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의 ‘Heart to Heart’ 고객 서비스를 알리는 CF가 화제다. 추억의 사진들을 다시 꺼내보면서 ‘늘 자식 먼저’, ‘남편 먼저’ 챙기며 희생하는 엄마의 삶을 되돌아보는 내용이다. 화면 속에서 눈에 띄는 건 곱디고운 엄마 모델. 특히 과거의 사진은 고아라와 똑 닮아 더 화제다. 그녀는 과연 누구일까?

‘대한항공 엄마 편’의 광고 모델 정희자 교수
무엇이든 남편과 자식 먼저 생각하는 대한민국 모든 엄마들의 마음을 울린 광고. 그 안에는 딸이 보낸 카드를 품에 보듬으며 행복감에 젖는 엄마 모델 한 명이 있다. 실제 모델의 가족사진이 광고에 사용돼 리얼리티와 감동은 두 배로 깊어지는 효과를 얻었다. 광고 속 그녀는 누구일까? 전문 모델은 아닌 듯한데 풍기는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궁금하면 두드려보자. 먼저 대한항공 홍보실로 연락을 취했고, 이어 직접 광고를 제작한 HS애드와 연결이 됐다. 그녀의 연락처와 간단한 신상명세서를 얻을 수 있었는데, 그녀의 정체(?)는 광주교육대학교 정희자(51) 교수로 포털 사이트 인물 정보란에도 올라 있는 인사였다. 체육교육과 교수로 전공은 발레였다.
살아온 인생은 어떤 방식으로든 몸에 배어 있게 마련이다. 다시 생각해보니 광고 속 작은 손동작과 표정에서 나오는 우아함은 무대 위 발레리나의 그것이 아니었는가. 생애 첫 개인 인터뷰를 망설이는 정희자 교수를 끊임없이 설득한 끝에 카메라 앞에 세웠다. 알고 보니 이번 광고는 그녀의 첫 작품이 아니었다. 출연한 다수의 광고 중에서 커피 광고 속 ‘조인성의 엄마’가 되기도 했고, 냉장고 광고에서는 ‘이승기의 엄마’이기도 했단다.
“광고를 찍게 된 건 정말 우연이었어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무용 관련 세미나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한 적이 있어요. 이후 ‘혹시 모델 할 의향이 없냐’라는 광고 관계자의 연락을 받았죠. 꿈에도 생각지 않은 일이라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했더니 ‘카메라가 잘 받는 얼굴이니 한 번 나와달라’라고 하더군요. 그 제안으로 이동통신 광고의 모델이 됐고 경험 삼아, 재미 삼아 찍어본 것이 여기까지 왔네요.”
그렇게 한 번 물꼬를 터놓고 나니 종종 다른 감독들에게도 연락이 왔고 그녀는 몇 편의 광고를 더 찍었다. 대학교수라는 번듯한 본업이 있어 금전적인 이유로 모델 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베테랑 CF모델이라 해도 손색이 없는 이력으로 그녀의 출연 개런티는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그녀는 ‘예상하시는 금액이 있다면 그것보다 더 적을 것, 정말 적다’라며 웃으며 대답을 대신했다. ‘이번 광고가 이렇게 화제가 될 줄 몰랐다’며 ‘알았다면 더 세게 부를 걸’이라고 뒤늦은 후회도 하고 있단다. 정 교수는 광고 속 연기가 어렵지는 않았을까?
“지금까지 제게 주어진 역할은 대부분 단아한 엄마의 이미지였어요. 대사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어렵지 않게 소화하고 있어요. 촬영 현장의 스태프들은 다들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보여요. 하나의 작품이 만들어지기까지 그들의 땀과 열정을 보면 ‘최대한 NG 내지 않고 정신 바짝 차려 찍어야지’ 하는 생각만 들죠.”
학교에서나 무용단에서 그녀는 작품을 총지휘하는 연출자의 입장이다. 감독의 입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그녀는 늘 최선을 다한다. 이번 대한항공 광고는 과거에 함께 작업했던 감독에게 제의가 들어와 찍게 됐다.
