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희 명창 “죽을힘으로 불렀소”

The Lady

이춘희 명창 “죽을힘으로 불렀소”

“벌써 2년이 됐네요.” 인생 최고의 무대로 그날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춘희 명창은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본부 회의장에서 ‘아리랑’이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되던 순간 하얀 한복을 입고 아리랑을 불렀다. 흰 나비와 같았던 그 순간을 위해 그녀의 청춘은 그리도 분주했나 보다.

[The Lady] 이춘희 명창 “죽을힘으로 불렀소”

[The Lady] 이춘희 명창 “죽을힘으로 불렀소”

“‘아리랑~’ 하고 시작하면 묻힐 거 같아서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하고 치고 나갔어요. 1초라도 놓칠까 봐 무대 뒤에서 나가면서부터 불렀지요. 10시간이 넘는 회의를 하느라 피곤에 전 사람들이 ‘이게 웬 아름다운 소리야?’ 하는, 정말 환희에 찬 표정을 짓는데 얼마나 감격스럽던지. ‘아리랑’이 끝나자마자 손뼉을 치며 몰려나와 같이 사진을 찍자고 했어요. 우리 한국 사람들은 다 부둥켜안고 울었지요.”

서울 서초구 국립국악원 인근에 위치한 오래된 건물 4층에 이춘희(67) 명창·한국전통예술학교장의 연습실이 있다. 층층이 쌓아올린 장구탑 사이로 오후의 햇살이 밀려들었다. 목을 아껴야 한다며 인색하게 굴어도 이상하지 않을 명창은 사진 촬영을 위해 장구채를 꺼내 들었을 때도 일말의 망설임 없이 ‘아리랑’을 불러주었다. 꺼진 줄 알았던 녹음기에 고스란히 담긴 소리가 반가워 회사에 돌아와서도 몇 번을 돌려 들었다.

민요에는 크게 남도민요, 서도민요, 경기민요가 있는데 그중 경기민요는 밝고 경쾌하다. 선율과 음색도 곱디고운 것이 특징. 이 명창은 “유리그릇처럼 투명하고 맑은 시냇물 같은 소리”라고 표현했다. 경기민요를 하는 명창들 가운데서도, 공연 관계자의 전언을 그대로 빌리자면 “가장 고급스러운” 소리를 낸다는 이 명창. 인터뷰 중 그녀에게서 가장 자주 나온 표현은 “죽을래 살래 하면서 여기까지 왔다”였다.

‘야즐자즐한’ 그 맛에
서울 한남동에서 태어난 이춘희의 우상은 당시 ‘꾀꼬리의 여왕’이라 불리던 가수 황금심이었다. “‘장희빈’이 나올 시간이면 여자 목욕탕이 텅텅 빈다”라는 우스갯소리가 나돌았던 1961년. 라디오 연속극 ‘장희빈’ 주제곡을 황금심 뺨치게 따라 부르는 열두 살 이춘희에게 가수가 되라는 주변의 부추김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먹고살기도 어려운 형편에 가수가 되겠다는 막내딸의 소원을 척척 받아줄 부모가 당시에는 흔치 않았다.

“집안 사정이 어려웠으니까 저도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었죠. 그러다 느닷없이 병이 났어요. 그냥 아픈 게 아니라 데굴데굴 구를 정도로 아픈 거예요. 제 생각에는 노래를 못하게 해서 그런 거 같았어요.”

정신을 못 차리는 딸을 데리고 1주일 동안 병원에 다녔던 어머니는 급기야 굿을 하기에 이르렀다. 신명이 오른 무당이 말했다. “아이가 하고 싶어 하는 게 있으니 죽이지 말고 살려라. 뭔지 모르지만 하게 놔둬라.” 쇼단에서 현대무용을 하는 이웃 아주머니의 주선으로 이창배 선생이 하는 민요학원에 다니게 된 때가 이 명창의 나이 열여덟 살이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 선소리산타령 예능보유자로 당대를 풍미했던 이 선생은 우리나라 명창 중 가장 많은 제자를 배출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민요학원에 가보니 가요하고는 정말 달랐어요. ‘야즐자즐한’ 그 맛에 그냥 환장을 하겠더라고요. 제가 민요를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가요는 입도 뻥긋 안 했어요. 이건 해보지 않은 사람은 정말 몰라요. 목 쓰는 방법이 해가 갈수록 달리 들려요. 익혀야 하는 테크닉이 무한대예요. 굉장히 어렵고도 오묘한 그 맛에 제가 반했지요.”

