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운의 천재 vs 난폭한 광인, 사도세자의 진짜 모습은?
꽃피지 못한 비운의 아이콘
문무 겸비한 ‘천재 엄친아’
영조 11년 1월 21일에 태어나 이듬해 세자로 책봉된 사도세자는 지금으로 치면 영재였다. 만 2세부터 천지, 부모 등 63자를 모두 알아 읽고 쓸 수 있었으며 대신들은 앞다퉈 세자의 글자를 받으려고까지 했다. 어린 사도세자의 영특함에 대한 일화도 있다. 「천자문」에 나오는 ‘사치할 치’자를 보던 사도세자가 입고 있던 반소매 옷과 자줏빛 비단으로 만든 구슬 꾸미개로 장식한 모자를 가리키며 “이것이 사치한 것이다”라며 즉시 벗어버렸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영조가 “비단과 무명 중에 어느 것이 더 나으냐?”라고 묻자 “무명이 더 나으니 무명옷을 입겠습니다”라고 답하기도 했다. 9세 때는 음식을 먹고 있던 중 영조가 부르자 세자는 급히 입에 있던 음식을 뱉고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보고 이유를 묻는 영조에게 「소학」의 가르침대로 했다고 답했고, 아버지 영조는 매우 흡족해했다고 한다. 이런 세자의 모습은 이른바 ‘천재 엄친아’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만 2세에 글자를 읽고 쓰며 어린 나이답지 않은 정확한 판단력과 깊이 있는 심성, 여기에 배운 것을 실천하는 행동력까지, 모든 부모가 원하는 이상적인 자식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말이다.

비운의 천재 vs 난폭한 광인, 사도세자의 진짜 모습은?
멀어진 부자 사이에 노론이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가 그렇게까지 악화된 책임을 무조건 엄격한 아버지 영조의 탓으로 돌리긴 어렵다. 두 부자 사이엔 노론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에게 소론의 정치 성향을 지닌 사도세자는 탐탁지 않았다. 노론은 사도세자가 즉위할 시 자신들의 권력을 잃게 될 것이라 염려했다. 좌불안석이 된 노론들은 사도세자의 허물과 병증을 영조에게 과장해 고해바치며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를 돌이킬 수 없게 벌려놓았고, 죽음으로까지 몰고 가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여기에는 노론 집안의 딸이자 사도세자의 비였던 혜경궁 홍씨와 장인 홍봉한도 일조했다. 역사학자들은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 사도세자의 좋은 성품이나 영특한 면보다 병증이 자세히 기록돼 있고, 사도세자에 대한 그리움과 한보다는 아버지 홍봉한에 대한 변명과 집안의 몰락에 대한 한이 서술돼 있는 점 등으로 미뤄볼 때 혜경궁 홍씨와 장인이 사도세자의 죽음을 방관으로 동조했다고 분석한다.
남달리 영특했고 호방하며 문무를 겸비했던 사도세자, 그는 성군이 되기에 충분한 자질을 지녔었다. 하지만 그 자질을 꽃피워보기도 전에 아버지에게 억눌리고 당쟁에 의해 사라져야만 했다. 그리하여 영조는 아들을 잃었고, 조선은 위대한 왕이 될 인물을 잃었다.
사도세자는 정신병을 앓았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희대의 비극
조선 역사상 사도세자만큼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세자는 없다. 영조 38년인 1762년, 사도세자는 영조의 명에 의해 뒤주에 갇힌 지 9일 만에 27세의 젊은 나이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아버지가 뒤주에 가둬 아들을 죽게 한 이 사건은 왕실 역사상 전무후무한 비참한 기록이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그의 광증이 자초한 결과라는 것이 오랜 정설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비운의 천재 vs 난폭한 광인, 사도세자의 진짜 모습은?
사도세자는 자신의 광증을 남들에게 토로하기도 했다.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서찰에는 ‘열은 높고 울증은 극도에 달하여 미칠 듯하다’라며 본인이 병을 앓고 있음을 시인했다. 사도세자가 내관과 궁녀들을 매질하며 이유 없이 죽였다는 기록도 있다. 사도세자의 이런 극악한 행동은 조정 대신들에 의해 영조의 귀에 들어가게 됐고, 분노한 영조는 결국 아들인 사도세자에게 죽음을 명했다.
아버지 영조에 대한 공포심
역사학자들은 사도세자가 광인이 돼버린 데에는 아버지 영조의 지나친 엄격함이 큰 이유가 됐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칭찬과 인정보다는 비난과 비판을 들었던 사도세자는 점점 더 아버지를 어려워하고 두려워하게 됐고, 영조 앞에선 자기의 생각을 제대로 말하지도 못했다. 영조는 42세에 얻은 귀한 늦둥이 아들을 왜 그렇게 모질게 대했을까. 영조는 태생에 대한 콤플렉스에 시달리던 왕이었다. 숙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영조는 적통이 아닌, 숙빈 최씨의 소생이라는 점이 약점이었다. 영조는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스스로 학문에 더욱 매진했고 노론과 결탁했다. 아들인 사도세자에 대한 교육열도 대단히 높았다. 아버지로서 속으로야 아들에 대한 애정이 왜 없었겠냐마는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칭찬보다는 질책을, 압박을 더 많이 준 아버지였다. 자신의 콤플렉스를 아들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의 마음이 안타깝게도 잘못 표현돼 정반대의 결과를 불러온 것이다.
「한중록」에 따르면 아버지 영조의 기대는 점점 더 높아지기만 했고 이를 따라가지 못하게 된 사도세자는 점점 더 아버지 앞에서 위축돼버린다. 아버지 앞에서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게 되고 이는 부자 사이에 점점 더 큰 오해의 벽을 쌓게 만든다. 종내에는 광증의 증상 중 하나인 옷을 잘 입지 못하는 의대증도 나타났는데, 정신분석학자들은 의관을 제대로 갖추지 않고 있으면 아버지 영조를 만나지 않을 것이라는 무의식이 작용했을 것이라 말한다. 아버지를 두려워한 나머지 정신이 이상해진 아들이라니, 참으로 안타까운 대목이다.
영조와 사도세자는 정치적 성향이 달랐다. 영조는 노론의 권력을 등에 업고 있었지만 사도세자는 소론 세력을 지지했다. 이 또한 부자 사이를 멀어지게 하고 사도세자가 집권당인 노론으로부터 배척받게 된 이유가 됐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무예 연습에 열중하는 것도 싫어했다. 이에 대해서는 학문에만 정진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사도세자가 자신을 해하기 위해 무예에 열중한다고 생각해 진노했다는 설도 있다. 사도세자라는 이름은 영조가 아들의 사후에 붙여준 이름이다. 역사학자들은 이 같은 영조의 행동에는 깊은 회한이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닐까, 짐작하고 있다.
시대마다, 작품마다 달리 조명되는
사도세자 엿보기
드라마&영화 속 사도세자

