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을 한 이라면 누구나 옷장 안에 입지 않는 양복 한 벌 정도는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함께 쓰는 착한 소비를 실천하는 ‘열린 옷장’은 옷장 속 잠들어 있는 양복이 가장 가치 있게 쓰이는 방법을 제시한다.
서울 광진구 아차산로에 위치한 한 사무실. 25평 남짓한 공간에 수백 벌의 남녀 정장이 빼곡히 걸려 있다. ‘열린 옷장’이라는 간판을 내건 이곳은 정장을 기증받아 필요한 이들에게 대여해주는 정장 공유 기업이다. 셔츠와 블라우스, 재킷부터 벨트와 구두, 가방까지 정장 차림에 필요한 아이템들을 2천원에서 1만원의 저렴한 비용으로 빌릴 수 있다. 누구나 기증자가 될 수 있고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아주 큰 옷장인 셈이다. 3년 전 희망제작소 소셜 디자이너 스쿨에서 만나 사업을 구상한 김소령, 한만일 공동대표를 포함해 총 4명의 직원이 열린 옷장의 옷장지기로 일하고 있다.
아이디어는 곧 실행에 옮겨졌고, 뜻에 동감한 한 벤처 회사가 공간을 기증해주며 열린 옷장의 보금자리가 꾸려졌다. 각각 카피라이터와 기획영업직으로 직장생활을 하던 김소령, 한만일 대표는 회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일에 뛰어들었다. 열린 옷장이 문을 연 지 2년, 하루 2, 3명에 불과하던 이용자는 점점 늘어나 요즘 같은 취업 시즌에는 하루 40, 50명의 이용자들이 이곳에서 정장을 꺼내간다. 면접을 준비하는 청년 구직자와 급하게 정장이 필요한 대학생들, 결혼식을 앞둔 혼주, 첫 출근의 기대에 부푼 사회 초년생 등 다양한 고객들이 열린 옷장을 찾는다. 언뜻 비슷비슷해 보이는 정장들이지만 수백 벌의 옷에 담긴 사연은 각양각색이다.
“첫 기증자가 학교 선생님이셨는데 임용고시를 볼 때 아버지께서 처음 사주신 옷을 기증해주셨어요. 마침 1호 대여자에게 그 옷이 딱 맞아 신기했죠. 입으시는 분에게 좋은 기운이 전해졌으면 좋겠다는 편지와 함께 사법고시에 합격한 아들의 정장을 기증해주신 어머님도 계시고, 대여자가 기증자가 되는 경우도 많아요. 공기업에 수십 년을 몸담으셨다 은퇴를 하며 평생 입은 양복을 기증해주신 분도 계셨는데, 옷에 그분의 인생이 보이더라고요. 취업 때문에 고생하는 청년들을 볼 때마다 무척 가슴이 아프다며, 후배들에게 좋은 세상을 물려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편지를 보고 눈물이 글썽했죠.”
체형의 변화로 입지 못하게 된 정장을 기증하는 사람들도 많다. 옷장지기로 일하며 대한민국 사람들의 체형이 생각보다 다양하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다이어트로 30kg 체중 감량을 하신 분이 기증해주신 옷이 있었는데 허리가 40인치에 총장이 좀 짧았어요. 처음 옷을 받고 ‘이 옷이 대여가 될까?’ 싶었는데 지금은 대여자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옷 중 하나예요.”
“대여해간 옷이 힘을 발휘했을 때 가장 뿌듯해요. 열린 옷장에서 옷을 빌려 입고 입사 시험에 합격했다며 합격 문자를 보내주시는 분들이 계세요. ‘열린 옷장의 옷이 누군가의 인생에 작은 힘을 보태기도 하는구나. 열심히 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하죠. 계절마다 옷장 정리하시잖아요. 입지 않는 셔츠, 양복만큼은 저희에게 보내주시면 꼭 필요한 사람에게 가장 의미 있게 쓰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내가 입지 않는 양복이 누군가에게 희망, 누군가에겐 도움이 될 수 있답니다. 옷장 속에 잠들어 있는 옷들을 깨워주세요.”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조성원 ■문의 / 070-4325-7521, www.opencloset.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