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도지사 안희정이 소통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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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SNS, 메신저 등 온갖 소통 수단은 늘었지만, 모두가 불통의 시대를 이야기한다. 소통의 해법을 찾아 안희정 충남도지사에게 물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어떻게 소통하십니까?’

충남도지사 안희정이 소통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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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타이를 푼 편안한 차림이면 좋겠다는 요청이 잘 전달된 모양이었다. “너무 젊어 보인다”라며 아내가 썩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사줬다는 캐주얼한 회색 셔츠가 잘 어울렸다. 2010년 민주당 최초로 충남도지사에 당선돼 도민들의 신임을 얻는 행정가로 활동하며 2014년 도정 2기를 맞이한 안희정(50) 지사. 정치색을 거둬낸 인터뷰를 약속하고 만났을 무렵, 그의 이름은 차기, 대망, 대권주자 등의 단어와 함께 연일 정치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몰아치듯 오후 일정을 마치고 한숨 돌리는 기색인 그는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여유로운 티타임에 어울리는 질문을 해보겠다고 일단 운을 뗐다. 건강검진 이후 하루 대여섯 잔씩 마시던 믹스커피를 끊고 블랙커피를 마시는 50의 가장에게는 떠올리기만 해도 ‘이놈’, ‘이 녀석’ 등의 씩씩한 단어를 불러오는 두 아들이 있다. 그리고 요즘은 품안의 자식들을 슬슬 떠나보낼 마음의 채비를 하고 있다.

다름을 인정하고 비로소 시작된 대화
몸이 무거워질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거 같은데요?
그래도 나름의 고민이 있어요. 입던 바지의 사이즈를 늘려야 하면 짜증이 나죠(웃음).

예전에는 마흔이 고비였다는데, 요즘은 쉰을 넘기면서 달라지는 듯해요. 저도 오십 넘으면서 꺾이고 있어요. 한편으로 여유로워지고, 한편으로는 포기하게 돼요. 예를 들어 운동이라면, 더 어려운 난도에는 아예 도전을 안 하게 돼요. 운동 한 번 세게 했다가는 며칠 드러눕게 되니까요. 몸에 대한 한계라는 것이, 자기가 도전할 수 있는 영역을 더 중요하게 여기도록 만들더라고요. 열정의 무한 방출이 아니라…. 이 나이 되면 알아요(웃음).

막내아들이 막 스무 살이 됐죠? 도지사님은 그 나이에 이미 인생의 방향을 정하셨잖아요. 아드님도 진로를 정했나요? 이놈이 영어를 잘해요. 어느 날 보니 얘가 헤드셋 끼고 게임을 하면서 영어를 유창하게 하고 있더라고요. 그런데 하는 말이 대부분 속어예요(웃음). 참, 그 아이가 중학생일 때 같이 몽골 여행을 갔어요. 스웨덴, 영국, 핀란드, 미국 등지에서 온 10여 명이 팀을 이뤄 게르(전통 천막형 주택) 체험을 하러 초원에 나갔죠. 나는 콩글리시로 “하이, 하우 아 유” 하고 끝인데, 아들은 계속 같이 어울리는 거예요. 속으로 좀 놀랐어요. 그때 모스크바에서 영어 강사를 하는 50대 영국인에게 “아이가 영어 하는 걸 보면 가끔 욕설도 나오는 거 같던데, 부모 입장에서는 교육을 잘못 시킨 거 같아서 얼굴이 화끈거리고 걱정이 된다”라고 했더니 “우리가 클 때를 돌아봐라. 언어를 배울 때 쉬운 욕부터 배우는 것이 당연하다. 애들은 다 그러면서 배우는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라고 저를 위로해주더라고요. 어쨌든 둘째 아이는 학원 한 번 안 다니고 게임과 음악으로 영어를 해서 영어특기생으로 이번에 대학에 갔어요.

두 아들이 대안학교를 다녔다면서요? 아이들 초등학교 때 제가 수감되면서 가족에게, 특히 아이들에게는 정서적으로 무척 힘든 상황이었죠. 아이들이 워낙 학교에 적응을 잘 못했는데, 기존 체제에 집어넣었다가는 더 힘들어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대안학교를 찾게 됐죠. 아이들도 그게 좋겠다고 했고요.