비운의 천재 vs 난폭한 광인, 사도세자의 진짜 모습은?
이인화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이 영화는 사도세자에 대한 재조명을 시도해 관심을 끌었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비참하게 간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밝히려 하면서 일어나는 일을 다룬 영화다. 이 작품에서는 사도세자가 노론의 모함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비운의 천재 vs 난폭한 광인, 사도세자의 진짜 모습은?
세월을 훌쩍 거슬러 올라가보면 사도세자는 화병에 걸려 광증을 일삼았던 인물로 그려진다. ‘조선왕조 500년-한중록 편’은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의 자전적 회고록 「한중록」을 충실히 따랐다. 사도세자는 엄한 아버지 영조 밑에서 사랑받지 못하고 그만 화병에 걸려버린 유약한 아들로 그려진다. 혜경궁 홍씨는 부자 사이에서 이들을 중재하려 애쓰던 가련한 여인으로 등장한다.

비운의 천재 vs 난폭한 광인, 사도세자의 진짜 모습은?
사도세자를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개혁 군주로 묘사하고 있다. 역사적 기록에 비춰볼 때 드라마적 요소가 많이 가미된 해석으로 평가됐다. 드라마에서는 사도세자가 북벌을 꿈꾸다 청나라와 결탁한 노론들에 의해 암살당한 것으로 묘사했다.

비운의 천재 vs 난폭한 광인, 사도세자의 진짜 모습은?
지난 9월부터 방영되기 시작해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드라마. 사도세자를 성군이 될 만한 재목이었던 인물로 조명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사도세자는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인물로 표현되는 한편, 아버지 영조는 권력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부자간의 갈등이 첨예하게 그려지고 있다. 사도세자를 광인으로 묘사했던 과거 드라마들과 달리 오히려 아버지 영조의 광기를 보여주는 등 해석이 새롭다.

비운의 천재 vs 난폭한 광인, 사도세자의 진짜 모습은?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주인공인 영화 ‘역린’도 사도세자에 관심 있는 이라면 볼 만하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이로 인해 평생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복수, 그럼에도 화합을 꾀해야 하는 왕의 입장이 뒤섞여 복잡한 내면을 안고 살았던 인물. 즉위식에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공표한 정조의 삶이 실감 나게 그려진다. 제목인 ‘역린’은 용의 가슴에 거꾸로 난 비늘이란 뜻으로, 정조의 역린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뜻한다.

