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조은일 - 빵점 엄마, 만점 할머니가 되다

The Lady

(7) 조은일 - 빵점 엄마, 만점 할머니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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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첫 발간 이후 「빵점엄마 백점일기」 연작 3권을 모두 베스트셀러에 올리며 한때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불량엄마’로 통했던 작가 조은일. 속 깊고 우애 좋았던 삼남매와 용감한 엄마는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을까.

처음에는 우리가 조은일(65) 작가를 ‘발견’한 줄 알았다. 1천만 관객동원에 빛나는 영화 ‘7번 방의 선물’의 아역 스타 갈소원의 외할머니가 소소한 일상이 담긴 에세이를 쓰는 블로그를 운영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이것저것 잴 것 없이 칼럼 청탁을 넣었다. 그래서 연재 타이틀도 ‘아역 배우 갈소원양의 외할머니 조은일 작가가 손녀에게 쓰는 편지’였다. 지난달 11개월의 연재를 끝으로 독자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던 작가에게 만남을 청했다. 소원이 외할머니가 아닌, 주인공으로 그녀의 자리를 내어주고 싶었다.

[The Lady](7) 조은일 - 빵점 엄마, 만점 할머니가 되다

[The Lady](7) 조은일 - 빵점 엄마, 만점 할머니가 되다

위안과 용기를 준 빵점 엄마
초여름의 캠퍼스는 싱그러웠다. 운동장 스탠드에서는 한바탕 운동을 마치고 땀을 닦는 청년들의 뿌듯한 후일담이 무성했고, 바람에 일렁이는 노란 리본 띠의 처연함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가 고개를 돌리니 넉넉한 나무 그늘 아래에서 기타를 치고 있는 무리가 보였다. 1990년대 중반 학번 기자에게 격세지감 따위는 잊어도 좋다고 말하는 듯했다. 조 작가가 지난 지방선거에서 2명의 진보 교육감을 배출한 이 대학에서 보자고 한 이유는 단지 집에서 가깝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곳이 명문입니다”라며 말문을 연 그녀는 교육부의 획일화된 대학평가의 잣대에 따라 2013년 정부재정지원 제한 대학에 포함되는 바람에 “밀알 같은 진정성 있는 학교가 존폐 위기에 처한 현실”을 한탄하며 시작부터 데시벨을 높였다. 의외의 복병을 만난 기분. 준비해온 질문이 많은데…. 걱정이 앞섰다.

대학 졸업 직후 결혼해 스물네 살에 큰딸 일영씨를 낳은 조 작가는 이후 아들 용걸씨, 막내딸 미영씨를 보았다. 미술을 전공했지만 마땅한 작업실도, 여유도 없었던 그녀가 맘껏 희롱할 수 있었던 것이 펜 한 자루였다. 3남매를 키우는 동안 겪은 일상을 담은 글을 여성지에 틈틈이 기고하다가 1992년 「빵점엄마 백점일기」를 출간했다. 반응은 뜨거웠다. 각종 매체에서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고 독자들의 등쌀에 이듬해 바로 2권을 내놓았다. 고3 딸의 도시락도 안 싸주고 늦잠을 누리며, 거문고를 전공하는 딸에게 과외 한 번 시키지 않는 별종 엄마는 대학종합평가 같은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영락없는 ‘빵점’이지만, 많은 독자들에게는 숨통을 트이게 하는 ‘용기’의 대명사였다. 당시 현역 학부형이었던 작가는 참교육을 위한 학부모회 회원으로 각종 포럼이나 캠페인 참여를 활발히 했다. 첫 번째 신조가 ‘가족 간의 소통’이었던 그녀는 아이들의 학교생활을 거의 꿰뚫고 있었다.

“어느 날 한 중학생 독자에게 전화가 왔어요. 남산도서관에서 「빵점엄마 백점일기」를 읽고 재미있어서 친구에게 보여주려고 데려왔는데, 그 책이 없더라는 거예요. 알고 보니 전교조를 옹호하는 학부모 모임 회원이 쓴 책이라서 (서가에서) ‘뽑혔다’는 거예요. 그 시절에는 그랬어요. 그런데 지금도 똑같아요. 그게 개탄스러운 거예요.”

