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방한 일정에서 세월호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에 대한 교황의 위로는 기대보다 훨씬 비중이 컸다. AP통신은 교황 방한을 정리하는 기사에서 8월 16일 광화문광장 시복식에 앞서 카퍼레이드를 하던 교황이 차에서 내려 세월호 유가족의 손을 잡고 이야기를 들어준 장면을 ‘하이라이트’로 꼽았다. 교황은 세월호 희생자 고 이승현군의 아버지 이호진씨에게 직접 세례를 줄 때도 “인간적인 고통 앞에 서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게 된다”라며 “어떤 이들은 이를 두고 정치적인 이유로 그렇게 한다고 여기겠지만 희생자 가족을 위로하면서 우리는 연대할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세월호 희생자들을 기리는 노란 리본 배지는 방한 내내 교황의 왼쪽 가슴 위에 달려 있었다. 8월 18일 서울공항에서 전세기를 타고 바티칸으로 돌아간 교황은 비행기 내에서 방한 소회를 밝히는 기자회견에서도 이 배지를 달고 있었다. 한 기자가 교황에게 “세월호 추모 행동이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라고 묻자 (세월호 추모) 리본을 유족에게서 받아 달았는데 반나절쯤 지나자 어떤 사람이 내게 와서 “중립을 지켜야 하니 그것을 떼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인간적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다’라고 말해줬습니다”라고 대답했다.
4박 5일간의 일정을 마치고 한국을 떠나며 마지막으로 남긴 메시지는 세월호 실종자 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교황은 시신을 찾지 못해 진도 팽목항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세월호 실종자 가족들에게 편지와 묵주를 선물했다. 방한 일정 중 팽목항을 찾지 못한 미안함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교황의 위로는 의례적인 듯하면서도 깊었다.
“세월호 참사 실종자 가족 여러분, 직접 찾아뵙고 위로의 마음 전하지 못함을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번 한국 방문 기간 내내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과 실종자들 그리고 그 가족들을 위한 기도를 잊지 않았습니다. 다만 아직도 희생자들을 품에 안지 못해 크나큰 고통 속에 계신 실종자 가족들을 위한 위로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편지에서 아직 돌아오지 못한 10명의 실종자 이름을 일일이 부르며 하루빨리 부모와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보살펴달라고 기도했다. “실종자 가족 여러분, 힘내세요! 실종자 가족 여러분, 사랑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편지 마지막에는 교황이란 표현 대신 ‘Servus Servorum(종들의 종) 프란치스코’라고 적은 뒤 자필로 서명했다.
교황의 위로는 그들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모르던, 점차 무관심해져가던 우리에게도 큰 힘이 됐다. 세월호 참사로 상처받은 한국 국민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전한 교황은 8월 15일 성모승천대축일 미사에서 세월호 가족들을 위해 삼종기도를 올렸다.
“이 비극적인 사건을 통해서 모든 한국 사람들이 슬픔 속에 하나가 됐으니, 공동선을 위해 연대하고 협력하는 그들의 헌신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게 정상이죠. 우리는 정상적인 것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이번 방한 때 여러 번 카메라에 잡힌 장면 중 하나는 교황이 낡은 검은색 가방을 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보통 수행원이 가방을 들어주는 모습을 익숙하게 봐오던 우리에게는 낯선 풍경이었다. 해외 순방 때 짐 가방을 직접 들고 다니는 교황에게 이유를 묻자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게 정상이죠. 우리는 정상적인 것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그는 버스를 즐겨 타고 소박한 20유로짜리 은 십자가를 지니며 자신의 생일에 노숙인을 초청해 식사를 한다. 방한길에 오르는 교황을 위해 로마 피우미치노 공항으로 화동(花童)을 보내겠다는 주바티칸 한국대사관 측 제안을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다”라며 정중히 거절했다.
‘한국에서 가장 작은 차’를 타고 싶다며 ‘쏘울’을 타고 다녔던 교황. 그의 소박함은 8월 16일 평신도들과 만난 꽃동네 ‘사랑의 영성원’에서도 빛났다. 천주교 청주교구에서 교황을 위해 근사한 나무 의자를 제작해 제단 앞에 내놓았지만 교황 도착 15분 전 교황청 관계자들이 찾아와 의자를 평범한 것으로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청주교구 측은 부랴부랴 나무 의자를 치우고 1층 식당에서 사용하는 낡은 의자를 대신 가져왔다. 이 식당 의자는 구입한 지 10여 년이 된 베트남산 제품이었다.
