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지구 여행자 - 노소남

The Lady

즐거운 지구 여행자 - 노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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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청춘들의 배낭여행 로망을 실천에 옮기는 추진력이 돼주었던 한비야의 「바람의 딸, 지구 세 바퀴 반」. 그보다 1년 앞서 인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와 실크로드를 넘어 아프리카 7개국과 유럽을 아우르는 2권의 여행서를 내놓았던 한 주부 여행가가 있었다.

[The Lady]즐거운 지구 여행자 - 노소남

[The Lady]즐거운 지구 여행자 - 노소남

낯선 거리에서 느끼는 고독한 행복
조리대 벽면에 붙여놓은 ‘세계의 명소’ 달력 사진을 보면서 ‘갈 거야, 갈 수 있을 거야’를 주문처럼 되뇌었던 주부가 세계여행가가 됐다는 이야기는 현대판 동화나 다름없었다. 「세계가 궁금한 여자, 지구 위를 돈다」를 쓴 노소남(67) 작가는 스포트라이트의 주인공으로 손색이 없었다. 당시 주부 여행가의 놀라운 활약을 기사화했던 경향신문 평기자가 국장이 됐고, 품안의 3남매도 제 짝을 찾아갔다. 20년 가까운 시간이 흘러 외모는 아주 조금 변했지만, 그녀는 첫 인터뷰 때와 다름없는 말을 들려주었다. “흔히들 나중에 돈 벌면, 나중에 시간 나면 한다고 말하지만 인생에 나중이란 없다”라고.

노 작가와의 인터뷰는 쉽지 않았다고 대놓고 엄살을 부려도 될 듯하다. 일단 비행기를 타기만 하면, 이야기는 어느새 몇 개의 국경을 넘고 실크로드를 지나 지구 반대편 어딘가에서 맺음하기 일쑤였다. 처음 듣는 지명은 어찌나 숱한지, 또 가슴 철렁하게 만드는 에피소드는 얼마나 많은지.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기를 포기한 채 좌충우돌 여행기에 한참을 몸을 싣고 나서야 비로소 감이 잡히는 기분이었다. 낯선 타국 어딘가에서 한국어로 된 지도라도 받아든 것처럼.

“2010년, 에콰도르로 들어가서 두 달간 남미를 돌고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 도착했어요. 예수상을 보고 팡지아수카르에 갔는데 인적이 없는 거예요. ‘와, 좋다’라고 하면서 배낭을 내려놓는 순간 누군가 휙 채가기에 쳐다봤더니 칼이….”

긴 남미 여행의 막바지, 긴장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신용카드, 여권, 지갑은 물론 카메라까지 빼앗겼다. 그때부터의 (무일푼 신세로 미국 경유를 위해 필요한 재발급 여권이 한국에서 오기를 기다리는 보름 동안 현지 대사관 근처 식당에서 설거지를 하며 버텼던) 이야기만으로도 책 한 권이라고 했다. 메모리 카드라도 살리기 위해 빼내려는 그녀의 행동을 카메라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저항인 줄로 안 강도는 더 강하게 칼을 들이댔다. 그때 받은 충격이 커서 후유증이 오래가더라고 했다. 결말은 ‘그 일이 있은 뒤 한동안 여행을 나서지 않았다’로 당연히 이어질 줄 알았다. 하지만 “중국 윈난성 갔다 왔지”로 시작되는 스토리는 또 끝이 날 줄 몰랐다.

“낯선 거리에서 느끼는 나 혼자라는 고독감, 그런 게 얼마나 행복하다고요. 제가 여행을 다녀오고 나면 그렇게 열정적이고 즐거워 보인대요. 요즘은 국내 여행을 많이 다니는데, 무엇을 봐도 호기심이 생겨요. 어떤 것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이 사람을 늙지 않게 한다잖아요. 덕수궁 돌담길은 1주일에 몇 번을 걷는데도 가도가도 즐거워요. 갈 때마다 햇빛, 날씨, 기온, 사람이 항상 똑같지 않잖아요? 전 그런 게 정말 즐거운 거예요.”

“여행이 당신을 그렇게 바꾼 것인가”라는 질문에 노 작가는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여행을 다닌 것이다”라고 답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결혼 후 14년간 주부로만 지냈을까 싶었다.

