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가장 화제가 된 스포츠는 단언컨대 펜싱이다. 축구와 야구를 제외한 나머지 종목의 경기 중계 중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그 인기를 입증했다.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종합 2위를 차지하는 저력을 보인 한국 펜싱. 이번 인천 아시안게임에서는 금메달 8개를 포함해 총 17개의 메달을 획득하며 명실상부한 효자 종목으로 자리매김했다.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남자 플뢰레 종목의 허준(27, 로러스펜싱클럽 소속) 선수. 서울체고와 대구대학교를 졸업하고 2013·2014 아시아선수권대회를 석권한 국가대표팀의 에이스로, 실력은 물론 빼어난 외모까지 겸비했다. 인천 아시안게임을 끝낸 뒤 해외 전지훈련을 앞두고 있는 그를 만났다.
우선 인천 아시안게임 은메달 획득을 축하해요. 박빙의 승부였는데 경기 도중 허벅지 부상을 당한 타격이 컸던 것 같아요. 살짝 아쉬운 마음도 있죠? 경기 끝나고 잠을 못 잤어요. 억울하고 분해서(웃음). 그렇지만 메달 색깔이 전부는 아니니까 나름의 성과에 만족합니다.
요즘 펜싱의 인기가 대단해요. 미남 검객 허준씨도 인기에 크게 기여하는 것 같습니다. 정말 감사하죠. 사실 펜싱이 축구나 야구처럼 인기 있는 종목이 아니거든요. 늘 텅 빈 경기장에서 시합하다가 이번 아시안게임 때 관중석이 꽉 찬 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점수를 낼 때마다 환호해주는 팬들 덕분에 힘이 많이 됐습니다. 미남이라는 칭찬은 그저 감사히 듣겠습니다(웃음).
인터뷰를 준비하며 펜싱 공부를 하느라 머리가 좀 아팠습니다. 유럽에서 시작한 스포츠, 어려운 용어 때문에 그동안 펜싱을 낯설게 느꼈던 분들이 많아요. 펜싱은 유럽 국가나 가문 간의 전투에서 사용되던 검술에서 시작된 스포츠예요. 쉽게 말해 영화 ‘삼총사’에 나오는 검투사들의 칼싸움을 떠올리면 됩니다. 종주국이 프랑스라 모든 경기 용어는 프랑스어예요. 그래서 어렵게 느껴지셨을 거예요(웃음).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김영호(현 로러스 감독) 선배님께서 아시아인 최초로 금메달을 따기 전까지 펜싱은 동양인에게 불모지나 다름없었습니다. 유럽 선수들의 텃세로 어려운 시절을 보내기도 했고요. 국내에서도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종합 2위라는 쾌거를 이뤄내기 전까지 비인기 종목으로 외면받아온 게 안타까운 현실이었습니다.
비인기 종목 선수로서 힘들었던 점은요?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때는 반짝 인기를 끌다가 화제가 되는 국제 경기가 없으면 관심이나 성원도 뚝 끊기죠. 보통 때는 경기장에도 일반 관중은 거의 없고 다들 펜싱 관계자들뿐이에요. 유럽에서는 중요한 시합이 있는 날이면 대통령도 경기 관람을 할 정도로 인기 있는 종목인데, 국내는 전혀 그렇지 않으니 가끔은 속상할 때도 있습니다.
허준씨가 속한 남자 플뢰레 부문의 특징은 뭔가요? 플뢰레는 주로 성(城)의 복도나 비좁은 공간에서 하던 칼싸움이에요. 팔과 다리, 머리를 제외한 가슴 부분만 칼끝으로 찔러 득점을 내는 종목입니다. 프랑스어로는 ‘꽃’이라는 뜻인데, 그래서 플뢰레 종목을 펜싱의 꽃이라고도 하죠. 어느 부위를 찌르고, 칼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플뢰레 외에도 상체를 베거나 찌르는 사브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을 공격하는 에페 등으로 구분됩니다.
상대의 허를 찌르는 펜싱의 매력
펜싱은 지적인 스포츠다. 선수의 신체 조건보다 두뇌와 전략이 더욱 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0.1초도 안 되는 순간의 판단이 승패를 좌우한다. 그래서 펜싱 선수는 상대방의 생각을 한 수 먼저 읽어내는 능력이 필요하다. 실제로 하버드대, 스탠퍼드대, 예일대, 프린스턴대 등 아이비리그 명문대 펜싱팀이 각종 세계 대회를 휩쓴다고 한다.
선수로서 펜싱의 매력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펜싱은 ‘바둑’과 비슷해요. 상대보다 한 수 더 생각해야 하죠. 공격이 들어왔을 때 상대방이 어떻게 피하고 반격할지 치밀하게 계산해서 칼을 찌릅니다. 그래서 펜싱 선수들이 대부분 머리가 좋은 편이에요. 물론 저를 포함해서(웃음). 짧은 시간에 상대방의 허점을 파악해야 하니 순발력도 필요해요. 본인이 가지고 있는 신체 조건이 불리해도 얼마든지 전략을 잘 세우면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매력적입니다.
요즘은 일반인들도 펜싱을 많이 배우고 있어요. 건강에 도움이 많이 돼요. 펜싱 경기가 끝난 뒤 마스크를 벗는 선수들을 보면 땀에 흠뻑 젖어 있는데, 그것만 봐도 체력 소모가 얼마나 큰 스포츠인지 알 수 있을 거예요. 유산소운동은 물론 전신의 근력을 키우는 데도 펜싱만 한 운동이 없어요. 참, 여자분들 다이어트에도 강력 추천합니다.
