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편지, 그 사랑의 역사 박시현

The Lady

연애편지, 그 사랑의 역사 박시현

1956년 3월부터 1961년 9월까지 대학 선후배에서 장거리 연애 커플, 두 아이의 부모로 성장해가는 동안 한 부부가 주고받은 3백32통의 편지가 한 권의 책이 됐다. 청춘 남녀의 사랑스러운 기 싸움에 비죽비죽 튀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해 사무실 동료들의 눈총을 받기도 하고, 손글씨로 꾹꾹 눌러 담았을 애틋함으로 코끝이 찡해지기도 하며 마지막 장을 덮은 뒤 바로 출판사에 전화를 걸었다. 이런 예쁜 편지를 주고받은 커플이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꼭 만나고 싶었다.

[The Lady] 연애편지, 그 사랑의 역사 박시현

[The Lady] 연애편지, 그 사랑의 역사 박시현

1956년 봄, 서울대 사범대학 생물학과 석사과정의 김준호군은 명륜동 이영노 박사 댁에 들어서다가 같은 과 2학년 박시현양을 처음 만났다. 그로부터 58년이 지나 그는 ‘순간 나의 눈에는 황홀한 섬광이 번쩍였다. 세상에 이렇게 건강하고 아름다운 여성이 존재할 수 있을까!’라고 책 서문을 통해 그때를 회상했다. 기념비적인 첫 데이트 이후 그는 첫 편지를 띄웠다. ‘장충단공원의 은세계 속에서 고즈넉한 미스 박은 사람이 아닌 천사였습니다’라며 시작한 글월은 이내 ‘미스 박! 이제부터 우리는 공부합시다’로 이어진다. 3일 뒤 미스 박은 ‘준호씨처럼 학문을 하면서 이상과 행복을 찾는 생활을 저도 할 수 있다면, 기꺼이 실행하겠어요’라고 답한다. 이 커플의 편지, 구구절절 예사롭지 않다.

그때 우리의 삶과 사랑
내가 이 편지를 공개하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오늘날 젊은이들이 가끔은 편지로 사랑을 나눴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불같은 성미의 내가 휴대전화와 이메일을 사용할 수 있었다면 어쩌면 아내의 사랑을 지키지 못했을지 모른다. 몇 날의 지체와 기다림이 나의 사랑에는 매우 유익했다.’ 「저도 양말 정도는 기울 수 있어요」 프롤로그 중에서
거실장 위에 놓인 카네이션 바구니가 어버이날임을 실감케 하던 날, 박시현(79) 할머니는 떡이며 과일에 오미자주스로 한 상 차려놓고 기자를 맞았다. 벌써 여러 번 들춰본 흔적이 역력한 책도 예의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

“(남편이) 편지를 워드로 쳐놓으신 지는 오래됐어요. 바쁘니까 잊고 살다가 요즘 조금 시간이 나서 생각이 나셨나 봐요. 그걸 뽑아서 아이들에게 읽으라고 주시고는 책으로 내면 어떻겠느냐고 하셨어요. 애들은 좋다고 하죠. 저는 여자고, 또 사랑의 그것이 너무 노골적으로 표현된 거라(웃음), 싫다고 했는데 네 번이나 교정 보시는 걸 보니 계속 반대하기가 미안하더라고요.”

애초 「그때 우리들의 삶과 사랑」이었던 제목은 「저도 양말 정도는 기울 수 있어요」로 바뀌었다. 할머니는 이 제목이 참 마음에 든다고 했다.

“시골의 시어머니께서 ‘대학 나온 며느리는 양말 하나 깁지 못한다더라’라고 하셨다는 애 아버지 편지를 읽고 웃음이 나왔어요. 저는 사실 어렸을 때부터 가사를 도왔어요.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셨지만, 엄청 배웠죠. 버선도 붙인 듯이 깁는 솜씨였거든요. 그래서 저도 양말 정도는 기울 수 있어요, 라고 답했는데 그것이 제목이 돼버렸네요(웃음).”

같은 과에 ‘캠퍼스 커플’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여섯 살 연상 선배와 연애하기 위해서는 꽤나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어렵기만 하던 그와의 거리를 확 좁혀준 것이 바로 편지라고 했다. 빈농의 유복자로 태어나 형님의 손에 자라며 일찌감치 독립을 준비 중이던 할아버지 못지않게, 어려운 여건에 고집스레 대학에 진학해 가정교사와 식물도감 그림 그리기 등의 아르바이트를 하던 할머니도 연애에 마음을 빼앗기기 쉽지 않은 시기였다.

