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대생, 행복을 전하는 그림쟁이가 되다…J비주얼스쿨 정진호 대표
시련이 가르쳐준 일상의 작은 행복
대화 내내 미소를 짓고 있는 부드러운 인상, 고생이라고는 모르고 살았을 것 같은 그에게서 나온 첫 이야기는 쉽사리 상상할 수 없었던 내용이었다. 대학 입학 후 입대해 군 생활을 하던 그는 그곳에서 연달아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접해야만 했다. 나쁜 일은 함께 온다고 했던가. 설상가상으로 집안은 파산을 하게 된다. 20대 어린 청년은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부양하며 자신의 학업을 끝까지 마쳐야만 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과거의 고통은 담담하고 짧았지만 상처의 흔적은 남아 있었다.
그렇게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의 터널 속에 있던 그에게 어느 날 한 줄기 빛이 등장했다. 결혼은 생각도 못하던 시절, 지금의 아내가 먼저 청혼을 해온 것이다. 아마 자신이 불쌍해서 결혼해준 거라며 웃는 그이지만, 세상에 불쌍하다고 결혼하는 여자가 있을까? 여전히 웃는 얼굴로 이야기하고 있는 그에게서 아내에 대한 깊은 사랑이 느껴졌다. 그렇게 스물넷에 가정을 꾸리고 세계적인 인터넷 포털 사이트 기업 야후에서 12년간 일하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운명 같은 그림도 만나게 된다.
“야후에서 일하던 시절 미국 출장이 잦았는데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던 때였어요. 모두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어떤 외국인 한 명이 작은 노트에 그림을 그리고 있더라고요. 그 모습이 정말 멋졌어요. 나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그러고 나서 한동안 잊고 지내던 그림에 대한 생각은 SK커뮤니케이션즈로 직장을 옮긴 뒤 회사 프로그램으로 버킷리스트를 쓰던 중 다시 살아나게 됐다. 마음 한구석에 있던 그림에 대한 열정을 다시 꺼내들고 홍대 앞의 입시 학원을 찾아갔지만 시험을 위한 경쟁적인 그림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돌아선 그 길로 서점을 찾아 따라 하기 쉬운 스케치법이 수록된 책을 한 권 샀다. 그리고 매일 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책 속의 그림을 모두 따라 그렸다. 맨 처음 선 긋기조차 어설펐던 그의 그림 실력은 1,500시간의 연습을 거치는 동안 점점 발전해갔다.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고 좌절하거나 힘들었던 적은 없었어요. 어제보다 좋아지는 제 그림이 보였거든요.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안 돼요. 과거의 나와 비교해서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봐야죠.”
그의 말은 뜻밖이었다.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첫 번째 요소, 남과의 비교가 당연한 무한경쟁의 시대에 살고 있는 지금의 우리에겐 낯선 이야기다. 다른 이가 아니라 어제의 나와 경쟁하라는 그의 말은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행복화실 강의 현장. 스케치화부터 색연필화 수체화까지. 학기 동안 총 12회 강의가 진행된다.
“사람들은 작은 행복들이 얼마나 많은지 잘 몰라요. 그래서 로또 당첨 같은 큰 행운이 오면 행복할 거라고 착각하죠. 하지만 저는 절대 그런 큰 행운은 바라지 않아요. 그런 건 찰나의 쾌락 같은 거예요. 욕심내지 않고 작은 기쁨을 찾아요. 그게 진짜 행복인 거 같아요. 저는 그림을 그리면서 행복했어요. 행복한 그림을 그리고 싶고요.”
그림을 그려온 과정을 SNS에 올려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타인과 공유하고 순수하게 행복을 나누고자 했던 그 행동은 선물이 돼 돌아왔다. 출판사에 다니던 한 팔로어의 제안으로 그간 SNS에 올렸던 그의 그림들을 모아 「철들고 그림 그리다」라는 책을 출간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을 교재 삼아 정진호씨는 회사에서 ‘행복화실’이라는 동아리를 만들게 됐고, 사원들의 뜨거운 반응은 물론 언론에도 소개될 정도로 반향이 컸다.
하지만 좋은 일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희망퇴직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한창 커가는 두 아이가 있는 그에게 또다시 닥친 시련이었다. 실업수당 100만원이 생활비의 전부였다. 3개월 뒤에는 꼭 취직을 하라는 아내의 말대로 정진호씨도 새로운 직장을 찾으려 했다. 그리고 그동안 남는 시간을 그냥 보내는 것이 아까워 행복화실을 공개 강좌로 열었다. 그의 걱정과는 다르게 강좌는 일찌감치 마감이 되며 큰 호응을 얻었고, 자연스럽게 다음 강좌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행복화실에 오시는 분들은 다양한 연령대의 주부, 직장인들이에요. 물론 그림을 잘 그리고 싶어서 오시는 분들이지만 잘 그리는 방법을 가르치지는 않아요. 자신의 그림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려주죠. 어떤 그림이든 잘된 부분이 하나씩 있거든요. 그렇게 장점을 찾아서 칭찬하면 자신의 그림을 좋아하게 돼요.”
자신의 장점을 찾아주고 인정해주는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는 것. 그것이 인기 강좌가 된 비결이 아닐까?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는 제자의 모습을 볼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는 그는 이제 그는 1인 기업 ‘J비주얼스쿨’의 대표로서 행복화실과 더불어 그림을 통해 생각과 감정을 정리하는 마인드 맵, 비주얼 싱킹을 강의하며 행복해지는 기술을 또 다른 방법으로 알리고 있다.
우연도 운도 아니었다. 어떤 경우에도 좌절하거나 주저앉지 않고 좋아하는 일을 꾸준히 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자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앞으로 30년간 계속해서 그림을 그릴 거라는 그의 모습에서 또 얼마나 많은 행복의 세 잎 클로버가 싹을 틔울지 기대된다. 그림을 사랑한 공대생 정진호씨는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기쁘다고 했다. 그런 그에게 감히 ‘행복의 전령사’라는 호칭을 붙여본다.
■기획 / 노정연 기자 ■글 / 박은정(프리랜서) ■사진 / 안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