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독립 선언, 윤문희

The Lady

할머니의 독립 선언, 윤문희

내가 갖기보다는 양보하는 게 속편했던 11남매 중 아홉째 딸은 전쟁으로 아버지와 오빠를 잃은 뒤 성장이 멈춰버렸다. 사춘기도 갱년기도 건너뛴 인생은 ‘할머니’가 되고서야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예순이 넘어서 감행한 독립이 가져다준 마음의 평화를 토양 삼아 지금도 할머니는 매일매일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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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솔직히 (인터뷰) 거절하려다가 젊은 일꾼들 하루 쉬어가게 하자, 그래가지고 하는 거예요. 이 봄날 좋은 데도 많지만, 같은 일이라도 이렇게 왔다 가면 그래도 힐링이 -이 단어는 쓰기 싫지만- 될까 싶어가지고.”

서울 시내 벚꽃은 거의 끝물이었는데 그래도 북녘이라고 경기도 포천 윤문희(75) 할머니네 앞마당에는 아직 하얀 꽃구름이 바람을 따라 넘실거렸다. 그리고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주인처럼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다. 잎이 무성해지면 족히 열댓 명은 넉넉한 그늘로 품어줄 것 같다. 고운 얼굴과 달리 ‘농군’의 손을 가진 할머니가 이 집에 혼자서 터를 잡은 지 올해로 12년째다. 조금만 손보면 명소가 되겠다 싶은 마음에 덜커덕 욕심내 땅을 샀더니, 어쩔 수 없이 큰 집이 따라오더라 했다. 멀리에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번듯한 이층집을 놔두고, 할머니의 ‘살림’은 작은 단층집 차지가 됐다.

“이 집이 나에게는 종이예요. 애들한테 종이를 주면 끼적끼적 낙서하잖아요. 내 실력대로 심고 가꾸고 해요. 실은 잘 심지도 않고 뽑지도 않고 저절로 나는 거나 내 눈에 띄는 거만 관리해요. 정말 편하죠. 저기 수선화는 안 가꾸니까 누가 사온 거예요. 근대 난 그런 것도 잘 안 해요. 내가 사다가 심었는데 죽으면 싫잖아요.”

즐겨 마시는 차를 담은 보온병, 작은 찻잔 3개, 혹시나 차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준비한 스틱 커피 그리고 흰 수선화와 잎으로 직접 만든 미니 센터피스까지. 할머니가 내어온 쟁반을 받아들고 보니, 혼자 살겠다고 강남 집을 떠나왔다는 그분이 맞나 싶었다. 실은 할머니를 만나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환갑이 넘은 할머니가 가족으로부터 자의적인 독립을 감행한 속내를 직접 듣고 싶었다.

[The Lady] 할머니의 독립 선언, 윤문희

[The Lady] 할머니의 독립 선언, 윤문희

멈춰버린 시계
“사실 그건 우리 애들한테 미안해요”라며 시작된 이야기는 1950년, 할머니의 초등학교 6학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렇다. 6·25전쟁. 할머니의 인생에서 결코 빼놓고 넘어갈 수 없는 사건이었다.

할머니의 초등학교 시절(할머니는 ‘진짜 호랭이 담배 먹던 때’라고 했다), 생일에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여 아침상을 받을 정도로 서울도 아주 좁았더랬다. 11남매 중 아홉째로 태어난 할머니에게는 오빠 넷, 언니 넷, 남동생에 여동생까지 말 그대로 없는 것이 없었다. 그 안온함을 앗아간 전쟁 발발 이후 아버지는 납북됐고, 학도병으로 징집됐던 넷째 오빠는 병으로 세상을 등졌으며, 각각 출가한 언니, 오빠는 자신의 가족을 챙기는 데도 힘겨워했고 연로하신 어머니와 함께 남겨진 할머니의 생애 시계는 그 후로 오랫동안 초등학교 6학년으로 멈춰서버렸다.