지금 돌아봤을 때 당시의 결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우선 부모가 어디까지 해줄 수 있느냐에 대해 마음 정리를 해야 돼요. 행복한 인생의 모범답안이 정말 있는 것인가, 내가 자식에게 바라는 것이 정말 모범 답안인가, 하고요. 제가 젊었을 때는 아이들은 아직 완전한 인격체가 아니라 결정을 내릴 수 없으니 어른들이 전적으로 훈육해야 한다는 관점의 교육을 받았어요. 하지만 아이에게 다양한 여건과 기회, 자극을 제공하는 것까지는 해줄 수 있지만, 아이의 선택까지 제가 결정할 수는 없어요. 오히려 인생이라는 긴 마라톤에서 좌절하거나 지칠 때, 스스로를 격려하면서 일어날 수 있는 힘, 그 힘을 주는 것이 부모가 해야 할 큰 역할인 거예요. 물론 이렇게 아이들을 방목하는 것이 무책임한 결정은 아닐까, 하는 고민을 대안학교의 많은 부모들이 함께해요. 그럴 때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죠. 너는 인생의 답을 알고 있느냐, 하고 스스로 거울을 보는 거죠. 저는 별로 후회하지 않아요.

부모가 소위 명문대 출신일 경우, 아이가 공부를 못하거나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케이스가 있더군요. 저도 그랬어요. 좋은 결과를 기대하면서 죽어라 이 악물고 하면 될 일을 왜 안 할까. 이런 생각 때문에 아이를 나무라거나 쥐 잡듯 잡게 돼요. 저는 아이들에게 엄격하게 ‘예의 바르고 성실할 것’을 강조했는데, 사실 그 기준이 아이와 내가 많이 다른 거예요. 둘째가 초등학교 3학년부터 6년 동안 드럼을 쳤어요. 아이가 드럼을 좋아하고 또 그걸로 끼를 발산하는 게 그렇다고 남을 해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오케이했죠. 그런데 전자드럼이 앰프를 끄고 치더라도 아무래도 소리가 나서 윗집 옆집에서 찾아오더라고요. 일부러 숨어서 아이가 어떻게 하는지 봤더니 “죄송합니다” 하고 나서 “그런데 아저씨, 저는 드럼을 치고 싶은데 몇 시에 치면 돼요?” 하고 물어보는 거예요. 그렇게 이웃집을 돌아다니면서 물어보고는 시간표를 짜서 치더라고요.

나름의 해결책을 찾은 거네요? 이게 재미난 게, 우리 애 입장에서는 아버지 세대가 이해가 안 간다는 거예요. 우리 세대는 미리부터 상대를 배려해서 실례할 일을 하지 않는 건데, 얘들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다가 태클이 들어오면 그때 조정하는 거예요. 가만 생각해보니, 아이의 태도와 방식이 잘못됐다고 할 수는 없더라고요. 괜히 “이 자식아, 나는 안 시끄럽겠냐. 그러니까 나한테도 언제 드럼을 쳐도 되는지 물어봐야지!”라고 말은 했지만, 아이들과 우리 세대가 다르다는 걸 느끼고 그 사고방식을 인정하게 됐어요.

그 밖에 아이들로 인해 바뀌게 된 것이 또 있나요? 아이들 초등학교 때까지는 종종 군밤을 때리거나 회초리를 들곤 했어요. 그런데 중학교 들어가더니 안 맞겠다는 거예요. 한번은 부자간에 심각하게 붙어서 제가 손을 치켜들었더니 내 손목을 잡고 “아버지, 이제 그만 때려요” 하더라고요. 손찌검을 하려다가 아들에게 손목 잡히는 날, 아버지 인생은 무너지는 거거든요(웃음). 저도 그날 저녁에 거의…(웃음).

아이들과는 어떻게 대화다운 대화를 할 수 있게 됐나요? 한번은 아이가 대화와 말대꾸의 차이를 알려달라고 하더라고요. 답을 생각하다 보니 저도 나이가 훨씬 많거나 지위가 높은 사람과 ‘대화’를 해본 경험이 없었어요. 일방적으로 혼나거나, 아니면 상을 뒤엎고 반항을 하거나. 그렇게 대화가 깨진 책임은 어른이 져야 하는 것이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젊은이와 대화할 때, 표정으로는 도발할 권리를 줘야 한다고 말해요. “인상을 찌푸리든 ‘썩소’를 날리든 봐주겠다. 단 언어든, 행동이든 폭력은 쓰지 마라”라고요. 그러고 나서 아이들과 대화를 할 수 있게 됐어요.