‘준호씨가 안 계신 서울은 저에게 쓸쓸한 곳으로 변하고 말았어요.’ 핑크빛으로 찬란하던 편지에 그리움이 더해진 것은 할아버지가 이듬해 공주사범대에서 전임강사로 일하게 되면서부터다. 쌀 여덟 말을 치르고 하숙을 시작한 할아버지와 학보통을 통해 편지를 받던 할머니 사이에서는 곧잘 배달 사고가 발생했다. 할아버지는 ‘이제는 이별의 안타까움을 그대로 느끼는 나약한 사람이 되지 말고 굳세고 명랑한 생활로 빨리 전환합시다’라며 짐짓 태연한 척했지만, ‘미스 박은 나의 천사, 나의 사랑하는 이여! 그대의 이름은 박시현이로다’라는 애정 공세는 굳이 감추지 않았다. 할머니 역시 ‘You are Only Mine. I am Only Yours’라 화답하며 이심전심은 더욱 진해졌다.

“편지를 받으면 1, 2, 3, 4 봉투에 번호를 매겼어요. 그런데 저만 그런 줄 알았더니 그 양반도 똑같이 그렇게 하셨더라고요. 나중에 살림 합친 다음에 커다란 상자에 넣어서 그대로 창고에 보관했지요.”

“정말 재밌어요, 아주 재밌어요.” 2년 전부터 할머니는 연필 초상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직접 그린 할아버지의 초상화.

막내며느리의 인사
‘남녀 간의 애정 문제에 대해 미스 박은 지나치게 봉건적이고 보수적이며 유교적이에요. 우리가 서로 마음을 연 지가 이미 2년이 지났는데도 시종 한 치의 변화가 없는 것으로 보아 유교적임을 알 수 있어요. … 사랑하는 남녀끼리 애정을 나누지 말라고 한다면 두 사람 사이를 끊으라는 말과 같지 않을까요? 나는 적당한 기회에 나의 동정을 미스 박에게 바쳐도 후회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있어요. 남자의 동정은 여자의 정조만큼이나 귀중하다고 생각합니다. … 청순한 미스 박을 생각하며 이만 줄입니다. 그대의 영원한 벗 준호 씀.’ 「저도 양말 정도는 기울 수 있어요」 중에서

여전히 공손하게 악수를 청해야 하는 ‘부자연스러운 애정 교환’에 할아버지는 맘이 상했던 것 같다. 불과 6개월 전만 해도 순결을 지키자고 다짐하던 신사가 약혼 추진조차 내 맘 같지 않자 ‘나는 이번 설 명절에 고향에 내려가서 시골 색시를 물색하겠어요’라고 선언하기에 이른 것을 보면.

“졸업도 안 하고 친정에 결혼하겠다는 말을 못하겠더라고요. 그런데 남편은 재촉을 하고…. 그래서 갈등이 컸어요. 또 어머님께서 편찮으셨는데 내려가 뵙지를 못했어요. 제가 서울 토박이인데, 저희 집안에서는 약혼도 안 한 여자가 남자 집에 간다는 건 생각조차 못합니다. 그래서 말도 못 꺼냈죠.”

시어머니가 음력 정월 세상을 뜨신 1958년 11월 1일 부부는 종로예식장에서 웨딩마치를 울렸다. 막내며느리를 인사시키지 못한 송구함으로 친정의 풀이 꺾이는 바람에 이후로는 결혼 준비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결혼 후 막 시댁에 도착했을 때, 할아버지는 모친의 위패를 모신 제청 앞에 엎어져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몹시 마음이 아팠던 할머니는 지금도 시어머니의 사진을 화장대 앞에 놓아두고 조석으로 인사를 올린다.

할아버지가 보낸 엽서. 할머니가 보낸 엽서. 두 분의 연애 시절. 약혼 기념 사진. 연애 시절, 데이트 장소는 극장 아니면 공원이었다. 주로 걸으면서 데이트를 했다. 종로5가를 걷던 중 촬영한 스냅 사진. 뒤로 보이는 것이 동대문이다.

마침내 이룬 문화주택의 꿈
‘우리는 언제 번듯한 집을 가질 수 있을까? 오밀조밀한 정원을 꾸미고 아이들을 기르면서 손잡고 거니는 생활을 꿈꾸어 봅니다.’ 「저도 양말 정도는 기울 수 있어요」 중에서