공부하라고 닦달하기는커녕 다양한 책을 권하고, 선생님의 잘못된 교육법에 상처를 입은 딸이 등교를 거부하자 혼내기는커녕 함께 열차를 타고 불쑥 여행을 떠나는 엄마가 쓴 책은 까까머리 중학생에게도 어떤 울림을 주었나 보다. 「빵점엄마 백점일기」는 1999년 3편을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3권의 제목은 ‘대학생이 셋이에요’로 했으면 했는데, 전편의 인기 탓에 어쩔 수 없었어요. 사실 「빵점엄마 백점일기」라는 제목이 유치하잖아요. 욕심 부리지 않은 거예요. 1, 2권 때만 해도 사실 어려서 잘 몰랐던 아이들도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세계적 명작을 보고 있어’라며 읽으니까, 무안하더라고요(웃음).”

우리만의 사는 방식
그럼 그 시절 독자들이 가장 궁금해할 3남매의 근황부터 알려드려야겠다. 엄마가 정말 도시락 안 싸줬느냐는 질문에 “엄마는 아침잠이 많으시고, 어차피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 갈 준비를 하니까 엄마가 해놓은 밥 싸는 건 문제가 아니다”라고 방송에서 어른스러운 답을 했던 큰딸은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활동하다가 결혼해 두 아이의 엄마가 됐다. 짐작하는 대로 갈소원양의 엄마가 큰딸 일영씨다. “이렇게 근사한 정원에서 3년 동안 도시락만 까먹어도 인간이 달라지겠다”라며 엄마가 첫눈에 반하는 바람에 국립국악고에 진학했던 막내 미영씨는 장학생으로 들어간 대학을 휴학하고 장학금으로 배낭여행을 훌쩍 떠나는 등 역시나 남다른 청년기를 보내고 지금은 소원이의 엄하고도 살뜰한 매니저로 지내고 있다. 이렇게 세 가족은 구로구 항동에서 모여 살고 있다.

“아래층에는 둘째 딸, 우리 집에서 불빛이 보이는 위치에는 큰딸이 살아요. 적당한 거리죠. ‘국이 식지 않는 거리’라고 하던데, 일단 서로 보러 갈 때 시간이나 기름값이 안 들고요. 더 실용적인 건, 우리가 외곽에 살다 보니 파 한 뿌리 때문에라도 마트에 가야 하는데 ‘파 있는 사람?’ 하고 서로 주고받을 수 있다는 점이에요.”

여자친구를 집에 데려다주러 왔다가 서울답지 않은 풍경에 반한 큰사위가 같은 단지에 집을 얻으면서 이웃에 살게 됐고, 이후 자연스럽게 막냇사위까지 합류하게 됐다. 작가는 세 그룹의 부모가 소원이와 선우 남매를 양육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말한다. 느긋한 엄마와 아빠, 사감 선생 같은 이모와 이모부 그리고 유쾌한 외할머니까지.

“처음엔 큰사위가 일요일에 늦잠 좀 자고 싶은데 장모님 가까이에 살면 ‘와서 아침 먹어라’ 하고 부르는 게 아닐까, 걱정했대요. 그게 일반적인 반응이죠. 그런데 딸이 ‘우리가 밥을 해주면 해주었지, 엄마는 와서 밥 먹으라고 할 사람이 아니다’라고 했다네요(웃음). 오히려 기대를 안 하는 게 훨씬 좋잖아요. 각자의 생활이 있으니까. 간섭하지 않는 건 제 교육관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아들 용걸씨. 열 살 무렵 발병한 류머티즘으로 오랜 투병생활을 해오던 그와 그를 보듬는 가족의 사연은 미주 지역 「코리안 뉴스」에 연재되며 교포 독자들에게도 큰 감동을 주었다. 이후 현지 교포들의 권유로 용걸씨는 미국 달라스행을 택했다. 조 작가는 몸이 불편한 아들을 누나와 함께 비행기에 태워 보내고 앉은 자리에서 열두 시간을 하늘만 바라보았던 날을 지금도 기억한다. 거동이 불편해서 고국에서는 내내 붙박이 생활을 했던 아들은 미국에 간 지 불과 두 달 만에 엄마가 마련해주었던 비행기값 2백만원을 보내왔다. 이후 사업가로 성공을 거둔 용걸씨는 2년 전 귀국길에 올랐다.