“광고 내용에 많이 공감했기 때문에 흔쾌히 찍었어요. 뒤돌아보면 저 역시 광고처럼 자식과 남편을 위해 살아온 것 같아요. 얼마를 준들 이렇게 아름다운 인생의 파노라마를 만들어주겠어요? 전국적으로 방송까지 나가는 영광은 말할 필요도 없고요.”
정 교수는 나이에 비해 고운 얼굴이지만 손은 여느 주부처럼 거칠다. “오늘 아침에도 집안일 하고 온 참이에요”라며 웃는다. 딱 엄마 미소다.
그녀의 가족 이야기
정 교수의 남편은 그녀와 마찬가지로 대학에서 경영학을 가르치는 교수다. 그와는 대학교 1학년 미팅에서 만나 그길로 결혼까지 했다. 결혼 후 8년 만에 얻은 아들이 이제 대학교 3학년이며, 또 8년이 흘러 늦둥이 딸을 낳았다. 아이는 이제 중학교 2학년이 됐다. 광고에 딸아이의 사진은 나오지 않았다.
“광고를 찍기 위해 집에 있는 앨범을 다 가져갔어요. 대신 딸 사진은 뺐죠. 아들은 다 큰 성인이지만 딸은 아직 어리고 사춘기라 광고가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몰라 조심스럽더라고요.”
광고가 공개된 뒤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모두 좋았다. 특히 친정 동생들과 아버지는 그녀의 어린 시절 모습이 나올 때는 눈시울까지 붉어질 만큼 감동을 받았다고. 그 시절 똘망똘망하고 귀여운 여학생은 전혀 방송 쪽에 관심이 없었을까?

‘대한항공 엄마 편’의 광고 모델 정희자 교수
인생은 타이밍일까? 광고업계 관계자들은 요즘 엄마 모델을 찾기가 가장 힘들다고 말한다. 예쁘고 젊은 모델들은 많다. 그러나 자연스러움을 간직한 아름다운 중년의 여인은 그리 많지 않다. 안정적인 가정생활이 그대로 그녀의 얼굴에 나타나 있으니 누가 봐도 고운 엄마로 적격이다. 광고 제안이 들어올 때마다 자신의 일같이 기뻐해주고 용기를 준 사람은 바로 남편이다.
“사실 이번 광고도 남편이 가장 좋아했어요. 무슨 일을 시작하든 남편과 상의하고 답을 찾죠. 남편은 늘 제 입장에 서서 조언하고 넓은 이해심을 발휘하는 사람이에요. 어렸을 때 만나서 그런지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알아요. 남편 이전에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지요.”
중학교 2학년 딸아이를 키우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또 종종 카메라 앞에 서는 그녀는 늘 바쁘다. 마치 호수 위에 떠 있는 백조의 거친 발길질과 같다.
“아무리 남편이 도와준다고 해도 엄마가 해야 할 몫은 정해져 있는 것 같아요. 그걸 좀 더 완벽하게 하고 제 일을 하려면 잠을 줄일 수밖에 없었어요. 겉으로 보면 우아하고 화려하게 사는 것 같지만 실상은 정말 치열하게 살아내고 있는 거죠(웃음).”
그래도 바르게 커준 아이들은 엄마의 든든한 응원군이다. 특히 엄마가 일하는 모습이 자랑스럽고 좋아 보인다고 말할 때 일을 그만두지 않고 꾸준히 노력한 보람을 느낀다.
무용은 가장 큰 선물
정 교수는 어머니의 권유로 다섯 살 때부터 발레를 시작했다. 열두 살 나이에 일찍 어머니를 여의어 무용을 그만둘 위기도 있었지만 결코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어머니는 “무용을 계속하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그녀 곁을 떠났다.