‘맹꽁이’, 1백50개국을 누비다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여행가 김찬삼의 여행기를 읽으며 꿈을 키우는 동안 어느덧 막내아이는 “학교에서 구한 거예요”라며 엄마가 좋아하는 달력 사진을 오려올 정도로 자랐다. 장장 30년을 다니며 지금껏 대부분의 강의를 들었다고 자부하는 이화여대 평생교육원은 그녀의 지적 호기심을 채워주는 지식 창고이자, 해외로 첫발을 내딛게 한 고마운 곳이다. 당시 본격적인 해외여행 자유화를 앞두고 학술 차원의 해외 연수 프로그램이 붐을 이뤘는데, 그 바람을 타고 노 작가는 마흔 살이던 1987년 평생교육원 원우들과 함께 동남아로 첫 해외여행을 떠났다.

“그때가 겨울이었어요. 일단은 ‘내가 추운 걸 워낙 싫어하는데 이 겨울에도 따뜻한 나라에 갈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부터 들더라고요. 살아 있는 동안 내가 사는 지구나 한 번 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고, 이후에는 세계의 종교 유적지에 관심을 가지게 됐죠.”

이후 신문광고에서 찾아낸 시베리아 횡단열차 그룹 여행에 참여한 뒤로 여행은 혼자 다니는 거라는 원칙을 세웠고, 지금껏 세계 1백50개국 이상을 누볐다. 전 세계를 다 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예 처음부터 방문 국가 수를 세지도 않았다. 서너 번 이상 찾은 나라도 여럿이고, 인도, 터키 등 특별히 좋아하는 나라는 네댓 번 이상 드나들었다. 그렇게 여행가로 이름을 알렸을 때, 새로 제작하는 프로그램 PD라는 사람이 “다음 여행에서 영상을 촬영해오면 안 되느냐”라는 제안을 해왔다. 그렇게 인연이 닿은 프로그램이 1995년부터 방송되고 있는 KBS-1TV ‘세상은 넓다’이다. 노 작가는 파키스탄, 크로아티아, 라오스, 네팔 등을 처음으로 소개한 최장수 출연자다.

“처음 남미에 갔을 때, 외국 사람이 비디오카메라 들고 다니는 걸 보고는 ‘내 눈으로 보고 느끼기에도 벅찬데 왜 저걸 눈에 대고 다니나’ 했어요. 그런데 막상 해보니까 일반 카메라보다 훨씬 재밌는 거예요. 내가 느끼는 감동을 다른 사람도 느끼게 해줘야겠다는 마음에 심취하게 됐죠. 이제 어딜 가면 어느 쪽에서 찍어야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담을 수 있는지 몇 초 만에 딱 나와요.”

무턱대고 용산 전자상가를 찾아가서 흥정도 없이 비디오카메라를 사고, “엄마는 켜는 거, 끄는 거만 알면 돼요”라는 아이들의 코치만 받고 시작한 영상 촬영이었다. 노 작가는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숙소 예약을 해본 적도 없다고 했다. 그렇다고 외국어에 아주 능하다고도 할 수 없다. 1백50개국 여행이라는 훈장을 단 베테랑이라기에는 어딘가 허술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사막에서는 감도 높은 필름을 써야 한다는 말만 믿었다가 중앙아시아에서 찍은 사진을 다 망친 적이 있어요. 제가 너무 모르니까요. (티베트나 몽골 등) 현지어를 몰라도 저는 엉터리로 해요. 그래도 다 통해요. 물론 지금도 어리숙하긴 해요. 제가 사회생활에는 맹꽁이에요. 그래서 좋은 점도 있어요. 주변 사람들이 많이 도와주거든요.”

어떤 사람들은 이런 식의 질문도 제법 던졌던 모양이다. 이를테면 여자 혼자 다니는데 ‘위험’하지 않느냐고. 질문에 담긴 의도를 알아챈 노 작가는 이렇게 답하곤 한다. “당신은 아침에 출근하다가 어떤 외국 여자가 지나가면 그 여자를 따라가느냐”라고.

“사실 여행을 가면 저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서 돌아다니고, 해가 지면 숙소에 들어가버려요. 일찍부터 다니니까 몸이 지치기도 하고요. 사실 이집트 정도만 돼도 밤에 나가도 되는데, 그러지 않았던 것에 대한 아쉬움이 많긴 하죠.”

