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민이 아빠,  김영오씨 그는 왜 투사가 됐을까?

유민이 아빠, 김영오씨 그는 왜 투사가 됐을까?

댓글 공유하기
지난 8월의 어느 날, 광화문 광장은 비가 내리고 있었고 날씨 탓에 오가는 인적이 드물었다. 그러나 유민양의 아버지, 김영오씨는 여전히 그 자리에 꼿꼿이 앉아 있다. 내리는 빗물로 이들의 울분과 한이 깨끗하게 씻겨 내려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를 만났다.

유민이 아빠,  김영오씨 그는 왜 투사가 됐을까?

유민이 아빠, 김영오씨 그는 왜 투사가 됐을까?

간절한 외침이 닿을 때까지
김영오씨(47)는 자동차 회사 생산직에 근무하는 평범한 가장이었다. 수학여행을 떠났던 첫째 딸 유민이가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가족에게 돌아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잊어보려고도 했다. 그는 어쨌든 남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가 광화문 광장에 앉아 스스로 곡기를 끊고 투사가 된 이유,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딸의 모습 때문이었다.

“딸아이가 억울하게 죽는 걸 눈앞에서 지켜본 거나 다름없는 것 아닙니까. 다시 일터로 돌아갔고 2주일 동안은 일을 했는데, 배 안에서 아우성치고 있는 딸아이의 모습이 상상돼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어요. 저라도 나서서 싸워보겠다고 한 것이 여기까지 왔네요.”

단식 날짜를 표시한 김영오씨 앞에 놓인 숫자는 벌써 ‘30’을 넘은 지 오래다. 정처 없이 하루하루 시간은 흐른 것 같지만 그에게는 순간순간이 생사를 넘는 고비다. 그 조마조마함은 보는 이의 가슴을 죄어올 정도다.

“배고픈 것은 물론 장기의 이곳저곳이 아파 힘듭니다. 그렇지만 그런 고통은 참을 수가 있어요. 더 힘든 것은 유족들과 국민이 요구하는 특별법이 묵살되고 있는 점이에요. 국회의원들은 유족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싸움을 하는 모습에도 진이 빠지고, 대통령은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힘들어요.”

김영오씨의 하루 일과는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씻고 정자세로 앉으며 시작된다. 그는 단식을 시작하고 제 의지로 자리에 눕거나 벽에 기대어본 적이 없다. 게다가 살이 빠지면서 갈비뼈가 장기를 찔러 가부좌도 어렵게 됐다. 때때로 지팡이를 짚으며 버티고 있다.

“눕지 않을 겁니다. 제가 힘들다고 눕게 되면 싸움에서 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제 투지가 꺾이면 지지해주셨던 국민의 마음도 약해질 수 있으니까요.”

매일 그를 찾는 수백 명의 사람들과 만나며 하루를 보내고 밤 11시가 되면 자신도 모르게 뒤로 넘어가면서 잠이 든다. 그것으로 그의 길고 고단한 하루가 끝난다. 단식을 시작하고는 한 번도 꿈을 꿔본 적이 없다고 한다. 잠깐의 휴식도, 여유도 없는 작은 전쟁터였다.

“유족들이 바라는 특별법이 제정된다면 더없이 좋겠지요. 저는 다 정리하고 집에 내려가면 되니까요. 그러나 그게 안 될 경우 저는 여기서 죽을 때까지 싸울 겁니다.”

모든 것이 해결된 뒤 그가 제일 먼저하고 싶은 일이 있다. 작은딸과 함께 ‘진짜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가는 것이란다.

“그동안 유민이를 위해 싸웠으니까 이제는 작은아이를 위해 살아야지요. 제 꿈은 그것밖에 없어요.”

그저 자식을 생각하는 우리네 평범한 가장을 누가 투사로 만들어버린 걸까? 김영오씨나 유족들이 원하는 ‘세월호 특별법’ 안에는 항간에 떠도는 보상이나 추모공원 건립, 특례입학에 대한 내용은 없다. 독립적인 수사권과 기소권을 바랄 뿐이다. 성역 없는 조사, 제2의 세월호 사태를 막기 위한 그들의 간절한 요구다.

유민이 아빠,  김영오씨 그는 왜 투사가 됐을까?

유민이 아빠, 김영오씨 그는 왜 투사가 됐을까?

모두의 힘이 하나 되어
김영오씨의 곁에는 종교인, 영화인 모임 등 각계의 사람들이 모여 단식에 동참하고 있다. 특히 가수 김장훈(47)은 그의 옆에서 수일 단식 투쟁을 함께 했다.