결혼 후에도 편지는 계속됐다. 할머니는 어렵사리 자리를 얻은 모교(동덕여중고)에서 교편을 잡았고, 할아버지는 공주사대 교수가 됐다. 무일푼으로 시작한 부부에게 애정의 확인보다 절실한 것은 경제적인 문제 해결이었다. 사랑의 언약으로 물들었던 편지는 어느새 곗돈, 생활비, 봉급, 빚, 월동비, 소액환 등의 단어로 채워져갔다. ‘부지런히 벌고 절약해 집을 마련하자’라는 다짐도 자주 등장한다. 밤에 혼자 자는 것이 싫다며 열일 제쳐두고 상경하겠다는 새신랑의 글에서는 절절함이 뚝뚝 떨어진다. ‘해산할 징조가 보이면 전보를 치겠어요’라는 만삭 아내의 편지를 받아든 남편의 심정을 지금 세대가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혼자 아이 키울 때가 가장 힘들었죠. 겨울이면 잉크가 얼어서 깨지고, 여름이면 세워둔 양초가 녹아서 휘어지는 오래된 한옥이었어요. 애기 봐주는 사람이 갑자기 나가기라도 하면 아침에 우유병을 챙겨서 아이를 친정에 데려다놓았다가 퇴근하면서 데려오곤 했지요. 요즘처럼 육아휴직 같은 것도 없었으니 애 낳고는 바로 출근해야 했거든요.”

마침 할머니 댁에는 부부 생이별 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한 주인공인 둘째 딸 김정원씨가 딸과 함께 와 있었다. 연년생으로 둘째까지 임신한 아내를 더 이상 혼자 둘 수 없었던 할아버지는 아내의 공주 전근을 추진했다. 책은 ‘10월 1일에 공주로 이사를 해야 하나요? 희망찬 마음을 안으며 이만 줄입니다’라는 할머니의 1961년 9월 21일자 편지로 끝을 맺는다. 7년 동안 인심 좋은 공주에 살면서 네 남매의 부모가 된 부부는 1969년 할아버지가 서울대로 적을 옮기면서 상경해 ‘얼마 뒤에는 서울 면목동에 욕실과 화장실이 딸린 붉은 벽돌의 집을 지어 문화주택에 사는 꿈’도 마침내 이루었다.

함 받는 날. 결혼식. 신혼여행. 딸들과 함께.

소설 속 주인공이 부럽지 않은
“거의 듣지 못했던 엄마와 아버지의 연애 시절 얘기를 편지로 알게 됐어요. 20대 초반임에도 엄마는 굉장히 성숙하고 흔들림 없이 주관이 뚜렷하셨더라고요. 저는 결혼할 때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두 분은 벽돌 하나하나를 세워가면서 하나의 집을 짓고 계시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여섯 살 나이 차이가 나는데도 서로를 존경하세요. 또 지금까지도 존댓말을 사용하시죠.”

김정원씨는 결혼에 대해 생각해볼 나이인 스물다섯 살 딸에게 할머니 할아버지의 책을 권했다고 한다. 여덟 손주 중 세 번째인 외손녀는 그야말로 생생한 역사책을 읽고 있는 셈이다. 결혼의 첫째 슬로건을 ‘상호 존중’으로 정했던 부부는 초심을 잃지 않고 지금껏 자손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처음 연애할 때부터 이해하자, 존경하자, 건강하자, 협력하자고 했었어요. 면목동 살 때였어요. 식구가 여덟 명이나 되니까 매일 퇴근할 때마다 장을 봐와야 했죠. 우연히 골목에서 만나면 남편이 얼른 장바구니를 받아 들었어요. 지금도 본인이 나이가 드셔도 뭐든지 무거운 건 꼭 드세요. 그때마다 고맙죠.”

‘구정에 처가에 고기 몇 근이나 과실 몇 관이라도 선물하세요’라는 당부의 편지를 잊지 않았던 할아버지는 가족과 함께 도봉산 등산을 자주 하던 시절, 미아리 근처 처가에 들르면 호주머니를 다 털어서 조카들의 손에 용돈을 쥐어주었다. 문득 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떠오르게 하는 편지의 한 대목이 생각났다. 1960년 11월 할아버지는 8만3천환을 동봉하며 ‘빚을 청산하고 여분이 있으면 당신의 오버코트를 하나 사는 게 어떻겠소?’라고 했고, 할머니는 ‘보내주신 8만3천환 중에서 5만1천8백환은 빌린 돈을 갚고 김장을 하는 데 썼고, 남은 돈에서 1만환으로 당신의 영어 공부에 필요한 트랜지스터라디오를 사겠어요’라고 답했다.

네 남매의 롤모델
50세에 26년간의 교직 생활을 정리한 할머니는 서예를 시작해 한국서가협회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까지 거쳤다. 퇴근해 들어오면서 “오늘도 붓글씨 썼소?”라고 격려해주는 할아버지 덕분이라고 했다. 여유가 생기면서 여행도 자주 다녔다. 어디어디 다니셨느냐는 질문에 “해외는 거의”라고 답할 정도로.