아슬아슬 무용담, 가족에겐 ‘쉿!’
마치 구름 따라 마음 가는 대로 유유자적 떠돈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노 작가 나름의 철저한 준비와 원칙이 있었다. 영어는 FM ‘굿모닝팝스’를 들으며 꾸준히 준비했고, 현지인의 생활 깊숙이 들어가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지만, 불안한 음식은 배탈 핑계를 대고 함부로 받아먹지 않았다. 또 택시를 타야 할 일이 생기면 반드시 경찰이 있는 곳을 찾는다거나, 모르는 길을 물을 때는 각기 다른 세 사람에게 물어서 맞는 정보인지 확인하는 식이다. 불빛이 보이는 목적지를 두고 어두운 벌판을 뱅뱅 도는 새벽길 몽골의 택시기사 덕분에 식은땀을 흘린 적도 있지만, 대체로 그녀의 직감은 옳았다.

“젊은 사람들은 여행 정보 책을 보고 와서는 자기가 알고 있는 가격이랑 다르다며 릭샤(인도의 오토바이 개조 차량) 값도 깎으려 들어요. 그 책이 벌써 몇 년 전에 쓰인 건데 말이에요. 물론 바가지를 씌우는 사람도 있지만 크게 씌우지는 않아요. 나는 릭샤를 타기 전에 이렇게~ 얼굴을 봐요. 서로 자기 릭샤 타달라고 하는 기사들 가운데 착하게 생긴 사람을 고르면 틀림이 없어요. 오히려 제가 돈을 좀 더 주기도 해요. 그래봤자 우리 돈으로 1천원일 텐데.”

“내가 기억하고 싶은 걸 찍는다”라는 노 작가는 그동안 촬영한 수만 장에 이르는 여행 사진을 보면 지금도 어디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 했다.

“내가 기억하고 싶은 걸 찍는다”라는 노 작가는 그동안 촬영한 수만 장에 이르는 여행 사진을 보면 지금도 어디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 했다.

몽골의 어느 게스트하우스 주인은 두 번째로 찾은 그녀를 알아보고 5달러인 요금을 4달러로 깎아주기도 했다. 가던 길 멈추고 길을 묻는 여행자의 손을 이끌어 목적지까지 데려다주는 순박한 이들이 사는 곳, 1천원이면 맛있고 배부르게 한 끼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곳. 고유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지역을 찾는 그녀는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라는 옛말을 세계 곳곳에서 실감하고 있었다. 10여 년 만에 다시 찾은 중국 윈난성은 동남아시아의 여느 유명 휴양지처럼 개성이 사라졌고, 세계적인 장수마을로 잘 알려진 파키스탄 훈자마을에는 신작로가 들어섰다. 옛날 생각하고 한 번 더 갔다가 실망하고, 안 가느니만 못하다는 후회를 느낀 적도 여러 번이다. 하지만 여행 자체에 회의를 느낀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했다. 요르단에서 이스라엘로 국경을 넘을 때 꼭 필요한 허가증을 두고 왔다가 가까스로 발행처로 되돌아간 사연, 천 길 낭떠러지를 한 뼘 여유도 없이 구불구불 내달리던 낡은 버스에 몸을 싣고 힌두의 성지 리시케시를 찾아가던 길 등 여행에서 겪은 아슬아슬한 순간을 무용담처럼 얘기할 법도 하지만, 혹 가족이 못 가게 할까 봐 위험한 경험은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며 소녀처럼 웃었다.

“가족에게는 거짓말을 하게 돼요(웃음). 지난번 남미에서 도난사고 당했을 때, 제가 온다는 날짜가 지나도 연락이 없어서 실종 신고 내려고 했다잖아요. 평소에 여행 가면 연락을 안 하거든요. 옛날에는 한두 달 돌아다니다 보면 내 집 전화번호도 생각이 안 나더라고요(웃음).”

‘워낙 개성이 확실한’ 사람인 걸 알기 때문에 가족은 여행가 안주인에 대한 간섭을 버린 지 오래라고. 다만 가족 여행을 갔을 때 촬영에만 몰두하는 모습은 조금 자제해달라는 부탁을 받기는 했다. 촬영에 빠져 가족과 헤어진 엄마를 찾느라 나이아가라 폭포 유람선을 못 탄 것을 못내 아쉬워하는 둘째에게는 지금도 미안하다. ‘세계 여행 하느라 집 몇 채는 날렸을 것 같은 엄마’를 뒀다는 오래된 오해도 미안하기는 마찬가지.

