‘아이코’ 혹은 ‘아이’란 이름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대학생도 있었고, 나이가 지긋한 화가에 동일본 대지진으로 남편을 잃고도 지진 피해자를 위해 고군분투한 간호사도 있었습니다. 각자의 삶에 최선을 다해 임하는 태도는 일본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습니다. ‘일본’이란 전제가 있었지만, 인터뷰를 통해 만나온 여성들의 삶은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은 보편적인 삶이었습니다. 한일에 대해 이야기하면 ‘차이’부터 찾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차이’ 비교는 비교문화 연구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공통점’에도 눈을 돌려야 합니다. 모두가 제각각 각자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단 사실 말입니다. 취재에 응해준 12명의 모든 ‘아이코’에게 감사드리며, 극단 분카자의 지난여름 상연작 ‘은방울 떨어지는 주변에서-슈리 1945’의 팸플릿에 실린 아이누 인권운동가 와시야 사토의 시로 연재를 마무리합니다. 감사합니다.
■기획 / 이유진 기자 ■글 / 김민정(일본 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