‘이거 배우길 잘했어’, ‘아니야, 이거 배워서 뭐 해?’를 반복하는 시간이 3년이 되고, 5년이 됐다. 내가 제일 잘하는 줄 알았는데, 도무지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하는 것만 같았다. 소리가 늘지 않아서 힘든 상황을 뒤집어보니, 그건 귀가 뜨였다는 의미도 됐다. 그렇게 또 10년이 흘렀다.

“서양 성악은 울림통인 머리까지 소리를 퍼 올려서 넘기잖아요. 우린 그걸 넘나들어야 해요. 그 넘나듦이 굉장히 어렵고 까다로워요. 멜로디 자체는 쉬우니까 일반인들이 듣기에 어렵지 않은 것 같지만 그 소리에 맛을 내는 게 굉장히 고난도예요. 우리가 경기소리 잘한다는 사람을 몇 손가락 안에 꼽는 이유가 그 맛을 제대로 구사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에요.”

[The Lady] 이춘희 명창 “죽을힘으로 불렀소”

[The Lady] 이춘희 명창 “죽을힘으로 불렀소”

차라리 몇 년 정진하면 졸업장이 나오는 그런 공부였으면 했다. 소리 공부는 ‘바빠질 때’까지 한없이 해야 하는 것이었다. 수입은 바랄 수도 없는 처지. 버스 두 번 타고 가야 할 거리는 한 번만 타고 걸어서 갔고, 점심은 가장 싼 짜장면으로 때우는 것도 감지덕지했다. 그렇게 젊은 시절을 보내며 한눈팔지 않은 보람은 새로운 선생님과의 만남에서 찾을 수 있었다. 박춘재, 이창배 선생과 함께 3대 경기명창으로 손꼽히는 안비취 선생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우리 세대에게도 꽤 친숙한 안 선생은 1997년 작고하기 전까지 경기민요의 보급에 앞장선 인물이다. 안 선생이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예능보유자로 지정되던 1975년, 이 명창은 그녀의 전수생이 됐다.

무대 공포증을 뛰어넘어
“남자 선생님한테 배우다가 여자 선생님한테 배우니까 그 보드라움이랄까, 기법도 전혀 다르더라고요. 같이 생활을 시작하면서 선생님이 모든 걸 관리해주셨어요. 말씨부터 웃음소리, 옷차림까지요. ‘오늘은 또 무슨 지적을 받으려나’ 겁을 내면서 그렇게 선생님한테 인생을 배웠죠.”

특유의 카리스마로 대중을 사로잡았던 스승은 제자에게는 한없이 큰 선망과 존경의 대상이었다. 스승의 그늘은 아늑했지만, 마냥 따뜻하지만은 않았다. 전수생 이춘희는 어딘가 주눅이 들어 있었다. 칭찬이 박한 스승 밑에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스승의 방송 출연 스케줄이 잡히면 으레 제자 몇 명이 함께 나가게 돼 있었다. 실력으로는 단연 제일 먼저 리스트에 올라가야 할 이 명창은 번번이 방송국 문턱을 넘지 못했다. 담당 PD가 퇴짜를 놓는 것이었다. 이유인즉, “걔는 못나서”였다.

“선생님은 대놓고 얘기는 안 하셨지만 분위기 보면 알죠. 그런데 그건 사실이었어요. 제가 못나서. 제가 봐도 못난 걸요. 흑백TV 시절에도 괄시를 받았는데, 컬러TV가 나오고부터는 완전히…. 못났기 때문에 ‘소리 하면 이춘희’라고 엄지를 세우도록 해야겠다고 나와의 약속을 한 거예요. 그래서 이를 악물고 했어요. 제가 좋아하는 일이라 죽을래, 살래 하면서 여기까지 왔지요. 제가 예뻤으면 그렇게까지 안 했을지도 몰라요.”