비운의 천재 vs 난폭한 광인, 사도세자의 진짜 모습은?
내년에 개봉 예정인 영화 ‘사도’는 이준익 감독이 연출을 하고, 배우 유아인이 사도세자 역을, 송강호가 영조 역을 맡는다. 화려한 라인업만으로도 이목을 끌었는데, 영화사는 영조와 사도세자, 아버지와 아들이 반목할 수밖에 없었던 각자의 심리와 감정 묘사에 중점을 둘 것이라 밝혔다. 영조와 사도세자 간의 끈끈한 드라마와 갈등이 어떻게 그려질지 기대가 된다.
Mini Interview
역사학자가 말하는 사도세자 “사도세자 열풍, 불합리한 사회에 대한 방증”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비운의 천재 vs 난폭한 광인, 사도세자의 진짜 모습은?
사도세자는 평가가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인물이다. 사도세자를 어떤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사도세자에 대한 평가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사도세자는 정치 개혁을 꿈꿨던 인물이다. 영조를 왕으로 만들어준 것이 노론이었지만, 사도세자는 노론에 대한 부채가 없었다. 북벌을 꿈꿨고 무인의 기질도 다분했다. 왕실을 강화하려는 꿈을 꿨고, 이를 위해 소론과 손을 잡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런 성향 때문에 반대편인 노론이 상당한 두려움을 갖게 된 것이다. 사도세자는 개혁을 꿈꾸다 거세된 인물이라 볼 수 있다.
혜경궁 홍씨는 어떤 인물인가? 정치적인 야망이 컸던 인물이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몬 것은 노론이고, 실행자는 혜경궁의 부친인 홍봉한, 동조자는 혜경궁 자신이다. 「한중록」은 사도세자의 비극이 영조의 이상 성격과 사도세자의 정신병이 충돌한 결과로 자신과 친정은 연관이 없음을 강변하기 위해 쓰였다. 정조가 살아 있던 1편에서는 사도세자와 자신의 친정 사이가 좋았다는 것을 어필하지만, 정조가 죽고 나서 쓴 2~4편에는 사도세자에 대한 비난이 적혀 있다. 사실과 다른 점도 많다. 「한중록」에는 세자의 온궁 행차가 초라했다고 기록돼 있지만, 「영조실록」에는 호위 병력만 5백20명이 되는 장엄한 행렬이라고 기록돼 있다. 대리청정했던 세자는 이때 1천여 명에 가까운 행렬을 능숙하게 지휘했다. 정신병이라는 말과 달리 오히려 성군의 자질을 보였다. 군마가 탈출해서 농토를 상하게 하자 쌀 한 섬을 주인에게 보상했고, 작황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세금과 요역을 감면해주라고 하령하기도 한다.
사극의 역사 왜곡 시시비비가 더욱 잦아지고 있는데, 전문가로 당부하고 싶은 말은? 사극은 또 하나의 창작이다. 하지만 역사에 존재했던 실존 인물을 그리기 때문에 사료의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다. 사료와 사료 사이의 빈 공간을 상상력으로 메운다든지, 극의 재미를 위해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를 넣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인물의 기승전결을 왜곡해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이런 기본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사극을 빙자한 SF’라는 비난을 받는 것이다. 자주 회자되는 인물은 그 자체로 매력이 있기 때문에 사료의 제한을 받아도 충분히 드라마틱하다.
사도세자를 더 알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추천해줄 만한 책이나 장소(유적지)가 있다면? 서적은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와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을 추천하고 싶다. 사도세자와 관련된 장소는 수원 화성의 현륭원과 용주사 그리고 충남 아산의 영괴대가 있다. 수원 화성은 건립 자체가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현륭원은 사도세자의 시신이 이장된 곳이고, 용주사는 사도세자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세운 절이다. 용주사에는 김홍도의 손길이 닿아 있는데 그중 하나가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이라는 불교 경전을 그림으로 그린 부모은중경판이다. 영괴대는 온양 행궁 당시 사도세자가 활쏘기를 즐겨한 곳으로, 정조는 이를 기리는 비석을 세우고 추모했다. 아들 정조의 깊은 효심을 짐작할 수 있는 장소들이다.
Profile 이덕일 소장은…
현재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이며, 한국역사서의 질적 전환을 이뤄낸 대표적인 역사학자다. 시대와 인물을 읽어내는 뛰어난 통찰력으로 우리 역사를 바로잡는 저술에 힘쓰고 있다. 많은 저서 중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조선 왕을 말하다」,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등 조선사 관련 저술은 조선사에 대한 기존의 시각을 바꿔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기획 / 노정연 기자 ■글 / 정성민·강보라(프리랜서) ■사진 제공 / 쇼박스, 폴로니아 ■일러스트 / 박채빈 ■도움말 /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참고 서적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이덕일 저, 역사의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