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ady]거룩한 내리사랑, 권오남
사랑 듬뿍 받은 며느리
7년 전인가, 10년 전인가. 시작부터 다섯째 딸 조정원씨와 할머니의 기억의 아귀가 안 맞았다.
“벌써 10년이나 됐네. 어른 계실 때는 내가 바깥 활동을 못했어요. (시)어머니가 백 살에 돌아가셨거든.”
곧바로 조정원씨가 99세에 돌아가셨다고 바로잡아주었다. 천수까지 불과 몇 달을 남기고 떠난 시어머니 얘기가 나오자 질곡의 시집살이 레퍼토리가 시작되려나 보다 했다. 장수를 누린 시어머니에 대한 찬탄 한편으로 며느리를 향한 안쓰러움이 드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난 시집살이를 안 했어요. 6남매를 키우면서도 기저귀 한 번 안 빨아본 사람이야. (시)어머니가 다 해주셨지. 나는 가게에서 밤늦도록 있는 일이 많으니까 (시)어머니가 아침에 일어나서 애들 다 깨우고 도시락까지 싸서 챙겨주셨는데, 바깥에서는 내가 감옥살이를 했다는 거예요(웃음).”
아무리 담장 너머 사정은 잘 모르는 법이라지만, 애정 듬뿍 받으며 살고 있는 며느리가 시집살이 혹독하게 하는 외며느리로 소문나는 것, 뭐 그 시절엔 아주 없는 일도 아니다. 꾸며내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을 듯한 충만한 행복감을 보여주는 할머니의 표정은 사랑 듬뿍 받은 며느리와 아내 그리고 엄마의 훈장이나 다름없었다. 난다 긴다 하는 여배우들을 밥 먹듯이 보았던 우미관(우리나라 최초의 상설영화관) 영사 기사가 그 미모에 반해 한눈에 며느릿감으로 낙점한 주인공이 바로 할머니였다. 하지만 서울의 정부미를 다 찧다시피 한 원당의 큰 방앗간집 주인이 그리 쉽게 맏딸을 내어줄 리 없었다. 서울서 대학 나온 사윗감과 시골에서 소학교밖에 안 나온 딸이 어울릴 리 만무하다는 것도 반대 명분 중 하나였다.
“지금이야 원당이 가깝지만, 그때만 해도 (서울서 오려면) 50, 60리 길이었다고. (남편은) 구파발역이나 능곡역에서 내려서 10리 길을 걸어왔어요. 그렇게 와서 잠깐 보고 밥 한 끼 먹고 가는 거지. 연애 기간이 어딨어요? 우리 아버지가 반대를 하시니까, 우리 집에서도 못 만나고 모퉁이에 있는 고모 집에서 만나고 갔지요.”
먼 길을 마다 않고 꾸준히 찾아오는 사윗감의 정성에 감복한 친정아버지가 결혼을 허락한 뒤 비로소 할머니는 처음으로 누하동 이 집의 문턱을 넘었다. 할머니가 그토록 고집스레 지켜낸 집의 첫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나 보다. 비록 시골이지만 넓은 집에서 살던 할머니에게 서촌의 ‘ㅁ’자 한옥은 옹색하기 그지없었다.
“그때는 저쪽의 방도 없었어요. 내가 시집온 뒤로 늘렸잖아. 또 문짝도 창고에나 쓸 법한 것들이었어요. 지금의 여닫이문도 다 살면서 영감이 기술을 부린 거지요.”
[The Lady]거룩한 내리사랑, 권오남
할머니는 서울 시내 유일했던 서대문 건설예식장에서 면사포를 썼다. 당시 ‘있는’ 집에서만 예복으로 입었다는 하얀 ‘뉴똥’ 한복은 지금도 할머니의 자랑. 어렵게 얻은 며느리 대접은 각별했다. 연탄광도 새로 마련하고 건넌방을 넓히는 불법 개조도 서슴지 않았던 시아버지는 연탄가스만 맡으면 두통에 시달리는 며느리를 위해 연탄불 가는 일도 도맡아 하셨다. 친척 생일잔치 갈 일이 있어도 마나님이 아니라 며느리를 앞세워서 가실 정도였다.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지만, 한편으로 걱정이 앞서는 것은 왜일까. “우리 할머니는 아들 하나를 보셨는데, 며느리가 들어와서 6남매를 낳았으니 얼마나 좋았겠어요. 그래서 어머니를 더 예뻐하셨어요.” 눈치 빠른 딸 조정원씨가 먼저 대꾸한다.
“내가 고단해서 잠을 자고 있으면 (시)어머니가 애를 안고 들어와서 젖을 먹이고는 데려가서 노시고 그랬다고. 난 그것도 모르고 잤어요.”