자녀 교육에 영향을 받은 조언이나 가르침이 있었나요? 어떤 교육학자의 책에 ‘내가 물려받은 모든 것을 내 대에서 단절시킬 수 있는 부모가 가장 좋은 부모다’라고 쓰여 있었어요. 왜냐면 그 아이는 그 시대의 들판에서, 그 시대의 바람과 공기 속에서 자기 인생을 경험할 것이기 때문에 누가 더 알려주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인 거죠. 그 말이 정말 감동적으로 들렸어요.

그렇다면 이제 아버지로서의 역할은 다했다고 봐도 될까요? 요즘은 친구로 잘 지내고 있어요. 내 젊은 친구로서. 우리 아이들과 클럽 한 번 놀러 가는 게 소원이에요. 아이들이 꼬드겨요. 엄마 몰래 데려가주겠다고(웃음).

아빠와 남편으로 찾은 행복
본인의 교육 원칙에 대해서는 부인께서도 흔쾌히 동의하셨나요?
(잠시 생각하더니) 집사람이나 저나 항상 부모님 말씀 잘 들었던 ‘범생이’ 축에 속했죠. 따로 원칙이 있다기보다는 함께 룰을 만든 거예요. 두 남자아이가 가지고 있는 드센 성정, 모든 관심이 바깥으로 향해야만 했던 제 직업적인 배경…. 이런 모든 것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우리 가족의 최적의 조건인 거죠. 저 역시 권위적인 아버지였는데,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나를 바꿔버린 거예요.

충남도지사 안희정이 소통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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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들의 어떤 점이 어린 시절의 자신과 가장 닮았다 싶으세요? 일단 둘째는 외모가 거의 저랑 똑같아요. 그런데 애가 워낙 거칠어요. 감정 표현을 부드럽게 못해서 여자친구를 못 사귀더라고요(웃음). 첫째는 외가 쪽을 닮아서 키도 훤칠하고 운동도 잘하고, 눈썹도 짙고 예뻐요. 지금은 의경인데, 그 녀석은 언제부터인가 우리 부부의 갈등 해결사가 됐어요. “지금 엄마 상태가 별로 안 좋으니까 아빠가 들어와서 이런 얘기를 해야 하고…” 같은 조언과 경고도 해주고(웃음).

두 아들은 아버지의 직업, 아버지가 하는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요? 3년 전쯤, 학부형 모임에 갔었는데 마침 아이들이 앞에 나와서 자신의 아빠에 대해 평가하는 시간이 있었어요. 그때 “아빠로서는 잘 모르겠지만 인간과 정치인으로서는 존경해요”라고 하더라고요. 성실하다거나 어렵더라도 신념을 가지고 계속 밀고 가는 면을 보고 아마 직업인과 인간으로서 존경한다는 표현을 한 거 같아요. “그럼 아빠로서는?”이라고 물었더니 그건 대답을 못하겠다고 하더라고요(웃음).

그게 친하다는 증거인 거 같아요. 부인에게도 ‘가장 친한 사람’이라는 표현을 하셨잖아요. 가장 지척에 있는 사람과 친하다고 말할 수 있는 비결이 뭘까요? (잠시 생각하더니) 상대한테 서운해하지 않으면 돼요.

기대치를 낮춘다는 의미인가요? 서운해하지 않는다는 게 참 어려워요. 남녀가 처음에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같이 사는데, 시간이 지나면 양말은 왜 제자리에 안 두는가부터 시작해 생활 습관의 단점이 보이면서 부딪히게 돼요. 그럴 때 전 이렇게 생각하는 편이에요. ‘내가 혼자 자취할 때 빨래도 하고 밥도 해야 했는데, 좋아하는 사람이 왔으니까 빨래 하나 더 하고, 숟가락 하나 더 올려두는 거다. 그 이상으로 상대에게 기대하지 말자’라고요. 그런데 이게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대목이 임신과 육아예요. 임신과 출산은 제가 어떻게 대신할 수 없잖아요.

가족의 회복
육아가 참 어렵죠.
네, 가장 어려워요. 저는 엄마가 사회생활을 계속할 마음이 있다면, 일하면서 행복한 엄마가 아이에게도 좋다고 생각했어요. 그걸 포기하고 사회활동에 대한 동경과 일하지 못한 것에 대한 원망을 품고 한탄한다면 아이에게도 안 좋을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아내는 부모가 해야 할 역할이 있는 거라며 10년 만에 교직을 그만두고 전업주부로 살았어요. 그 언저리부터 사실 제 아내는 많은 피해의식과 패배의식을 갖게 됐어요. 저는 사회적으로나 직업적으로 한 걸음씩 나아갔고 그동안 직업적인 진취를 이루지 못한 아내 입장에서는 자기 원망이 생겼죠. 부모의 역할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 보니 그게 쟁점이 돼서 오랫동안 우리 사이에 언쟁의 중심이 됐고요.