배를 이용해 실타래처럼 뽑아내는 발성을 하려면 뱃심을 길러야 했다. 배에 힘을 주는 법을 터득시키기 위해 제자의 배 위에 올라가거나 배를 주먹으로 때리는 훈련은 수십 년 경험을 통해 완성한 것이다. 스승이 한 번이라도 지적한 부분은 반드시 고쳤다. “그 옷은 어쩜 그렇게 안 어울리니?”라는 말 한마디라도 들은 옷은 두 번 다시 입지 않았다. “너는 어쩜 그렇게 시골스럽니?”라는 말도 정말 사랑스럽거나 자식이 아니면 하지 못하는 진심 어린 충고라고 여기며 고맙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쉽게 극복할 수 없는 난제가 있었다. 고질적인 무대 공포증이었다.

“기가 죽어 있는 사람에게는 그런 게 있는 거 같아요. 그때의 나를 가만히 돌아보면 만날 못났다는 것에 기가 죽어서 무대에 올라서도 영 자신이 없었어요.”

연습 때는 멀쩡히 잘하다가도 무대에만 오르면 사시나무 떨듯했다. 그럼 금세 숨이 차올라서 온전한 소리를 내기 힘들었다. 긴장을 이겨내기 위해 앉았다 일어서면서, 급기야 뛰면서도 소리 연습을 했다. 근 1년 훈련의 강도를 세웠다. 첫 개인 발표회 당일 아침, 아무도 없는 객석을 바라보며 또 연습을 했다.

“오늘이 내가 죽는 날이다, 오늘도 떨면 난 죽어야겠다…. 그렇게 다짐했어요. 그 생각을 하니 또 눈물이 나네. 너무너무 고생을 많이 해가지고….”
혹독한 연습으로 무대 공포증을 서서히 지워가던 이 명창이 드디어 ‘극복’을 외칠 수 있었던 순간이 있었다. 1986년이라고 연도까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안비취 선생님께서 무대에 서면 혼자서도 꽉 차는 느낌이 들어요. 예쁘다기보다 멋있는 분이셨죠. 어느 자리에선가 제가 ‘우리 선생님은 어쩜 그렇게 무대에서 멋있을까’라고 했더니 ‘아유, 자기도 그래!’라는 답이 들리는 거예요. 전 제가 그렇다는 걸 전혀 몰랐어요. 그래서 다시 물었어요. 정말 어색하지 않냐고, 정말 좋아 보이냐고. 그랬더니 여기저기서 그렇다고 얘기해주는 거예요. 그 말을 믿었어요. 그리고 받아들였어요. 그러면서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지요.”

[The Lady] 이춘희 명창 “죽을힘으로 불렀소”

[The Lady] 이춘희 명창 “죽을힘으로 불렀소”

한 우물을 판다는 것은
경기도 용인에 살고 있는 이 명창은 새벽 5시 30분경에 일어나 물 한 컵 마시고 스트레칭을 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리곤 1시간 반 정도 산을 끼고 있는 동네를 산책한다. 목에 좋다는 도라지 달인 물을 달고 살 줄 알았던 이 명창이 믹스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놓고 앉았기에 꺼낸 얘기였다. 몸이 악기나 다름없는 명창의 목 관리는 꽤나 특별할 줄 알았다. 폭포 아래에서 피를 토하며 득음을 하는 것이 명창의 당연한 통과의례인 줄로만 알았던 무지한 기자에게 명창은 “그건 통성으로 하는 판소리에서나 통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경기소리의 경우 목이 파열되면 특유의 시냇물처럼 고운 소리를 내기 힘들단다.

“따로 관리법은 없고 단지 감기만 조심하죠. 그런데 감기가 관리를 잘한다고 해서 피해갈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건강기능식품도 안 먹고, 시간을 내서 마사지를 한다거나 이런 건 못해요. 대중목욕탕 가더라도 사우나나 찜질은 안 해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학생들을 가르치느라 주말을 모르고 살았다. 일요일을 찾아서 쉬기 시작한 것도 요 근래다. 20, 30대 시절에는 더러 게으르다는 소리도 들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무엇에 쫓기는 듯 살게 됐다고 했다.

“건강 비결이요? 규칙적인 생활이랄까. 나쁜 짓을 안 하는 거?(웃음) 나쁜 짓이라는 게 이 믹스커피 마시는 거죠(웃음).”

