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지에서 전해온 생생한 이야기 ‘코피노’의 맨얼굴
필리핀 현지에서 가장 활발히 코피노 맘을 돕고 있는 코피노 지원 단체 WLK(We Love Kopino). 단체에 소속된 2명의 현지인과 5명의 한국인 스태프는 코피노 가족이 주로 거주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곳이 위험 지역, 빈민가라 할지라도 거침없이 달려간다. 그들의 역할은 한 가지다. 그동안 경시되고 핍박받고 있는 코피노 가족들의 권리를 찾아주는 것이다. 이들의 노력으로 지난 6월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코피노 아버지를 상대로 낸 양육권 소송에서 승소 판결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WLK를 이끌고 있는 구본창씨(53)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한국에서 교육 서적을 발간하며 대입종합학원 영어 강사로 일하다 자신의 학원을 12년간 운영해온, 어찌 보면 지금의 시민활동가와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다. 그의 나이 47세, 이른 은퇴 후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가족과 함께 필리핀으로 이주했다. 그가 코피노 맘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뭘까? 그는 코피노 맘으로 힘겹게 살아가던 한 지인이 있었다고 한다.
“저는 필리핀에 살면서도 코피노에 대한 의식이 전혀 없었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지인 중에 클럽 댄서로 일하며 코피노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여성이 있었어요. 그녀는 과거 영어 개인교사로 일하다 한국인 학생과 사귀기 시작했다고 해요. 남자가 2년간 그녀의 집에 얹혀살면서 둘 사이에 자연스레 아이가 생겼지요. 남자는 부모님께 결혼 허락을 받고 오겠다며 한국으로 떠났고, 결국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는 그녀에게 한국 주소를 적어줬는데 나중에 보니 영어 표기로 ‘그걸 믿니, 18 코리아’라고 쓰여 있었던 거예요. 남성과 연락이 끊긴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홀로 아이를 키웠는데, 아이에게 병이 생겼어요. 그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었죠. 여기는 의료보험 제도가 없어 병원비가 비싸거든요. 결국 치료비를 감당하기 위해 댄서 일을 시작했지만 아이는 하늘나라로 떠났죠. 그때 제가 그 친구랑 약속했어요. 어떤 식으로든 코피노 맘을 돕겠다고요.”
이후 그는 생활고를 겪고 있는 코피노 맘들을 수소문해 한국 남성들을 상대로 양육비 청구 소송을 하도록 돕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필리핀 현지의 변호사들을 설득했다. 그러나 후불제 소송이며 패소할 경우 수임료를 받는 건 불가능하다는 그의 제안에 모두 난색을 표했다.
“대부분의 코피노 맘들이 하루의 끼니를 걱정하고 있는 상황인데 어떻게 변호사 수임료를 마련할 수 있겠어요? 게다가 패소를 하면 그 돈마저 날리는 상황이 될 테고요. 그래서 변호사들에게 후불제를 제안했지만, 국제 소송이라 시간과 비용이 일반 소송에 비해 훨씬 더 많이 들어가는 터라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어요.”

필리핀에서 코피노 지원 활동을 가장 활발히 하고 있는 WLK를 이끌고 있는 구본창씨.
“아버지에게 버려지는 코피노는 매년 발생되고 있는 사회문제지만 관련 양육비 청구 소송에서 승소 판결을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예요. 그동안 승소가 어려웠던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여성들은 소송을 준비할 형편이 안됐던 거예요. 이번 소송을 계기로 그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고 또 한국 남성들에게도 경각심을 심어주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그를 비롯해 스태프가 활동하면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어떤 것인지 물었다. 그들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신변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라고 답했다.
일부 적반하장 한국 남성들
필리핀은 개인 총기 소지가 가능하니 늘 주의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게다가 어렵게 연결된 여성과 양육비 청구 소송을 진행하려 하면 한국 남성 쪽에서 필리핀의 폭력배를 고용해 청부 협박하는 일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다.
“‘협박하면 경찰에 신고하면 되지 않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필리핀 사회가 그리 투명하지 못해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것이 돈으로 움직이는 곳이라 빈민가에서는 사람이 죽어도 경찰들이 잘 움직이지 않아요. 그래서 저희가 직접 현장으로 달려가 여성을 보호해줘야 하는 경우도 많이 생기죠. “
코피노 관련 일을 하다 보니 현지에서 필리핀 여성과 한국 남성 사이에 생기는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요청을 종종 받기도 한다.
“한국으로 도망간 사람도 나쁘지만 마닐라에도 이상한 한국 남자가 많아요. 카지노 주변이나 유흥가에서 생활하는 한국인 건달 중에는 필리핀 여성을 사귀어 아이를 낳고 툭하면 폭력을 휘두르는 이들도 있어요. 또 여성을 강제로 클럽에서 일하게 하고 용돈을 뜯어가기도 하고요.”