다이어트 이야기에 솔깃해지는데요(웃음). 펜싱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 저희 아버지께서는 그림을, 어머니께서는 음악을 전공하셨습니다. 두 분 모두 정적인 일을 하셨지만 저는 반대로 동적인 걸 좋아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운동에 소질이 있었고 지기 싫어하는 성격도 한몫해 웬만한 운동은 다 잘하는 편이었어요. 펜싱은 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니의 권유로 시작하게 됐습니다.
워낙 고가의 장비들을 사용하다 보니 경제적으로 부담이 컸을 텐데요. 사실 펜싱은 다른 스포츠에 비해 장비 교체 주기가 빠릅니다. 연습하다 보면 칼이 부러지는 경우도 많고 다른 보호 장비도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국가대표가 된 뒤에는 정부에서 지원을 받고 있지만, 그 전에는 경제적으로 부담이 컸습니다. 어머니께서 뒷바라지하느라 고생하셨어요.
어머니께서 든든한 지원군이었군요. 저는 대학교 때까지 운동부에서 합숙 생활을 했으니까 집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부모님이 어떤 상황인지 잘 몰랐어요. 통화할 때면 늘 “별일 없다” 고 얘기하시곤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경제적으로 힘든 일도 많았더라고요. 제가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거죠. 지금 생각하면 죄송하고 또 감사할 따름이에요.
이제 효도하셔야죠(웃음). 그럼요, 이제 시작입니다!(웃음) 어머니께서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은메달 땄을 때 저보다 더 기뻐하셨어요. 축하 전화도 많이 받고, 좋아하시는 모습 보니까 뿌듯해요.
허준 선수의 키는 168cm다. 작은 키를 극복하기 위해 그는 상대방보다 두 배, 세 배 더 뛰어다닌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발에 무리가 갔고 발바닥에 염증이 생겼다. 연습 때문에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자 만성이 됐다. 병원에 가니 ‘족저근막염’이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발바닥 근육에 염증이 생기는 질환이다. 증상이 심할 때는 한 발 내딛는 것조차 고통스럽지만 시합을 앞두고는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아픈 것도 잊고 검을 휘두른다.
작은 키를 극복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고 들었어요. 아마 우리나라 국가대표 선수 중 저만큼 신체적으로 불리한 사람은 없을 거예요(웃음). 펜싱은 키가 크면 유리한 스포츠입니다. 팔, 다리가 길면 검으로 상대를 공격하기 쉬우니까요. 대신 저는 큰 선수들보다 빠르고 민첩해요. 그 장점을 활용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뛰어다닙니다.
남들보다 신체적으로 불리한데도 굳이 펜싱을 계속한 이유는 뭔가요? 우선 제가 가진 조건이 불리하다는 이유로 포기하고 싶지 않았어요. ‘노력할 수 있을 때까지 해보자’라는 마음이었습니다. 불리함을 불평하지 않고 극복해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경기 도중 상대방 과녁을 찔렀을 때 느껴지는 ‘손맛’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웃음). 펜싱 기술을 하나씩 배워가는 성취감도 컸고요.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종목이라 ‘멘탈’ 관리도 중요하죠? 정신력은 타고난 것 같아요. 냉정하고 흥분을 잘 안 하는 성격이거든요. 가끔 다혈질인 선수들을 보면 감정 조절을 못해 아쉬운 결과를 내기도 하는데, 저는 그렇진 않아요. 한두 점 차이로 지고 있을 때도 크게 불안해하지 않고 차분하게 제 페이스를 유지하는 편이에요.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은 적은 없었나요? 대학교 2학년 때 훈련하다 도망간 적 있었어요(웃음). 당시 감독님께서 ‘호랑이 감독’으로 유명하셨는데, 스파르타식 훈련을 못 견딘 거죠. 운동도 힘든데 당시엔 경제적으로도 어려웠어요. 펜싱 그만두고 돈이나 벌자는 철없는 마음에 술집에서 서빙도 하고, 공사장에서 벽돌도 날랐습니다. 그때 서너 달 정도 방황했던 기억이 나네요. 선배들이 붙잡으러 와서 못 이기는 척하고 다시 훈련장으로 갔어요. 사회의 쓴맛을 알고 나니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기더라고요(웃음). 그때부터 주말도 없이 운동하는 연습 벌레가 됐죠.
스물일곱 남자 허준 선수의 일상은 어때요? 1년 중 대부분의 시간을 태릉선수촌에서 보내요. 국가대표 선수들은 사생활이 거의 없다고 보시면 돼요. 가끔 휴가를 받으면 동네 친구들과 여느 20대처럼 술도 한 잔 하면서 재미있게 놀아요. 휴식 시간이 부족하니까 한 번 놀 때 최선을 다해 열심히 놀아야 하거든요. 하하!
앞으로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고 싶어요. 꼭 금색이 아니라도 괜찮아요. 은색이든 동색이든 상관없어요. 모든 운동선수가 그렇듯 세계에서 가장 큰 올림픽 무대에서 좋은 결과를 내고 싶습니다.
인터뷰 말미, 본인 스스로 보기에도 잘생겼냐는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늘, 항상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라는 재기발랄한 답변이 돌아왔다. 평소에는 이렇듯 밝고 장난기 넘치지만 펜싱 검을 든 그는 진지하고 노련하다. 역시 타고난 검객이다. 만나서 반가웠소, 미남 검객.
■글 / 서미정 기자 ■사진 / 김성구 ■의상 협찬 / TNGT 문정점(070-4010-8706) ■장소 협찬 / 로러스 펜싱 클럽(070-8882-0503) ■헤어&메이크업 / W 퓨리피(02-549-6282) ■스타일리스트 / 김영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