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놈은 멋있었다」,「늑대의 유혹」의 작가 ‘귀여니’가 오랜만에 새 책을 내놓았다. 그런데 익히 알려진 필명을 버리고 이윤세라는 본명을 내걸었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귀여니’ 이윤세의 터닝 포인트
2001년 한 인터넷 사이트에 ‘귀여니’란 필명으로 로맨스 소설을 연재하던 고등학교 2학년 소녀는 단숨에 10대들의 열광에 휩싸였다. 폭발적인 조회 수를 기록한 작품들은 책으로 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당대 최고의 스타가 출연하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하지만 인기와 함께 얻은 것은 부와 명예뿐만이 아니었다. 대중들의 뾰족한 시선 속에 평화롭지만은 않은 20대를 보낸 그녀는 서른을 앞둔 어느 날 훌쩍 라오스로 떠났다. ‘귀여니’가 아닌 작가 이윤세(30)로 쓴 첫 에세이 「어느 특별한 한 달, 라오스」는 새롭게 시작하고자 하는 그녀의 다짐이 담겨 있다.
“한동안 집에서 반경 5km 이상은 벗어나지 않았어요. 사람들과의 만남도 피하고 집 안에 틀어 박혀 책만 읽으며 지냈죠. 상자 안의 실험쥐처럼 단조로운 생활을 반복하며 현실을 외면하다 보니 고독이 극에 달하는 순간이 찾아오더라고요.”
20대의 마지막 여름, 슬럼프의 한가운데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이른 나이에 거둔 성공과 대중의 관심, 기대만큼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후속작 등으로 실의에 빠져 있던 그녀에게 어쩌면 필연적인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글을 쓰는 게 부담으로 다가왔어요. 이전 작품들처럼 뭔가 터뜨려야 한다는 강박 관념도 있었고요. 어떤 글을 써야 할까, 과연 온전한 내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는 고민 속에서 점차 무기력해지더라고요.”
그러던 와중에 오랜 시간 준비해오던 드라마 작업이 무산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한동안 좌절감에 빠져 있던 그녀는 더 이상 안 되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짐을 꾸렸다. 목적지는 라오스. 스스로를 찾기 위한 절박한 선택이었다.
“사실 서른이 되기 전에 배낭여행을 가고 싶다는 꿈이 있었어요.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관광 명소를 방문하는 여행 패턴에서 벗어나 혼자 발길 닿는 대로 떠돌며 예상하지 못한 세상을 만나보고 싶었죠. 목적지를 라오스로 정한 이유는 싱거울 만큼 간단했어요. 다른 나라에 비해 물가가 저렴하고 울창한 자연이 있는 곳이거든요. 다양한 문화와 사람을 접할 수 있다는 것도 결정적인 이유였죠.”
긴장과 설렘을 배낭 안에 꾹꾹 눌러 담고 도망치듯 떠난 여행. 결론부터 말하자면 라오스에서의 여정은 싱겁지도, 녹록하지도 않았다. 한낮 기온이 40℃를 육박하는 더위와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는 소나기에 땀과 비명의 연속이었고, 챙겨간 배탈약이 동이 날 정도로 배앓이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가벼운’ 역경들은 라오스가 준 선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고된 산행 후 맞닥뜨린 산악 절경과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 있는 자유, 무엇보다 정이 넘치는 천진한 사람들은 그녀에게 힐링 이상의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오랜 시간 그녀를 방황하게 했던 고민의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낯선 여행지에서 얻은 삶에 대한 깨달음
“긴팔원숭이 체험을 하러 찾아간 보케오 숲에서 장 프랑수아라는 프랑스인을 만났어요. 프랑스에서 번듯한 회사를 다니다 라오스에 와 숲을 보호하기 위해 긴팔원숭이 체험 프로그램을 만든 사람이에요. 풍족한 삶을 버리고 이곳에서 일하는 게 힘들지 않냐고 묻자 어렸을 때부터 나무 타기를 좋아했다며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 지금의 삶이 더없이 행복하고 풍족하다고 하더군요. 유쾌하게 웃는 그를 보니 가슴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울컥 치밀어 오르더라고요.”
학창 시절 그녀는 지극히 평범한 학생이었다. 굳이 남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책 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했다는 것 정도. 고등학교 때 충북 제천으로 이사를 가며 오랜 친구들과 헤어지게 됐고 새로 전학 간 학교에서 외로움을 느끼던 차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 글들이 인생의 방향을 결정지을 줄은.

‘귀여니’ 이윤세의 터닝 포인트
하지만 행운엔 대가가 뒤따랐다. 2004년 수시모집 특기자 전형으로 성균관대학교에 합격하자 특혜 시비가 일었고 예뻐진 외모를 두고 성형 논란도 겪었다. 2011년 서울종합예술실용학교 방송구성작가예능학부 겸임교수로 임용됐을 때도 인터넷에서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제가 직접적으로 얼굴이 알려진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알아보는 분들은 안 계셨지만 인터넷에 악플이 정말 많았어요. 한 번은 학교 수업시간에 인터넷 화면을 스크린에 띄웠는데 검색어에 ‘귀여니’가 올라와 있는 거예요. 그걸 보자마자 얼마나 놀랐는지…. 심장이 튀어나올 듯 뛰더라고요. 저에 대해 긍정적인 시선보다 부정적인 시선이 많다는 건 알아요. 그것 때문에 위축되기도 했었고요. 이번 여행을 통해 남들이 칭찬하고 인정하는 삶이 아닌 스스로 진정 원하는 일을 하며 사는 삶이 특별하고 가치 있는 인생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어느 특별한 한 달, 라오스」에는 ‘귀여니’가 아닌 이윤세로서 낯선 곳에서 만난 인생의 깨달음과 초보 배낭여행자의 여정을 담았다. 글이 써지지 않아 떠난 여행. 그런데 다녀오고 나니 그토록 두려웠던 백지가 술술 채워지더란다. 그동안의 소설들이 ‘귀여니’라는 가면을 쓰고 썼던 글이라면 이 책은 이윤세의 맨얼굴로 쓴 글이다. 픽션과는 분명 다른 부분이 있지만 역시나 곳곳에 그녀의 스타일이 묻어난다. 아련하게 곱씹으며 회상하기보다는 유쾌하고 가볍게, 훌훌 책장이 넘어간다.
“이제 제 나이에 맞는 이야기를 써볼까 해요. 제가 작가로서 사랑받았던 것이 10대 하이틴 소설이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그걸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감수성이라는 것이 억지로 붙잡을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제가 10대였기 때문에 쓸 수 있었던 글이었던 거죠. 지금은 지금의 감수성대로 그에 맞는 글을 써야 한다는 걸 인정하게 됐어요. 사실 지금 쓰고 있는 이야기가 있어요. 말로 하는 것보다 글로 보여드리는 게 맞는 거겠죠.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제 또래들이 공감할 수 있는 새로운 글로 찾아뵐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글 / 이유진 기자 ■사진 / 김성구, 경향신문 포토뱅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