어떻게 회복하셨어요? 2004년 대선 자금 관리자로서 책임을 지고 투옥된 1년 동안 참 고통스러웠는데, 그중에서 제가 노무현의 참모 안희정이 아니라 누구누구의 아빠 안희정으로서 행복감을 느끼지 못했다는 데 대해 후회가 밀려왔어요. 그 전에는 첫 번째도 민주화, 두 번째도 민주화, 세 번째도 민주화였죠(웃음). 같이 학생운동을 했는데, 왜 집사람은 밖에서 뜻있는 일을 하고 있는 나를 응원해주지 않을까, 이해가 안 갔거든요. 아내는 ‘아빠와 남편 역할을 통해 가정 안에서 행복해야 하는 거 아니냐’라고 했죠. 처음에는 그것을 이기적인 욕심이라고 생각하고 헌신하지 않는 아내를 원망했어요. 그런데 우리 모두는 결국 각자 살 부비면서 살아야 할 가정이라는 공간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어요. 의무와 책임감이 아니라 진심으로 가족과 있을 때 행복해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된 거죠. 이후로 우리 가족 관계는 좀 더 좋아졌어요.

갈등이 있어도 회복이 빨라지고요? 끊임없이 좋아지고 있어요. 지금도 계속.
둘째 아들이 고등학교를 마치면서 부인께서도 공관으로 들어오셨다죠? 이제 열흘 됐어요. 3대가 덕을 쌓아야 이룬다는 주말부부 생활도 끝이 났네요(웃음).

그동안 직접 밥을 해서 드셨다는 얘기를 듣고 놀랐어요. 최근 아내가 공부하러 다니다 보니 도지사 하기 전에 살던 용인 집에 일하시는 아주머니가 오시게 됐어요. 그런데 도지사 봉급 가지고 일하는 아주머니 두 분을 쓰려니까 쪼들리더라고요(웃음). 그래서 내포신도시 공관으로 오면서 “한쪽이라도 아끼자. 내가 해 먹을게” 한 거죠. 1년여 동안은 제가 해 먹었어요. 음식 하는 거 좋아해요.

텃밭도 가꾸신다고요? 시골 출신이라서요. 요즘은 텃밭이 20평 넘어가면 대농이라고 부른다는데, 공관 텃밭이 그 정도 되니 저는 대농이에요(웃음). 처음에는 철마다 뭘 심어야 하는지 몰라서 농업기술원에서 배웠는데, 가꾸다 보니 아주 재미있어요.

작년에는 무슨 농사가 잘됐나요? 이것저것 다요. 상추, 치커리, 겨자잎과 같은 쌈 채소에 고추, 호박, 가지, 무, 배추도 심었고요. 늦가을에는 지푸라기 깔고 생강도 심었어요. 그런데 솔직히 가끔은 잘 모르겠어요. 어떤 때 보면 분명 시들시들한데 다음날 보면 쌩쌩하거든요. 농업기술원 박사들이 나 몰래 손을 보고 갔나 싶을 때도 있어요(웃음). 그렇다고 힘이 들지는 않아요. 매일 아침에 30분 정도 김매주면 깨끗하거든요.

그야말로 로컬 푸드를 실천하면서 살고 계시네요. 그게 어렵지 않아요. 우선은 학교 운영위원회 어머님들이 관심을 가지셔서 가락동 경매 가격으로 사지 말고 재배 농가와 직거래로 물량을 공급받으면 훨씬 안전한 식재료로 아이들 급식을 할 수 있어요. 양파나 감자가 풍년이 들어서 아무리 발에 차이더라도 우리는 정당한 가격을 지불하고 먹어야 해요. 그게 정직한 소비예요. 무조건 싼 거 비교해서 사 먹는 건 그리 오래된 역사가 아니에요. 그런 경쟁을 하다 보면 그 교환 방식이 역으로 우리 모두를 비정규직으로, 일용직으로, 언제 잘릴지 모르는 불안정한 직업 고용 생태로 만들어버리거든요.