“사람들이 많이 오해하는 것 중 하나가 남편이 얼마나 돈이 많으냐는 거예요. 물론 제 남편 훌륭하죠. 간섭을 안 하니까요(웃음). 동남아 가면 독방을 쓰고도 하루 2만원이면 지낼 수 있어요. 어떻게 보면 한국에 있을 때보다 더 돈을 안 써요. 사실 이건 비밀인데, 오늘 입은 재킷도 아름다운가게에서 1천5백원 주고 산 거예요. 요즘 벼룩시장도 얼마나 많은데요. 백화점에는 가본 적도 없고요. 머리도 왜 이렇게 기르겠어요? 미장원 안 가도 되잖아요.”

아이들 학창 시절에는 주로 방학을 이용해서 한두 달씩 여행을 다녔다. 한 번에 길게 나가는 대신, 비행기는 직항이 아닌 저렴한 경유 항공편을 이용했다. 남인도에 갈 때도 태국과 스리랑카를 거쳤다. 덕분에 1주일 스리랑카 일주까지 덤으로 얻어 2,243m의 스리파다 산을 정복하기도 했다.

다음 여행지는 마다가스카르
“저를 만나면 99.9%의 사람들이 하는 말이 ‘나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예요. 그런데 인생에 나중은 없어요. ‘어디를 가면 되나요?’라고 묻는 사람도 많은데 그런 사람은 못 가요. 내가 가고 싶어서 미쳐야 가는 거지, 왜 다른 사람에게 추천해달라고 해요! 가고 싶은 열정이 있으면 책도 찾아보면서 스스로 풀어야죠.”

노 작가는 “내일부터 내 애인과, 엄마, 엄마의 남자친구와 한 달간 자동차 여행 가요”라며 하루 종일 고기를 썰던 식당을 떠나던 브라질 청년을 이야기했다. 굶지 않을 정도로 일하고, 남은 인생을 즐겁게 살 수 있어야 일도 즐겁게 할 수 있을 것이 아니냐는 작가의 선순환 논리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사는 동안 스스로가 미칠 수 있는 한 가지를 발견하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얘기를 자주 해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에서. 어차피 얼마 안 살다 가는 인생인데 내가 하고 싶은 걸 해야죠. 그깟 비싼 옷 입는다고 누가 알아주기나 하나요?”

여행을 다니지 않는 시간에는 책으로 여행을 한다는 노 작가는 자녀들에게도 책을 많이 사주는 것으로 엄마의 역할을 했다. 말 통하는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학교 엄마 모임에 한 번 참석하지 않았지만, 3남매는 스스로 알아서 공부하고, 스스로 원하는 길을 찾았다. 엄마의 책임을 떨쳐낸 지금이 무척이나 좋다고 말하는 노 작가에게 혹시 좀 더 일찍 여행을 떠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나 후회는 없을까.

“없어요. 오히려 나이 들어서 내 의무감에서 벗어났을 때가 참 좋았어요. 그때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거잖아요. 요즘 젊은 사람들은 밖에서 무언가를 해야만 성공한 여성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사회에서 배울 수 없는 삶의 기본자세는 다 집에서 배우는 거잖아요. 그렇게 집에서 아이 잘 키우고, 남편이 퇴근했을 때 반갑게 맞아주면서 보필하는 삶이 결코 뒤처지는 게 아니라는 거죠. 그리고 내 의무가 끝났을 때 하고 싶은 것을 시작해도 결코 늦지 않다는 거죠. 100세 시대잖아요.”

보통 사람들은 “와, 저기 가보고 싶다”라며 보는 EBS-TV ‘세계테마기행’을 “저기 옛날에 다 갔던 곳인데…”라며 즐겨 보는 노 작가. 채널A 객원기자단으로 활동하며 블로그 ‘지구촌 사람들 이야기(http://blog.donga.com/press04)’도 열심히 관리하고 있는 그녀의 다음 여행지는 마다가스카르가 될 듯하다. 홍콩이나 태국 경유 항공편을 구입하면 1백만원 미만으로 갈 수 있겠다며 이미 자료 조사도 끝낸 눈치다. “나의 불행은 이 지구를 그렇게 돌아다녀도 살고 싶은 나라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라며 “지구상에 한국 같은 나라가 없다”라는 노 작가의 말을 위안으로 삼기에, 이미 한껏 끓어오른 세계 여행의 열망은 한동안 가라앉지 않을 것 같다.

* ‘The Lady’는 이달을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글 / 장회정 기자 ■사진 / 박재찬 ■사진 제공 / 노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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