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 국민 디자이너 비나 술탄의 행복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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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실크로드의 주요 경유지 중 하나였던 파키스탄. 예로부터 이곳의 섬유와 수공예품은 세계 최고로 손꼽혀왔다. 좋은 재료로 정성껏 만든 옷에는 중동의 화려함과 아시아의 섬세함이 묻어 있다. 패션 디자이너 비나 술탄, 그녀가 파키스탄은 물론 세계에서 사랑받는 이유다.

파키스탄 국민 디자이너 비나 술탄의 행복론

파키스탄 국민 디자이너 비나 술탄의 행복론

옷에 파키스탄을 담다
한국과 파키스탄의 수교 31주년을 기념해 서울에서 처음으로 패션쇼를 여는 디자이너 비나 술탄(48)을 만나기 위해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주한 파키스탄 대사관저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주방에서 풍겨오는 고소한 양고기 냄새와 공간을 꽉 채운 인도풍 음악 때문인지 서남아시아 한복판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랍 영화 속 여주인공 같은 외모의 그녀는 패션쇼 리허설 준비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꼼꼼하게 의상을 점검하고 모델들의 워킹 지도까지 끝낸 뒤에야 웃으며 악수를 청한다.

“디자이너로서 한국에 꼭 와보고 싶었어요. 아시아의 패션 도시로 손꼽히는 서울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거든요. 과연 듣던 대로 길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들 멋쟁이더군요!”

저렴한 인건비와 양질의 면섬유를 앞세운 인도에 가려져 있던 파키스탄의 의류 시장은 지난 10년간 급격하게 성장했다. 특히 일상생활에서 전통 의상을 주로 입던 여성들이 서구화된 옷을 선호하면서 여성 의류의 성장세가 눈부시다. 비나 술탄은 전통 문양에 현대적 감각을 더한 옷으로 현재 파키스탄 여성복 시장에서 가장 사랑받는 디자이너다. 최근에는 영국과 두바이에 자신의 브랜드를 론칭하며 세계 패션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저는 옷을 통해 파키스탄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싶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영국에서 MBA를 공부할 때였어요. 다른 나라 사람들이 파키스탄을 얘기할 때면 전쟁이나 가난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는 모습을 보며 정말 속상했어요. 전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큰 국토, 히말라야 산맥이 둘러싸고 있는 웅장한 풍광, 유구한 이슬람 문화 같은 건 아예 모르는 사람이 더 많더라고요.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해봤어요. 그때 떠오른 게 바로 옷이었죠.”

실크로드를 오가던 상인들이 탐낼 정도로 품질 좋은 섬유와 자수 장식. 그동안 전통 의상인 ‘살와르’를 만들 때만 사용되던 재료로 그녀는 기성복을 만들기 시작했다. MBA를 마치고 파키스탄으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패션 사업에 뛰어들었다. 지금보다 훨씬 가부장적인 분위기의 파키스탄 사회에서 여성 디자이너로 살아남는 일이 녹록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묵묵히 한 우물 파기를 10년. 이제는 파키스탄에서 그녀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 인사가 됐다.

“앞으로도 계속 전통문화에서 모티브를 따올 예정이에요. 그래야 세계무대에서도 경쟁력을 키울 수 있다고 봐요. 그저 유행에 따라가기 급급해서 브랜드의 정체성을 잃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한국의 한복, 일본의 기모노, 중국의 치파오 같은 전통 의상을 보세요. 시대가 바뀌어도 변함없이 사랑받고 있잖아요. 제가 만드는 옷들도 그렇게 오래도록 사랑받았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여유롭고 당당했다. 허스키한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또박또박 말할 때면 특유의 에너지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패션쇼를 열고, 쉴 틈 없이 다음 시즌 컬렉션을 준비하는 열혈 디자이너에게 삶의 원동력을 물었다.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두 아들이라고 대답했다.

파키스탄 국민 디자이너 비나 술탄의 행복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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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들은 나의 힘
그녀는 싱글 맘이다. 이혼율이 낮은 파키스탄에서 홀로 아이 둘을 키운다는 것은 세상의 편견과 정면으로 맞서 싸워야 하는 일. 아이들이 상처받지는 않을까 마음 졸이던 때도 있었지만 다행히 모두 바르고 곧게 잘 자랐다. 첫째 아들은 영국에서 로스쿨을 다니고, 고등학생인 둘째 아들은 파키스탄에서 공부하는 중이다. 유명 디자이너인 엄마와 달리 두 아들 모두 패션에 관련된 일에는 별 관심이 없다고 한다. 아이들 이야기를 꺼내자 그녀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제 브랜드의 이름은 ‘BNS’예요. 저와 두 아들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온 거예요. 귀찮아서 대충 지은 것 아니냐고 되묻는 분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아요(웃음). 브랜드명은 디자이너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하는데, 저라는 사람은 ‘비나’라는 이름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해요. 두 아들과 함께해야만 완벽해지죠. 그리고 제 삶에 가장 소중한 아이들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좋은 옷을 만들겠다는 다짐도 함께 담았어요.”

인구의 98%가 이슬람교도인 파키스탄은 우리나라처럼 가족 간의 유대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국가다. 어른을 공경하는 문화도 비슷하다. 그렇게 파키스탄과 한국의 공통점을 찾아가던 중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파키스탄에서도 엄마를 ‘엄마’로, 아빠를 ‘아빠’로 발음한다는 것. 의외의 공통점에 신이 난 그녀는 한참 동안 우리말 단어를 묻고 외우는 귀여운 모습을 보였다.