남보다 유난히 나왔다고 ‘주장’하는 배, 일명 소릿배는 뱃심을 상징하는 명창의 자랑이다. 1997년 50세의 나이에 이 명창은 스승의 뒤를 이어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보유자로 지정됐다. 그야말로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이다. 나쁜 짓을 안 하고 산다는 건 그저 웃자고 한 말이 아니었다. 이 명창은 나이 마흔에 혼자가 된 사연을 들려주었다. 국악인보다는 내조에 전념하는 아내를 원했던 남편의 울타리에서 벗어난 이후, 그녀는 철저하게 지도자의 삶을 살았다.

“항상 학생들을 지도하는 선생이기 때문에 지도자로서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일은 만들지 않아야겠다고 단단히 결심했어요. 다른 데 시집갈 생각도 아예 접었어요. 그게 옳은지 그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잘한 거 같아요. 그동안 일요일도 없이 살았다고 했잖아요? 그렇다 보니 남편 뒷바라지만 하면서는 못 살았을 거예요. 그냥 내 인생은 정해져 있는 것이라고 완전히 체념해버렸죠.”

때로는 어려운 가정환경까지 보살피며 성심으로 키워온 제자는 명창의 큰 재산이다. “연습 안 하는 거 빼고는 거의 닮았다”라는 딸 서정화(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이수자)도 그중 한 명. 이 명창은 지금도 어머니의 레슨을 어깨 너머로 보며 가락을 익혀온 딸의 숨은 실력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을 못내 마음에 걸려 했다.

“저는 좀 목이 약해요. 곱고 맑기만 하죠. 그런데 딸은 투명하고 맑으면서도 튼튼한 목을 타고났어요. 또 귀도 빠르고요. 그런데 연습을 안 해요. 그래서 아주 마음에 안 들어요. 제가 무서우니까 저한테 안 배우려고 해요. 자식은 그렇더라고. 죽일 수도 없고 살릴 수도 없고(웃음).”

학창 시절 명창 이춘희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국악을 전공하는 또래들의 시기를 한 몸에 받아 힘든 적이 있었다는 걸, 엄마는 뒤늦게 깨달았다. 그만큼 속 깊은 딸의 진심을 알면서도 “연습만 잘해주면 더 좋을 텐데”를 입버릇처럼 말할 수밖에 없는 게 또 엄마의 천성이다. 나이 50세에 인간문화재가 되면서 비로소 빛을 본 선배의 입장에서 한 우물을 판다는 것이 얼마나 고되고 힘든지를 잘 알고 있는 이유도 크다.

“짧은 길을 걸어왔다면 되돌아갈 수 있겠지만, 긴 길을 걸어왔다면 바꿀 수 없어요. 그 길에서 더욱 노력을 해야 해요. 그래야 퇴보하지 않지요.”

어느 노래가 그렇지 않겠느냐마는 우리 소리는 특히나 가창자의 삶의 흔적이 물씬 묻어나는 느낌을 준다. 한이 서렸다는 표현을 흔히들 하는데, 이 명창의 소리를 들어보면 그런 아름다운 한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청아하다.

이 명창의 어린 시절 ‘노들강변’, ‘도라지 타령’, ‘늴리리야’, ‘태평가’ 등은 어디에서든 쉽게 들을 수 있는 유행가였다. 소리가 좋으니까 술집에서 흥이 오르면 술을 마시는 사람도, 파는 사람도 젓가락 장단을 두드리며 노래를 했다. 명동 거리에서 상점 스피커마다 흘러나오는 대중가요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일제강점기 국악 말살 정책으로 퇴보하기 시작한 우리 소리가 다시 대중의 사랑을 받기를 바라는 마음에 이 명창은 ‘국악드라마-경기소리극’을 만들어 공연을 해오고 있다. 우리 소리로 만든 뮤지컬인 셈이다. 아이들을 위한 국악초등학교부터 상설 공연이 가능한 예술단을 이끌 재단 설립까지, 이 명창의 머릿속에서는 미래를 준비하는 스케치가 한창이다.

■글 / 장회정 기자 ■사진 / 안진형(프리랜서) ■사진 제공 / PR M
화제의 추천 정보

    Ladies' Exclusive

    Ladies' Exclusive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