“감사한 일이지요. 특히 김장훈씨는 정말 큰 힘이 됐어요. 그분이 하는 이야기는 매일 같아요. ‘우리 단식이 끝나면 제일 먼저 뭐부터 먹을까요?’ 그럼 저는 ‘해물이 잔뜩 들어간 짜장면 한 그릇 먹읍시다’라고 답하죠. 늘 먹는 이야기가 1순위고요. 그다음에 특별법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죠. 고된 하루에 유일하게 웃음을 주셨지요.”

김장훈이 정치적 혹은 사회적 이슈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보고 누군가는 다른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입장은 단호했다.

“세월호로 인해 떠나간 이들의 죽음이 너무 억울하지 않나요? 저는 이번 일은 정말 목숨 걸고 하겠습니다. 이 정도 참사가 나고도 내 나라를 못 바꾼다면 다음 세대에 무엇을 물려주겠습니까? 너무 처절하고 내가 대한민국 국민인 게 불쌍해서 못살 거예요.”

김영오씨는 아플지언정 외롭지 않았다. 제주도에서, 부산에서, 전국 각지에서 그를 만나기 위해 찾아온다. 건강에 대한 기원과 승리를 염원하며 직접 만들어온 팔찌들이 그의 팔목에 채워져 있다.

“브라질 선수들이 승리를 위해 시합 전에 찬다는 팔찌를 만들어온 분들도 있고요. 자신이 끼던 묵주를 제 손가락에 끼워주고 가는 분들도 있어요. 예쁜 거 많아요. 무척 많아서 빼놓고 한곳에 모아두고 있어요.”

그중 유독 헐렁하고 낡은 팔찌 하나는 단식을 시작할 무렵 누군가가 그의 손목에 딱 맞게 채워주고 간 것이다. 이제는 세 손가락이 들어갈 정도로 공간이 생겼다. 그만큼 살이 빠진 것이다.

“유민이와 동갑이라며 멀리 남해에서 온 학생도 있었고, 유민이 닮은 예쁜 꽃을 선물한 이도 있어요. 조금이라도 아픔을 달래주고 싶다며 제 초상화를 그려오기도 하고, 밥을 먹지 않는 저를 위해 밥상 그림을 그려온 꼬마 친구도 있었죠. 뭐라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고맙고 감사해요.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를 직접 만나 위로하기도 했다. 김영오씨는 교황에게 직접 쓴 자신의 편지를 전했다.

“교황 성하께서 오시기 전에 그분에 대해 알고 싶어 관련 책을 많이 읽어봤어요. 저는 원래 무교지만 만약 이번 일이 잘된다면 성당을 한 번 가보고 싶어요. 세월호 참사를 전 세계에 알릴 기회를 주신 만큼 저에겐 가장 큰 힘이 된 분이니까요.”

얼마 전 모 국회의원은 “제대로 단식했다면 실려 갔을 것이다”이라는 실언을 했다(후에 공식 사과를 했지만). 그렇다. 그 의원의 말대로 많은 유족들이 단식을 시작했고 또 쓰러져 실려 갔다. 홀로 남은 김영오씨의 인내는 이미 몸이 아닌 정신력의 영역으로 넘어간 지 오래다. 인터뷰가 미안해질 정도로 그는 점점 기력을 잃고 있었다. 인터뷰를 한 그날 정오, 그는 세월호 특별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가 취재진을 향해 자신의 옷섶을 들춰 홀쭉해진 배와 상대적으로 넉넉해진 허리춤을 공개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두가 알 것이다. 살기 위한, 이제는 살려달라는 그 누군가를 향한 외침이다. 그 간절한 외침이 헛돼선 안 될 일이다.

취재를 마친 현재, 김영오씨는 38일째 단식을 이어가고 있다. 8월 19일 여야는 세월호 특별검사위원 중 여당이 추천한 2명에 대해 유가족과 야당의 동의를 받아 선정하기로 한 특별법에 합의했다. 그러나 유족측은 ‘우리가 거부하면 여당은 계속 재추천할 것이고, 거부와 재추천이 반복되면 제대로 된 진상규명이 어렵다’며 2차 합의안을 거부한 상태다.

■글 / 이유진 기자 ■사진 / 김성구, 경향신문 포토뱅크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Ladies' Exclusive

      Ladies' Exclusive
      TOP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