“제 인생의 우선순위를 얘기하자면 첫 번째가 가족, 그다음이 일이에요. 하지만 디자이너라는 직업 특성상 해외 출장을 가야 하는 경우도 많고, 매 시즌마다 컬렉션을 선보여야 하니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죠. 그래서 저는 자투리 시간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아이들과 함께 보내요. 평상시 퇴근 후에는 휴대전화도 꺼놓은 채 아이들 이야기에만 집중하고요. 같이 있는 시간의 양에만 집착하지 마세요. 짧은 시간이라도 깊이있게 엄마와 교감했다면 아이 역시 안정감을 느끼고 부모의 일을 존중해줄 겁니다.”

한국만큼은 아니지만 파키스탄에도 많은 워킹 맘들이 존재한다. 그들이 경제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하면서 여성 인권도 많이 신장됐다. 정치, 법률, 금융, 통신, 문화, 패션 등 여자라서 불리한 영역도 없다. 알고 보니 파키스탄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여성 장관을 배출한 나라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랍 국가에 대해 갖는 편견이 여성 인권 문제죠. 솔직히 파키스탄 여성이 미국 여성만큼 자유롭다고 자신 있게 말하진 못할 것 같아요. 하지만 자유롭게 삶을 누리는 여성들이 많아진 건 분명해요. 앞으로 더욱 그럴 거고요.”

행복의 비결은 얽매이지 않는 것
인도,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파키스탄은 북쪽으로는 에베레스트 산에 둘러싸여 있고, 남쪽으로는 탁 트인 아라비아 해를 바라보고 있다. 서쪽에는 광활한 사막이 펼쳐져 있다. 천혜의 자연경관 덕분에 세계사 책에는 동방 원정길에 올랐던 알렉산더 대왕이 매료된 땅이라고 소개됐을 정도다. 실크로드를 통한 중동, 유럽과의 지속적인 교류로 동서양의 문화가 혼재하는 것도 파키스탄의 매력이다. 자연환경과 이국적인 문화가 주는 여유로움 때문일까. 파키스탄 사람들은 매년 발표하는 세계 행복지수에서 늘 상위권에 랭크된다.

“파키스탄 사람들은 행복해요. 가족끼리의 끈끈한 유대관계가 개인과 국가 사이에도 이어지기 때문에 정부에 대한 신뢰도가 높죠. 그러다 보니 자연히 불평이나 불만이 줄어들고 현실에 만족하고 감사하게 되는 것 같아요.”

작은 농담에도 목젖이 다 보이도록 껄껄 소리를 내 웃고 별것 아닌 이야기에도 눈을 맞춰가며 반응하는 그녀 역시 행복해 보였다. 어딘가 쫓기듯 바쁘게 살다 보니 생기와 여유 따위는 챙길 여력이 없었던, 퍽퍽한 보통의 한국인으로서 괜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거 아세요? 행복하지 않을 이유는 별로 없다는 것. 저는 패션에 미친 사람처럼 일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두 아들이 있어요. 이것만으로도 제 인생은 즐거워요. 불행하다는 생각이 들 때면 종이에 하나씩 적어보세요. 장담컨대 행복할 이유가 훨씬 많을 겁니다. 그럼 그냥 행복하다고 말하는 거예요!”

1 비나 술탄의 의류 브랜드 ‘BNS’.
2 비나 술탄과 그녀의 옷을 입은 모델들.
3 패션쇼가 있던 날 파키스탄 대사 부인이 전통음식을 직접 준비했다.

1 비나 술탄의 의류 브랜드 ‘BNS’. 2 비나 술탄과 그녀의 옷을 입은 모델들. 3 패션쇼가 있던 날 파키스탄 대사 부인이 전통음식을 직접 준비했다.

한국과 파키스탄 사회처럼 가족, 친구 간의 끈끈한 유대관계는 행복의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독이 될 수도 있다. 스스로를 타인의 시선에 맞춰 옥죄고 있지는 않은지 곰곰이 생각해보라는 게 그녀의 조언이다.

“자유로워지세요. 그래도 괜찮아요. 사회의 시선에 부응하기 위해 가짜로 인생을 살 순 없잖아요. 가족의 기대에 좀 못 미치면 어떤가요? 친구들이 실망하는 게 뭐 그렇게 겁날 일인가요? 그들이 당신을 늘 행복하게 해줄 거라는 어리석은 마음도 갖지 마세요. 스스로 인생을 즐기세요. 얽매이지 마세요. 그래야 행복에 가까워질 거예요.”

행복을 찾는 일은 아이러니하게도 괴롭다. 누군가를 용서해야 하고, 가진 것을 나눠야 하며,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하지만 반드시 그 과정을 견뎌야만 행복을 누릴 수 있다. 누군가는 거저 얻는 것 같아 샘이 나던 행복도 결코 공짜로 얻은 게 아니다. 그동안 행복한 세계인들을 만나며 들었던 생각이다. 행복을 위해 수고롭게 노력하기를, 그래서 행복해지기를 바라며.

“자유로워지세요. 그래도 괜찮아요. 가족의 기대에 좀 못 미치면 어떤가요? 친구들이 실망하는 게 뭐 그렇게 겁날 일인가요? 스스로 인생을 즐기세요. 얽매이지 마세요. 그래야 행복에 가까워질 거예요.”

■글 / 서미정 기자 ■사진 / 안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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