“시간이 흐를수록 무용이 인생에 큰 도움이 돼요. 나이를 먹어도 몸을 관리할 수 있다는 점도 좋고요. 이렇게 광고 출연의 기회도 잡았잖아요(웃음). 무용은 제 삶에 가장 큰 선물이에요.”
그녀에게 무용은 곧 삶이며 힐링이다. 무용을 하는 순간만큼은 깊이 몰입할 수 있다. 어떤 운동도 발레가 주는 만족감과 쾌감은 없다고 말한다.
“작년에 교수 안식년이라 미국에 1년 정도 있었어요. 근처 학교에서 무용 수업을 받았죠. 평가도 하지 않았고 남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었어요. 그저 내 가슴속의 흥을 표현하면 그걸로 끝이었죠. 그러니 얼마나 재밌고 즐거웠겠어요. 매시간이 행복했어요.”
정 교수의 발레 예찬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녀의 고운 몸매와 미모의 비결은 1주일에 서너 번씩 빼놓지 않고 하는 발레라고 한다.
“발레를 하는 사람들은 하체가 튼튼하거든요. 그래서 나이가 들어 상체에 다소 살이 붙어도 문제없어요. 오히려 균형 감각이 더 좋아졌어요. 발레는 과학적인 운동이라 동작에 따라 관절이 좋지 않은 사람에게도, 임신부에게도 좋답니다.”
그녀가 이끄는 ‘정희자 발레단’의 교육 무용 공연 ‘이솝빌리지’가 오는 9월 23일부터 27일까지 열린다. 1부는 정통 클래식 공연, 2부는 이솝 이야기나 안데르센 동화를 이용한 공연, 3부는 관객석의 아이들이 직접 발레 동작을 해보는 체험의 시간으로 구성됐다. 이 공연은 문화체육관광부 우수 공연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제가 2000년부터 해온 교육 무용 공연이에요. 아이들이 관람하기에 일반 발레 공연은 어렵고 지루할 수 있어요. 무용을 보고 흥미를 느껴야 예술 분야에 더 많은 인재들이 나오지요. 직접 몸으로 체험하고 표현하면서 무용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상상력과 창의력이 길러지죠.”
무용은 춤과 노래가 결합된 종합예술이다. 아이들이 성인이 됐을 때 풍부한 예술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감각을 키워야 한다. 공연을 통한 자극, 그것이 문화 예술 활성화의 지름길이 아닐까.

다섯 살부터 시작한 발레는 정희자씨의 삶, 그 차제였다.
“어떤 지역의 인류학이나 민속학을 연구하러 가는 학자들은 일단 그 사람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죠. 그리고 의식처럼 같이 모여서 춤을 춥니다. 그 나라의 풍습을 이해하는 데 가장 기본 적인 것이 몸짓, 바로 춤이에요.”
반응은 매우 좋다. 아이들은 다양한 나라의 춤을 추며 전통 의상을 입어보기도 하고 같은 멜로디의 동요를 다문화 친구들을 통해 다른 나라의 언어로 불러보기도 한다. 그러면서 다문화 아이들은 성취감과 자존감이 생기고, 한국 아이들은 비로소 그들을 이해하고 소통하는 법을 배운다.
“일본, 중국, 베트남뿐만 아니라 미국, 유럽, 러시아, 아프리카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었어요. 각 나라의 문화를 체험하고 아이들은 그림을 그려요. 그걸 책으로 만들어 아이들에게 주면 어떤 책보다 소중하게 간직하죠. 큰 보람을 느낍니다.”
정희자 교수의 모습을 지켜보니 그녀가 한 것은 결코 가족을 위한 희생이 아니었다. 그녀가 만든 다양한 삶의 장면들은 겹겹이 그녀 안에 쌓여가고 있으며, 언젠가 광고에서처럼 아름다운 파노라마가 돼 많은 이들을 감동시킬 것이다. 슈퍼우먼의 비상,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글 / 이유진 기자 ■사진 / 이상헌 ■헤어&메이크업 / THE SERI(02-5286-1008) ■의상 협찬 / 이광희 부티크(02-792-6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