외아들이 나쁜 쪽으로 빠질까 봐 밤낮 단속을 하신 덕분에 동네에서는 ‘호랭이 할머니’로 소문이 났지만 며느리에게는 한없이 푸근하셨단다. 지난 1997년 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부터 고부는 두 손을 꼭 잡고 잠자리에 드는, 세상에 둘도 없는 사이가 됐다. 고부 갈등은 없었느냐는 물음에 할머니는 이렇게 답했다. “난 그런 거 없이 살았어요. 처음부터 가실 때까지.”
“치매기가 처음 나타났을 때, (시)어머니가 ‘너 절대 대문 밖에 나가서 아무와도 얘기하지 마라’라고 하셨어요. 그때는 가게에 세를 줘서 수선방이 있었는데 그 집 아범하고도 절대 수다 떨지 말라고요. 내가 바람이 날까 봐 걱정을 하신 거야(웃음). 그러곤 ‘내가 좋은 집 사서, 좋은 신랑 얻어서 너한테 잘해줄 거다’라고 하셨는데, 그게 제 나이 70이, 어머니가 90이 넘었을 때 얘기예요(웃음).”
치매 어르신 뒷바라지를 한 번도 힘들다 생각한 적이 없었다. “저년이 나를 죽이려고 저런다”라며 기저귀 채우기를 거부하는 시어머니를 설득하는 데만 일주일이 걸렸다. 할머니는 외려 3번의 수술과 6남매 해산 뒷바라지를 정성껏 해준 시어머니의 은혜를 떠올렸다.
“다른 건 크게 고생 안 하셨는데, 욕창이 생겨서 아침저녁으로 그걸 치료하느라 세월을 보냈어요. 그래도 그게 아프다고는 하지 않았어요. 오줌똥 싸서 뭉개거나 그런 일도 한 번 없으셨어요. 내가 항상 그랬어요. 어머니, 그런 거 신경 쓰지 마시라고. 우리 아이들 6남매 오줌똥 다 받아내셨는데, 나 조금도 싫어하지 않고 애기한테 하듯이 도와드릴 거라고. … 크게 고생한 건 없어요. 그냥 곱게 방에 계셨고. 내가 친구니까.”
이 공간에 들어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머리를 숙여 통과해야 하는 작은 문 위에는 할머니의 시어머니 사진이 걸려 있다. “참 인자하게 생기셨잖아요?”라고 할머니는 동의를 구하듯 물었다. 이것으로 지금은 북 카페로 변한 대오서점에 걸린 숱한 사진 중 한 장에 얽힌 사연 하나에 마침표가 찍힌다.
“영감이 돌아가시고 나 혼자 있었다면, 여기 혼자서 오래 못 있지. 아들이나 딸한테 가거나 했을 텐데 (시)어머니가 더 사셨잖아요. 그래서 이 집을 오래 끌고 올 수 있었던 거예요. 어디 가고 싶은 생각도 없이.”
[The Lady]거룩한 내리사랑, 권오남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딸 조정원씨의 기억으로는 상대 출신인 것으로!) 세무서 공무원이 된 청년 조대식씨는 군대에서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일찌감치 전역을 했다. 하지만 전쟁으로 문이 닫힌 세무서가 좀처럼 문을 열 조짐이 보이지 않자 동네 고물과 책을 모아서 장사를 시작했다. 전쟁 이후 물물교환이 활발해지며 제법 돈을 모았다. 덕분에 수복 후 누하동에 가게 한 칸까지 딸린 작은 한옥을 마련할 수 있었다. 원당 출신의 아담하고 예쁜 신부까지 얻은 그는 1951년, 부부의 이름에서 각각 한 자씩 따서 ‘대오서점’이라는 헌책방을 차렸다. 선반이고, 찬장이고 사람 다닐 수 있는 통로를 제외하고 이 집의 모든 공간이 책으로 채워졌다. 손님이라 해봤자 학생들이 대부분. 크게 장사가 잘되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집세를 안 내는 덕분에 끼니 걱정은 안 하고 살았다. 결혼 전 서른두 살까지 이 집에 살았던 딸 조정원씨는 “책이라면 지겹지만 그래도 참고서 걱정은 안 하고 살았다”라고 전했다. 한때는 시부모님과 부부, 6남매에 식모살이를 하는 시골 소녀까지 10명이 넘는 식솔로 복닥거렸던 대오서점은 서서히 시대의 흐름을 온몸으로 겪었다.