“친구들이랑도 다녔거든요. 근데 그것도 한때예요. (여기저기서) 허리 아파, 무릎 아파… 그래서 안 돼요. 어떤 사람들은 부부가 다니면 싸운다고 하는데 우린 편해요. 일단 룸메이트고 뭐고 신경 쓰이는 게 없고, 무엇보다 무엇 한 가지를 보더라도 공감하는 경우가 많아요. 자연을 보든지, 미술 작품을 보든지. 27일에도 크루즈 여행 가요. 나이 드니까 그게 편하더라고요.”

할아버지는 평생 할머니의 방패막이 돼주었다. 각각 아이 둘씩 키우고 있는 네 남매에게도 “엄마한테 아이 길러달라고 하거나 맡길 생각하지 마라”라고 엄포를 놓으셨단다. 항상 아이들보다 아내가 우선이었다. 다시 태어나도 할아버지와 결혼하시겠느냐는 아침 부부 토크쇼에나 나올 법한 질문을 드렸다.

“더 이상 좋은 남편을 만나기도 어려울 거 같아요. 왜냐하면 속 썩이지 않았고, 학문적인 면에서 능력도 있었고. 나를 사랑하고 아이들을 사랑하고, 또 86세까지 옆에 계셔주시고. 그러니까 지금 현재로서는 충분하다고 봅니다. 이건 사심이 아니라, 사실을 말씀드리는 거예요.”

부모님을 인생의 롤모델로 삼고 있다는 김정원씨의 어린 시절 기억 중 한 장면에는 앉은뱅이책상에 앉아서 공부를 하면서도 한 손으로는 연년생 딸내미들의 고무줄을 잡아주던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이 있다. 이에 뒤질세라 할머니는 위풍이 센 집에 살던 시절, 혹 연탄난로에 딸들이 데이기라도 할까 봐 철사를 사다가 손수 정교한 다이아몬드 철조망을 짓던 남편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정말 이대로 인터뷰가 끝난다면, 주객이 전도될 판이었다. 개인 연구실에 계시다는 할아버지를 찾아뵙고 따로 얘기를 들어야 하나.

인터뷰가 얼추 끝났음을 감지한 할머니가 책 한 권을 들고 나오셨다. 「고희까지의 흔적」. 지난 2004년 할머니의 고희를 맞아 할아버지가 엮은 문집이었다. 이미 1년 전 네 남매와 사위, 며느리, 일곱 손주(어린 여덟 번째 손주는 그림으로)에게 원고 청탁을 해두신 터였다. 할아버지의 하사, 아들의 헌정사, ‘정암 박시현 여사 연보’로 시작해 할머니의 서예 작품과 수필, 가족의 글로 채워진 문집은 ‘사랑을 받은 가족 일동’으로 제작돼 고희연 손님들에게 증정됐다.

사무실로 돌아와 문집을 펼치고 나서야 비로소 ‘남편 복 많은’ 할머니의 인생 그 너머를 볼 수 있었다. 할머니는 넉넉지 않은 상황에서도 양가의 조카들을 거두고, 남편에게는 물론 자식에게조차 말을 함부로 한 적이 없는 슬기로운 아내이자 어진 어머니였다. 또 헌신적인 여장부 같은 장모님, 며느리를 진심으로 웃게 하는 시어머니였다. 미국에 사는 손녀딸이 이메일로 ‘나무뿌리가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이유’를 물으면 친절하게 답해주는 왕년의 생물선생님 할머니였다. 그랬기에 2000년 갑작스러운 할머니의 대장암 판정은 가족 모두에게 큰 슬픔이었고, 완치 후의 삶은 더욱 소중한 선물이 됐다.

‘(남편은) 내 옆에 있으면서 발병 후의 증세, 병원 처치, 약의 복용, 내 기분 상태 등을 수첩에 기록하며 정리하고 있다. 이러한 그이의 모습을 볼 때 ‘어떻게 해서라도 나는 더 살아야겠다. 건강을 회복해 발병 전과 마찬가지로 함께 운동하고 여행하며 또 그이의 건강을 보살피면서 오래 살아야겠다’라는 의지가 강하게 솟아오른다.’ 「고희까지의 흔적」 중에서

“부부가 이렇게 반세기를 서로 해로하려면 참 많이 참아야 해요. 설령 서운한 게 있어도 이해를 해야 하고요. 서운하다, 화가 난다 그럴 때마다 욱욱해서 싸우면 결국 부부라는 게 남이에요. 그런 데에서 격하게 되면 정이 벗어질 수도 있지요. 그럴 때마다 참고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을 해야 순조로워요.”

할머니는 “고맙다”라는 말을 많이 했다. 주어와 목적어는 굳이 필요 없었다. 할아버지를 만났더라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인터뷰이의 사연을 네 쪽 분량의 기사에 담는다는 게 송구스러울 때가 있다. 이번 인터뷰가 유난히 그렇다.

■글 / 장회정 기자 ■사진 / 조성원(프리랜서) ■사진 제공 / 김준호·박시현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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