“오빠들에게는 치안국에서 나와서 이것저것 물어보곤 했어요. 우리한테까지는 안 왔어요. 워낙 어렸으니까. 그런데 사상적으로 경직이 됐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믿음이 너무 빨리 서리를 맞았어요. 그때부터 크지 않았을뿐더러 크기도 싫었어요, 진짜.”

쾌활하고 명랑하고, 무엇이든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었던 소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사춘기를 흘려보냈다. 전쟁통 떠돌며 사느라 원하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이후로는 아예 공부를 등졌다. 그렇게 시쳇말로 영혼 없는 학창 시절을 보내고 비서로, 영업부서 사원으로 사회의 맛을 보았지만, 단단히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일상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할머니는 ‘환경에 의한 절제’라교 표현했다.

“이건 무척 재밌는 얘기인데, 납득이 잘 안 갈 거예요. 여동생이 1960년대 유학생이에요. 나에게 미국 (패션 전문학교) FIT에 오라고 그걸(입학원서) 보내줬어요. 여비가 없어서 못 간다고 했더니, 제 친구가 ‘우리 외삼촌이 여비 대준대’라고 해서 결혼했어요(웃음). 안 믿기죠? 지금도 그만큼 바보예요.”

스물아홉 살에 만난 친구의 외삼촌과 결혼했다. ‘취사선택’이란 것이 없었다고 했다. “더우면 가게 들어가서 아이스크림 사 먹을 때 무슨 생각 안 하잖아요?”라고 반문했다. 결혼도 본능적으로 했다는 할머니식 표현이다. 가치관부터 워낙 다르다는 남편과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다. 좌우를 보지 못하고 오직 앞만 본다는 꿩의 시야로 집과 애들만 알고 살았다고 했다. 딸의 대학 입시를 앞두고 담임선생님 호출이 있었다. ‘엄마가 점을 찍어줘야지, 딸이 원을 그리지 않겠느냐’는 선생님의 말에 할머니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대학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라고. 아들의 지적을 듣고서야, 할머니는 자신이 좀 다른 엄마라는 점을 깨달았다고 했다. 큰딸이 83학번을 단 대학생이 된 뒤, 할머니는 집 밖으로 나섰다.

“내가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절실히 느끼겠더라고요. 그때 조정래 선생님이 현대문학에 「태백산맥」을 연재했어요. 그걸 읽으면서 내 위치, 내 자리에 대해 생각했지요. 이후 한길사에서 역사 강좌를 열었을 때 진짜 열심히 다녔어요. 한 달에 한 번은 지방 답사도 가고요. 처음에는 딸이랑 같이 다녔는데,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고 빠지고 저는 계속 다녔지요. 그게 제가 공부한 것의 전부예요.”

강좌를 들으며 알게 된 친구 모녀와 함께 프랑스 어학연수도 다녀왔다. 같이 간 5학년 아이에게 질투가 날 정도로 공부에 빠져들었다. 4개월의 연수 시간 중 인근의 스페인으로 여행도 했다. 이후 인도 문학 기행도 다녀오고, 안나푸르나 트레킹에도 도전했다.

불의의 사고에서도 배우다
40대 중반 비로소 눈을 뜬 엄마의 빈 자리를 남매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두 자녀는 알아서 대학에 진학했고, 본인들이 준비해서 유학까지 다녀왔다. 여섯 살까지 할머니가 키워낸 외손녀는 예고 3학년생이 됐고, 아들은 세련된 압구정 여자와 결혼해 잘 살고 있다고 했다.

[The Lady] 할머니의 독립 선언, 윤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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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딸이 지금 마흔아홉인데, 가끔 오고 싶다고 하거든요. 그런데 애들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서로의 리듬을 깨면 안 되니까 혼자 사는 집에 오지 말라고 해요(웃음).”