“컴퓨터 나오고 나서 차츰차츰 장사가 안 됐어요. 또 엄마들이 아이를 하나둘밖에 안 키우니까 새 책을 사준단 말이에요. 요즘은 아무리 새것 같은 책이라도 남들이 보던 거 준다고 하면 싫어한대요. 그래서 준다는 소리도 못한다고 하더라고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자식들은 자연스럽게 정리 수순을 밟았다. 지금은 카페 카운터가 있는 작은 공간에서만 8톤 트럭 한 대 분량의 책이 나왔다. 하지만 할머니는 극구 이 집을 떠나지 않겠다고 고집했다. 마침 겨울이라 일단 서점 정리 작업이 보류된 틈을 타 할머니는 다시 ‘대오서점’ 간판을 내걸었다. 그리고 기적 같은 일이 생겼다. 시대에 뒤떨어진 오래된 동네 서촌이 고즈넉하고 운치 있는 명소로 소문이 나며 방문객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할머니도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 계시는 집에 자꾸 사람들이 들어오니까 처음엔 무서웠어요. 어서 집을 팔고 이사 가자고 식구들이 전부 꼬드겨도 어머니가 절대 안 나가겠다고 하셨어요. 수원 아들 집에 모셔놔도 어느새 다시 이 집으로 돌아오셨죠. 마침 보일러가 고장이 나서 이사를 추진하는 사이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돼 팔거나 손을 볼 수 없는 상황이 된 거죠.”
자식들이 어머니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이 집을 유지하는 방책으로 생각해낸 것이 북 카페다. 태국에서 살던 조정원씨가 미국 유학 중이던 아들 장재훈씨에게 SOS를 청했고, 이들 모자가 가세해 정식으로 카페 오픈을 선언한 것이 지난해 말이다.
[The Lady]거룩한 내리사랑, 권오남
“재훈이가 작년 여름방학 동안 가게 한쪽에서 땡모반이라고 태국에서 먹던 수박주스를 팔아서 1백만원을 벌었어요. 그중 20만원으로 외할머니 선물을 드리고 싶다고 해서, 어머니한테 뭘 받고 싶냐고 물었더니 떡을 해서 동네에 돌리래요. 그래서 이왕 떡 하는 거 할머니 몇 분 초대해서 음악회를 했는데, 무척 재밌게 놀고 가시는 거예요. 어머니도 좋아하시고 대접하는 우리도 즐거웠고요.”
그렇게 시작된 대오서점의 이벤트는 이제 ‘꽃할매잔치’라는 이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할머니들과 어떻게 하면 더 재밌게 놀 수 있을까, 궁리 끝에 나온 두 번째 행사는 다듬이질대회. 안마당 평상에서 한 판 다듬이질 경연이 펼쳐지는 동안 부엌에서는 지글지글 빈대떡이 익어갔다. 동네 아이들이 자원봉사자로 한몫 거들며 잔치는 더욱 흥이 났다. 그 참에 아이들이 장기자랑을 하고 동네 할머니들이 심사위원으로 채점도 하고 상도 주는 재롱잔치도 열었다. 모두가 즐거워지는 이벤트 아이디어는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재즈를 전공하는 장재훈씨가 주축이 돼 대오서점에서 인연을 맺은 뮤지션 손님들과 열고 있는 평상음악회는 벌써 6회를 넘겼다.
“내가 좀 수다스럽고 번잡스러운지, 또 애들을 많이 상대해서 그런지 아는 아이를 만나면 그냥 지나쳐버릴 수가 없어요. 그런데 요새는 애들이 지나가다가 아는 할머니를 만나도 인사를 안 해. (행사 이후로) 많이 바뀌었죠. 몰랐던 사람도 만나고 친구도 사귀었어요. 이제는 아이들이 ‘대오서점 할머니지요?’라고 알은체를 해요. 내가 이렇게 오래 유지하고 있는 게 고마울 때가 있구나, 하죠.”
이제는 판매용이 아니라 장식용이 된 헌책 더미 속에서도 할머니는 사라진 국사교과서 한 권의 부재를 용케 알아챘다. “읽을 새도 없었지만 밤낮 조느라 책 한 권 읽어본 적이 없다”라고 했지만 헌책 한 권 한 권은 여전히 할머니의 보물이었다.
“나는 구닥다리가 돼서 옛날 거를 안 버리고 모아두는 성질이 있는데, 요즘은 안 그렇더라고. 이제야 골동품이니 뭐니 하면서 챙기지만 전에는 그런 걸 몰라서 죄다 버렸잖아요. 오죽하면 옛날에 할머니들이 ‘난 언제 갖다버리니?’라고 했겠어요(웃음). 무턱대고 버리지만 말고 물건도 옛것을 소중하게 여겼으면 좋겠어요.”
사직공원에서 게이트볼 연습을 하지 않는 날이면 손으로 가리키면 보이는 위치에 있는 집에서 매일 출퇴근하는 할머니는 북 카페를 찾은 손님의 요청에 자연스레 포즈를 취할 줄도 알게 됐다. 그러곤 “… 그래서 옥자는 결국 결혼을 했어요”라며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신다. 대오서점을 찾는다면 풍금 위에 걸려 있는 오래된 흑백사진 한 장을 꼭 찾아보길. 영화 ‘내 마음속의 풍금’ 못지않은 사랑을 했던 할머니의 원당소학교 동창 옥자 할머니의 로맨스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을 테니.
■글 / 장회정 기자 ■사진 / 김성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