교황은 이번 방문에 전속 요리사를 데려오지 않았다. 식사는 숙소인 주한교황청대사관 내 구내식당에서 간소하게 해결했다. 교황이 먹는 빵은 유럽에서 흔히 끼니로 먹는 이탤리언식 치아바타와 프랑스식 바게트였다. 그는 4박 5일간 지어진 지 50년이 넘은 낡은 2층 건물, 주한교황청대사관에서 지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위엄과는 거리가 멀었다. 생각지도 못한 유머로 긴장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곤 했다. 8월 15일 교황은 성모승천대축일 미사를 집전하기 위해 서울에서 대전 월드컵경기장까지 당초 헬기로 이동할 예정이었으나 기상 악화로 KTX를 이용했다. 대전역에서 최연혜 코레일 사장의 영접을 받고 교황은 “헬기가 뜨지 못하게 어젯밤에 구름 불러온 사장님이군요”라고 농담을 던졌다. 꽃동네 호스피스 병동에서 11개월째 봉사하고 있는 의사인 아르헨티나 교포 임지형씨가 교황에게 스페인어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왔다”라고 하자,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런데 여기서 뭐 하고 있느냐?”라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꽃동네에서 한국 수도 공동체와 만났을 때는 바로 앞 일정이 길어져 예정됐던 기도가 생략됐다. 미리 준비된 원고에 기도를 한 것으로 돼 있자 교황은 즉석에서 “이 저녁 기도를 바치며, 우리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아니, 부를 뻔했습니다”라고 바꿔 말해 4천3백여 명의 수도자들을 웃게 만들었다.
4박 5일 동안 교황을 보좌하며 그를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봤던 강우일 주교(방한준비위원장)는 “유머 중에서 가장 차원 높은 유머가 자기 자신을 희화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교종(교황)께서 우리를 웃겨주시는 방법이 굉장히 독특했다”라며 방한 첫날인 8월 14일 서울 광진구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한국 주교단을 만났던 이야기를 꺼냈다. 한국 주교단이 교황 방문 기념으로 서명을 요청하기 위해서 큰 마분지로 된 방명록을 준비했는데, 왼쪽에는 교황의 문장을 그려놓았고 서명을 위해 오른쪽 전면을 비워놓았다. 강 주교가 교황에게 방명록을 내밀자 교황은 탁자 위에 놓인 방명록에 정성껏 서명을 했다. 그런데 교황의 서명이 끝날 무렵 주교들의 웃음이 터졌다. 커다란 크기의 방명록 한구석에 별다른 코멘트 없이 아주 작은 글씨로 ‘Francisco(프란치스코)’라고 썼기 때문이다. 강 주교는 “한쪽 귀퉁이에 돋보기를 써야 보일까 말까 한 서명이었다”라며 “보통은 큰 글자로 썼을 텐데 일부러 조그맣게 쓰신 것은 성인 프란치스코가 다른 사람 앞에 겸손하게 드러나려고 애썼던 것처럼 당신이 큰 인물로 드러나는 걸 원치 않기 때문인 것 같다”라고 말했다.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결과입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한국 상황을 의식한 듯 그는 평화의 메시지를 여러 번 강조했다. 마지막 냉전의 산물이자 유일한 분단국가인 한반도에서 남북의 화해를 주문한 것이다. 교황은 8월 14일 서울공항에 도착해 박근혜 대통령의 영접을 받는 자리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화해를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왔다”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이 “교황 방한을 계기로 국민에게 따뜻한 위로가 전해지고 분단과 대립의 한반도에 평화와 화해의 시대가 열리길 바란다”라고 전한 인사말에 대한 화답이었다. 그는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결과’”라고 강조하며 “정의는 상호 존중과 이해와 화해의 토대를 건설하는 가운데 서로에게 유익한 목표를 세우고 이루어가겠다는 의지를 요구한다”라고 말했다. 명동성당에서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를 집전할 때는 “죄 지은 형제들을 아무런 남김없이 용서하라”라고 강조했다. 그는 “주님은 ‘형제가 죄를 지으면 일곱 번이나 용서해줘야 하냐’라고 베드로가 묻자,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라며 “만일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면 우리가 어떻게 평화와 화해를 위해 정직한 기도를 바칠 수 있겠느냐”라고 말했다.
물질주의를 비판하면서 빈부 격차를 극복하고 인간 중심의 경제를 회복하자는 메시지 또한 빼놓지 않았다. 교황은 “이 나라의 그리스도인들이 올바른 정신적 가치와 문화를 짓누르는 물질주의의 유혹에 맞서, 그리고 이기주의와 분열을 일으키는 무한 경쟁의 사조에 맞서 싸우기를 빈다”라며 “새로운 형태의 가난을 만들어내고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비인간적인 경제 모델들을 거부하기를 빈다”라고 말했다. 또 “생명이신 하느님과 하느님의 모상을 경시하고, 모든 남성과 여성과 어린이의 존엄성을 모독하는 죽음의 문화를 배척하기를 빈다”라고 덧붙였다.