인도네시아에서 아들과 함께 사업을 하고 있는 할아버지는 지난해 여든 살을 넘기면서 현지 생활 정리 수순에 들어갔다고 했다. 그럼 같이 살게 되느냐는 질문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할머니. 할머니 몸이 불편했을 때, 딸과 남편이 집에 머문 적이 있었는데 점령군이 와 있는 것처럼 영 불편했단다. 할아버지 딴에는 돕겠다며 정원 손질에 나섰는데, 할머니 눈에는 뽑으면 안 되는 거에 손을 대서 할머니가 펄펄 뛰기도 여러 번이었다.

“품위하고 풍요는 다르잖아요? 넉넉함에도 종류가 무척 많아. 내가 남편한테도 못 가는 게, 거기 가면 언어도 배워야 하잖아요. 내가 필요할 때도 공부를 안 했는데, 언어를 배워가면서 거기서 편하게 산다는 게 영 웃기잖아요. 또 식모가 다 해준다는데, 그건 사는 게 아니지 않나요? 사육당하는 거지.”

40대에 시작된 할머니의 외출은 그렇게 60을 넘겨 독립선언을 하는 자연스러운 계기가 됐다. 남편이 외국 근무를 시작하면서부터 살금살금 힘을 길렀단다. 운전도 그중 하나.

“젊었으면 F1 했을 거”라는 호언장담이 흰소리가 아닐 정도로 할머니는 지금도 운전이 걷는 것만큼이나 편하다.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에너지가 넘쳤던 할머니는 마당에서 나무 정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쪽으로 쓰러질지 예상한 각도를 벗어난 나무가 할머니를 덮쳤다. 스무 걸음 남짓한 집까지 가는 데만 몇 시간이 걸렸다. ‘누구는 에베레스트도 올라가는데,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혼잣말을 하며 방까지 기어가는 데는 성공했다. 보통일이 아니라는 걸 감지한 것은 도저히 화장실까지 갈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서부터. 119에 전화를 하고 가족이 알게 될까 봐 굳이 집 근처 병원을 찾아 들어갔다. 척추에 고정 쇠를 4개나 박는 대수술이었다. 뒤늦게 알고 찾아온 딸에게 얼마나 많은 원망을 들었던가. ‘사람 기능 못할 줄 알았던’ 고비를 넘기고, 어쩔 수 없이 2년간 실버타운 신세를 졌던 할머니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 게 작년이다.

입원했을 때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하는데…’라는 의문의 답을 찾은 것도 근래다. 기도처라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할머니만의 공간, 내 집. 전에는 이 집이 축복이라는 것을 몰랐다. “다들 부러워하는데, 그걸 모르니까 엄마한테 이상하다고 하는 거야”라는 딸의 말도 흘려들었다. 남들이 보기에 번듯한 집을 마련하고도 ‘상이냐, 벌이냐’라며 불편하게 살았다. 누릴 줄 모르는 전쟁 세대라서 그럴 거라고 스스로 짐작만 할 뿐이다.

[The Lady] 할머니의 독립 선언, 윤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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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라는 별을 달고
“평생 아무것도 안 했는데 나에게 이런 축복이 왔잖아요. 다시 기회를 가지려고 해요. 처음에는 혼자 나와서 밥도 못 먹었어요. 일에 지쳐서요. 그런데 이걸 유지 관리 못하면 망신 아니에요? 식구들에게 쫓겨날까 봐 미리 나왔는데, 미리 나와서 쫓겨나면 정말 끝이 아니겠어요?(웃음). 난 이집 주인이라는 거에서 탈피했어요. 이걸 가꾸는 관리인이잖아요? 그렇게 사는 게 마음이 편안하니까.”