[The Lady](7) 조은일 - 빵점 엄마, 만점 할머니가 되다

[The Lady](7) 조은일 - 빵점 엄마, 만점 할머니가 되다

“사실 책의 주인공도 아들이에요. 아들이 아프면서 가족 간의 유대가 끈끈해졌어요. 하느님이 하나의 아픔을 주시고 변하지 않는 우애를 주신 것 같아요. 하지만 너무 사적인 얘기는 하기가 그래요. 아들이 이런 얘기를 안 좋아하더라고. 이해가 가나요? 난 이해를 못했어요. 철이 없어. 회정씨, 우리가 60이 되고 70이 돼도 어른이 아니야. 인간은 어린애야. 내가 올해 대중교통을 무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나이가 됐는데, 한 번도 안 써봤어요(웃음). 잘 안 나가니까.”

나이가 들면, 세상이 보이잖아
‘경로우대’ 혜택을 처음으로 받아들었을 때의 소감이 어땠을지 궁금했는데, 조 작가는 “그냥 좋아요”라고 경쾌하게 답했다. 단지 ‘늙으면 돈이 많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 그거 한 가지가 불편하다고 했다.

“저, 종합검진 한 번도 안 받았어요. 그래서 아프면 보험 적용이 안 돼서 더 비싸다고 하던데, 그게 말이 돼요? 내가 그동안 건강해서 나라 신세 안 졌는데, 더 비싸게 받는다니! 물론 아파서 때가 되면 병원에 가야겠지만 무릎 좀 아프다고 해서 만날 병원 다니고 그건 아닌 거 같아요. 단련을 잘해야지. 제가 돈이 필요한 이유가 뭐냐면, (나이가 들면) 세상이 보이잖아? 기부를 하고 싶은 거예요. 성공회대도 살리고 싶고. 애들한테도 그랬어요. ‘이제 엄마가 사양 안 할 테니까 돈 좀 줘봐, 기부 좀 해야겠어(웃음)’라고요.”

‘연한 코발트 블루 이너 셔츠를 레이어드한 오버사이즈 티셔츠에 화이트 진, 화이트 하이톱 스니커를 매치하고 무심한 듯 연출한 헤어밴드와 선글라스, 청량감이 느껴지는 컬러의 에코백’을 든 작가에게 멋쟁이라는 수식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속물적인 게 좀 있어요. 멋을 아니까. 하지만 꼭 돈이 들어야 하나? 철없는 사람이 명품 백을 사요. 그 돈이면 한 달을 풍족하게 사는데 그 짓을 왜 하느냐고. 이런 얘기를 하면, ‘너, 정말 없어서 그러지 않냐?’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러면 ‘미안해, 난 줘도 안 가져.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라고 답하겠어요. 더욱이 동물 애호 이런 거 생각하면 가죽은 창피하지 않느냐고? 전 천 가방 참 좋아해요.”

패션의 거리가 포진해 있는 여대 출신의 두 딸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굴지의 건설회사 아파트 모델하우스 인테리어를 맡으면서 ‘이탈리아제’, ‘프랑스제’ 소품 구입을 위해 유럽을 드나들었던 일영씨도 여권 지갑 하나 명품을 쓰지 않는단다.

“자기 직업과 삶은 별개라고 생각하는 거죠. 누가 뭘 자랑해도 ‘아, 좋으네’라고 반응하지, 자신의 가치관이 올바르다고 해서 그걸 상대방에게 심어주려는 그런 건방짐이 없어요. 그냥 몸소 보여줄 뿐이죠.”

「빵점엄마 백점일기」 1권에서 “엄마, 결혼할 때 그래도 숟가락 젓가락은 해가야지요”라고 말했던 일영씨는 실제로 결혼할 때는 그조차도 해가지 않았다. 결혼 전 각자 쓰던 물건을 그대로 가져다가 신접살림을 차리고, 결혼식도 산 밑에 자리한 식당에서 가족과 친인척만 모시고 조촐하게 치렀다.

“그래도 이른바 인사성 혼수가 얼마나 들겠느냐, 평생 서운하느니 시댁에는 선물을 하자고 했더니 ‘엄마가 그렇게 하면 시댁에서도 할 텐데, 왜 상대를 괴롭히느냐’라는 식으로 얘기를 하니 제가 뭐 할 말이 있어요? 딸 아들 결혼시키면 기둥뿌리가 뽑힌다는데, 내 사전엔 그런 게 없었어요. 다행히 사돈어른들도 잘 맞으세요. 또 소원이 엄마도 시어른들한테 잘하거든요. 그러니 소원이라는 애를 선물로 받을 수밖에요.”