“삶이란 혼자서는 갈 수 없는 길이다”
교황은 원래 8월 16일 꽃동네 장애인과의 만남에 취재진이 들어오는 걸 원치 않았다. 주최 측은 행사 시작 전 사진기자들에게 “교황님이 장애인들의 사진을 많이 찍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행사 중간에 나가라고 할 수 있다”라고 전하기도 했다. 교황 방한준비위 홍보분과 부위원장 이정주 신부는 “장애인과의 만남을 촬영하는 걸 원치 않는다고 했는데 언론의 지속적 요청에 결국 문을 열어준 것 같다”라며 “장애인에 대한 교황의 생각이 드러나는 대목이다”라고 말했다. 이날 원래 교황은 장애 아동들을 바라보면서 정면에 놓인 의자에 앉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의자에 앉으라는 꽃동네 측의 권유를 물리치고 아이들 쪽에 나란히 서서 장애 아동들의 공연을 따뜻한 눈길로 지켜봤다. 교황의 목에는 장애 아동이 건넨 화환이 걸려 있었다.
장애 아동들이 공연을 펼치다 교황에게 와락 안기자 뽀뽀를 해주기도 했다. 공연이 끝날 때 어린이들이 “사랑합니다”라고 외치며 손을 머리 위로 올려 하트를 그리자 교황은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자신도 머리 위로 하트를 그려 보였다. 교황은 희망의 집에서 50여 분 동안 머물며 휠체어에 앉아 있거나 비스듬히 누워 있는 장애인들, 두 다리를 쓰지 못해 바닥에 앉아 있는 장애 아동들의 머리에 일일이 손을 얹고 성호를 그으며 축복했다. 원래 희망의 집에 머물기로 예정된 시간보다 15분 이상 초과됐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장애인 한 명 한 명을 다 안아줬다. 교황청 대변인 롬바르디 신부는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모든 이들과 인사를 나누느라 다음 일정이 좀 늦어졌지만 인사 나누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라고 전했다.
8월 18일 로마에 도착한 교황은 치암피노 공항에서 바티칸으로 가는 길에 산타마리아 마지오레 대성당에 들러 성모상 앞에 꽃다발을 올렸다. 이 꽃다발은 교황이 서울의 명동성당 미사를 집전하러 가는 길에 7세 소녀에게 받은 것이다. 교황은 이 소녀에게 “로마로 가져가 성모님께 드리겠다”라고 약속했고,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이 약속을 지켰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남긴 말
4박 5일간의 방한 기간 동안 프란치스코 교황은 수많은 메시지를 쏟아냈다. 공식 강론과 연설 10차례, 비공식 연설 2차례를 합쳐 총 12차례의 스피치에서 들려준 의미 깊은 어록을 정리했다.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다. 가슴이 아프다.”
-서울공항 환영식에서 세월호 참사 유족과의 만남에서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결과’이다.” -청와대 연설에서
“교회가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면
가난한 자를 잊는 경향이 있다.” -한국주교단 연설에서
8월 15일
“새로운 형태의 가난을 만들고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비인간적인 경제 모델들을
거부하기를 빈다.” -성모승천대축일 강론에서
“세상 흐름을 벗어나서 앞으로 나아가라.”
-아시아 청년대표 오찬에서
“남북이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데서
통일의 희망을 느낀다.” -아시아 청년들과의 대화에서
8월 16일
“순교자들의 유산은 온 세계에서 평화와
진정한 인간 가치를 수호하는 데 이바지하게 될 것.”
-124위 시복미사에서
“청빈은 봉헌 생활을 지켜주는 방벽이고,
올바른 길로 이끄는 어머니다.” -수도자들과의 만남에서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평신도들과의 만남에서
8월 17일
“우리의 대화가 독백이 되지 않으려면
생각과 마음을 열어야 한다.” -아시아 주교들과의 만남에서
“깨어 있으라. 잠들어 있는 사람은 기뻐하거나
춤추거나 환호할 수 없다.” -아시아 청년대회 폐막미사 에서
8월 18일
“삶이란 혼자서는 갈 수 없는 길이다.”
-한국 종교 지도자들과의 만남에서
“죄 지은 형제를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에서
■기획 / 노정연 기자 ■글 / 임아영 기자(경향신문 문화부)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