사회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참여에 대해 어렵게만 생각했는데 도시와 농촌이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이 실은 주부의 정당한 소비로 바로 실천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씀해주시니 쉽게 와 닿네요. 그럼요. 된장찌개, 감잣국, 감자채볶음 등으로 자주 먹는 감자는 매번 무겁게 장을 안 봐도 돼요. 오래 두면 싹이 나니까 1, 2주일 소비할 정도의 망 단위로 구입하면 되죠. 인터넷에 ‘농사랑’이라고 치면 충청남도 농특산물 인터넷 쇼핑몰이 나와요. 양파, 감자, 잡곡류, 쌀류 이런 것들은 이런 곳에서 직접 구매해서 먹으면 돼요. 택배비도 거의 안 들고, 훨씬 경제적이고. 그런 소비량이 전체 농수축산물의 거래량에서 30~40% 정도만 차지한다고 해도 우리 농수축산물 시장이 튼튼해져요.

부부도 노력이 필요해
이제 두 아들도 장성하고, 부부가 같이 살아가야 할 세월이 많이 남았잖아요. 어떻게 살겠다는 다짐이 있으세요?
사이좋게 사는 거죠. 사이좋게! 어느 정도 서로가 놓아야 해요. 그러면서도 아주 놔버리면 남남이잖아요. 놓으면서도 서로가 끈끈하게 잡을 수 있는 수준에 이르러야 50, 60대 원숙한 부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어요.

그게 어렵죠. 평소 부인에게 미안하다, 고맙다, 사랑한다는 표현을 잘하세요? 여성들은 남성들이 정서적으로 공감해주길 바라지만, 남성은 공감할 수 있는 박자 감각이 떨어져요. 그 훈련이 안 돼 있어요. 남자와 여자가 같은 인간이지만 정말 다른 종이라는 걸 인정해줘야 돼요. 예를 들어 아내가 남편에게 옆집 여자는 밍크코트를 입었더라는 얘기를 해요. 그럼 남편은 ‘사달라는 얘기인가, 아니면 내가 못 사주니까 나를 무시하는 건가’ 이런 식으로 받아들여요. 사실 이럴 때는 “당신이 그게 입고 싶었구나”라며 그저 속상한 아내의 마음을 알아주면 되는데 남자들이 그걸 깨닫기까지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려요. 저도 정말 인고의 세월을 거쳐서(웃음), 요즘에야 좀 알게 됐어요.

그걸 얼마 만에 알게 된 사실이에요? 20년 걸렸나 봐요. 남자 입장에서 보면 남자가 더 속상하고, 여자 입장에서 보면 여자가 더 속상한 그런 마음이 자꾸 생기면 미운 마음에 ‘웬수’가 돼요. 그래서 아이를 키우는 시점이 좀 지나가면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해요. 예를 들어 남성을 이해하려면 성적 욕망과 남성성에 대해 다룬 융의 책들을 읽어보세요.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이라는 책 ‘더 하이 스피치’ 챕터는 모두 읽어보길 바라요.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해 깊이 있는 이해를 해야 서로를 달래면서 좋은 친구 관계가 될 수 있어요.

부인께서도 그런 노력을 하신 편인가요? 아내는 심리학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어요. 아, 남편을 이해하려고 노력한 덕분에 제 아내가(일동 웃음)!

학문적인 성과를 이루셨군요! 얼마나 열 받고 복장 터졌으면(웃음). 아내 입장에서 보면 분명 남편은 좋은데 미운 거예요. 확실히 미워해버리면 괜찮은데, 미운데 미워할 수 없으면 시쳇말로 돌아버리는 거예요. 제 아내가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끝내 그 열 받음이 오늘날 공부를 하게 만든 거죠(웃음).

공감이 중요하다는 말씀이시죠? 이해해주고 공감하려면 첫 번째는 여자를 잘 이해해야 할 거 같지만 안 그래요. 남자 스스로 자기를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해요. 내가 무엇 때문에 열을 받았고, 무엇 때문에 욕구불만이 생겼고, 내 마음에서 요구하는 게 무엇인지 자신을 잘 볼 수 있어야만 상대를 이해할 수 있어요.

이번 인터뷰는 남편들이 꼭 봐야겠어요. 그냥 말로만 이해하면 안 돼요. 영혼 없이 이해해, 사랑해, 라고 하는 것을 여자는 단번에 알아요. (아내는 입술의 감촉만으로도 진정으로 사랑해서 하는 건지, 그렇지 않은 건지를 알아차린다는 부연 설명을 위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2006년 작 ‘프레스티지’ 스토리를 한참 들려주었다.) 그럼 남자는 모든 걸 다 이해해야 하느냐고요?(웃음) 그렇게 지지고 볶으면서 평화로운 질서, 사이좋은 질서를 만들어내는 거죠.

■글 / 장회정 기자 ■사진 / 박재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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