행복의 중심은 가족
인터뷰 중 지나가는 듯한 말로 “나의 자랑이 때로는 남에게 상처가 된다”라고 한 속내를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자녀들을 하나같이 올곧게 키워낸 비결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1번은 선천적인 심성. 아마 절반은 그럴 거예요. 2번은 가족 간의 소통과 아이들에 대한 존중. 저는 얼굴을 마주 보면 한 세대라고 해요.소원이도 저와는 한 세대예요. 같이 살다 가는 거니까. 그런데 부모의 권위 의식을 내세우면 안 되죠. 난 요즘 방송은 흥분해서 못 봐요. 시어머니와 며느리 다 갈라놓고. 대체 어느 시대 얘기를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정말 진일보하지 못해.”

혼자 힘으로 3남매를 키우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어렵게 키웠지만, 궁핍함은 몰랐다고 했다. 삶을 어떻게 사느냐에 대한 지혜가 있기 때문이었다고 믿는다. 조 작가가 가진 ‘비공식’ 기록이 하나 있다. 1984년 홍대 입구에 우리나라 최초의 북 카페를 열어 15년 이상 운영했다. 한 공간에서 책도 읽고 음악도 듣고, 차를 마시면 좋겠다는 ‘이상’을 바로 실천에 옮긴 것이다. 여럿이 함께 앉으라고 놓아둔 긴 벤치형 의자는 늘 붐볐다. 진보 인사들의 발길도 이어졌다. “딸 시집갈 때 됐는데, 너 카페 해서 되겠니?”라고 탓하는 ‘뭘 모르는’ 친구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항상 이상과 현실을 분리하잖아요. 하지만 이상이라는 걸 너무 빨리 포기하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면 이상이 이뤄지더라고요. 나는 과외를 시키고 싶지 않은데, 다른 애들 10명이 하니까 우리 애도? 이런 건 아니죠. 내가 바르면 되는 거예요.”

데뷔작이 메가히트를 친 이후 「작고 단단한 행복」, 「항동에 냉이꽃이 필까」, 「가끔은 원시인처럼 살자」 등을 발표한 조 작가는 요즘도 블로그를 통해 글쓰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내 인생 책으로 쓰면 10권도 더 나온다는 것이 우리 어머니들의 단골 레퍼토리이지만 장애인, 육아 등 조목조목 항목을 거론하며 “책 12권은 쓸 수 있다”라는 조 작가의 말은 정말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물론 요즘은 전원주택이라는 이상에 꽂혀 컴퓨터 앞에 앉으면 글쓰기보다 시골 집 찾아보는 시간이 더 많다며 배시시 웃었지만.

“제 작품들의 키워드를 굳이 말하자면 행복인데, 그 행복의 핵이 가족이에요. 책을 썼을 때는 적당히 행복한 줄 알고 사회적 이슈나 고민이 없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그게 더 보여요. 또 그걸 볼 줄 아는 노인으로 늙는 게 바람직하지. 그냥 가족 이기주의에 휩싸이는 게 아니라 가족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사랑으로부터 시작돼 사회가 얼마나 행복해질 수 있는지 알았으면 좋겠어요. 개인의 작은 행복은 자질이나 소양으로 만들 수 있어요. 가난도 값어치 있게 이겨낼 수 있고 고통도 하나의 좋은 시련이라고 견딜 수 있는데 사회적인 행복은 내 힘으로는 역부족이잖아. 사회적인 불행은 국민에게 굉장히 불행하더라고요. 내가 정치인도 아닌데 왜 이러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이런 게 조금이라도 통해야 하지 않을까요.”

나무 그림자가 한량없이 길어진 금요일 저녁, 캠퍼스의 소음도 잦아들고 있었다. 아직은 「레이디경향」을 통해 보내진 열한 통의 편지를 읽어보지 못했다는 소원이가 함께 마주 앉아 두런두런 얘기를 나눌 수 있을 무렵 이 특별한 할머니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훌쩍 자란 소원이가 등장하는 ‘7번 방의 선물’의 엔딩과 같은 장면을 상상하며 캠퍼스를 나섰다.

■글 / 장회정 기자 ■사진 / 장태규(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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