할머니에게는 주머니가 하나 있는 듯했다. 평소 혼자 지내며 드는 생각을 고이 접어두었다가 이렇게 기회가 있을 때 하나둘 풀어내는 것이다. 그 시점이 때로는 묻는 말에 꼭 들어맞지 않을 때도 있지만…. 이를테면 “박사학위를 얻는 것보다 공부를 하다 보니 어느 틈에 박사가 되는 거, 그러니까 박사라는 이름이 붙지 않고 끝까지 공부하면서 사는 게 더 행복한 거지”, “난 세상에 알려진 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안 가져요. 알려진 것은 관심을 안 가져도 다가오잖아요”, “사랑은 참 어려워서 그냥 사랑이라는 말을 쓰기가 무엄해. 그냥 자비라는 말은 쓸 수 있을 거 같은데”, “난 지금 책을 무지 봐요. 이거 보고 저거 보고 막 봐요. 내가 크려고 봐요”와 같이. 녹음기 덕분에 놓치지 않고 채집된 할머니의 이야기 실타래는 이렇게 키보드를 통해 다시 문자로 그럴싸한 자리를 잡아간다. 할머니는 또 ‘편집의 힘’이라고 똑 부러지는 정의를 내리시겠지.

“처음 ‘할머니’ 소리를 들을 때 여자들은 누구나 충격을 받아요. ‘내가 왜 네 할머니야!’ 그런데 나는 할머니라고 불리니까 진짜 군인이 별 달면 좋아하듯 했어요. 그렇게 마음이 편안하고 안도될 수 없었어요. 왜냐면 인간으로서 성숙한 거잖아요. 내 나이 예순한 살에 우리 손녀가 나왔어요. 걔가 내 선생님이에요. 그 아이를 키우면서 희로애락을, 인간의 본성을 배웠어요. 지금도 마음으로 어려워하는 걸 그 애는 모르죠. 걔 앞에 나서기 전에 화장도 하고 옷도 갈아입고 그래요(웃음).”

한창 치열한 30대와 40대를 보내고 있을, 다수의 독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느냐고 물었을 때 할머니는 “아무리 얘기해도 못 알아듣는 게 원칙이기 때문에, 없다”라고 잘라 말했다. 마하의 속도로 흐르는 시간이 무서워서 웬만하면 그런 얘기는 하지 않는다면서. 할머니의 어머니는 청일전쟁 당시 독 속에 숨었던 옛날 얘기를 들려주셨노라고 했다. 잠시 뜸을 들인 뒤 할머니는 말을 이었다.

“자기가 세상을 바라보는 어떤 안목을 갖느냐에 따라서 사실은 그때그때마다 다 좋은데, 나는 그때그때를 다 놓쳤잖아요. 나는 사춘기도 없었고, 갱년기도 없었어요. 시야를 좀 넓게 가졌으면 어려운 고비도 넘고 다 누릴 수 있었을 텐데…. 30, 40대면 결혼해서 아이들이 있잖아요? 아이가 열 살이 될 때까지는 그냥 놔두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열 살 전에는 이상한 짓 하면 할수록 왜 저걸 했을까, 하며 그냥 예뻐하면 답이 나와요. 그런 게 사랑이죠. 끝까지 참고 볼 수 있는 것. 아무리 이상해도 부모가 버티고 있는 한, 아이는 잘 자라요.”

앞으로 꼭 하고 싶은 게 있느냐는 질문에 “없어요. 그냥 건강해서 난 규칙적인 건 못해. 일도 몰아서 해”라고 답하더니 열무 한 단 1천5백원, 무 8백원, 오이 2천원에 미나리까지 사도 6천원을 안 넘었다는 얘기를 불쑥 꺼냈다. 마당의 돌나물 뜯어다가 물김치를 담그고, 파랗게 올라온 쪽파를 다듬어서 무와 함께 깍두기도 만들고, 열무김치, 오이소박이까지 버무렸는데 요즘은 딸이 입맛이 바뀌었는지 통 달라는 말을 안 한다며 해맑게 웃음 지었다.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데 새삼스럽다는 아들의 농담 섞인 나무람에도 할머니는 내년으로 맘먹은 집들이를 하겠다고 했다. 언제가 될지도 모르는데, 벌써부터 달력에 눈에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글 / 장회정 기자 ■사진 / 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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