WLK는 후원자들과 함께 정기적으로 코피노 가족을 위한 캠프와 파티를 연다. 함께 교류하며 그들의 낮아진 자존감을 회복하고 사기를 북돋우는 목적이다. 필리핀 마닐라에 사는 코피노들을 위한 무료 한국어 강좌에 온 아이들.
“남성에 대한 인적사항이 파악되면 바로 해당 글과 사진을 내립니다. 때론 제 행동이 비난받아야 할 일이라도 여성들과 아이들을 생각하며 감수할 겁니다. 만약 누군가가 법적으로 문제 삼더라도 상관없으며 포스팅을 그만둘 생각 또한 없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이토록 결연하게 만들었을까? 그들은 직접 코피노 맘들의 삶을 보고 느껴보면 때로는 어려움에 부딪히더라도 활동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양육비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활동을 하며 가장 보람된 일은 당연히 양육비를 대신 받아줬을 때다. 아이를 위해 쓰겠다고 말하는 엄마들의 모습을 보면 힘이 절로 난다.
“이곳에서 유명 대학을 나와 고소득 직종인 콜센터에서 근무하는 코피노 맘이 있었는데, 아이가 아파서 수술 날짜를 받아놓았어요. 그러다 양육비를 받게 됐고 그 돈으로 무사히 수술을 마칠 수 있었죠. 또 아이에게 과일 한 번을 사주지 못했다며 양육비로 실컷 사주겠다고 기뻐하는 이도 있었고요. 망고를 싼값에 실컷 먹을 수 있어 필리핀으로 여행 오는 분들도 계시지만, 정작 여기 사는 절반 이상의 서민층은 바나나나 파인애플조차 못 먹어요.”
얼마 전 구본창씨가 도와준 코피노 맘 중 양육비 청구 소송 판결이 나기 전에 합의를 통해 원만히 해결된 일이 있었다. 그 여성은 합의금으로 받은 돈으로 지프니(트럭 형태의 대중교통 수단)를 한 대 구입해 가족과 운영하며 생계를 해결하게 됐다.
“여기서 지프니 한 대 가격은 1,000만원 정도예요. 이것 하나 있으면 서민들은 밥 먹고 살 걱정은 없어지죠. 그 코피노 맘이 고맙다며 치킨을 사줬어요. 그리고 가는 길에 제게 4,000페소(한화 약 10만원)를 손에 쥐어주는 거예요. 앞으로 자기처럼 소송하는 코피노 맘들을 만나 밥을 사줄 때 보태라고 말이죠. 고마워서 눈물이 날 뻔했어요.”

현지에서 전해온 생생한 이야기 ‘코피노’의 맨얼굴
당신은 코피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코피노 지원이나 활동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임신을 빌미로 양육비 챙기려는 것 아니냐, 대부분 윤락녀 출신인데 무슨 지원이 필요하냐, 국내에도 어려운 미혼모가 많은데 해외까지 신경 써야 하나…. 코피노 맘들의 실상을 파악하고 있는 현지 스태프에게 돌직구로 물어봤다.
코피노 맘은 윤락녀 출신이다? “WLK가 접촉한 코피노 맘은 700명이 넘습니다. 그중 윤락녀 출신은 10%가 채 되지 않아요. 대부분 영어 개인교사였거나 특정 직업을 갖고 있지 않은 여성들이죠. 10%의 윤락녀 중에서도 한 번의 윤락 행위로 아이가 생긴 경우는 없어요. 그들은 성병 대비나 임신 방지 차원에서 철저히 피임을 하거든요. 처음에는 술집에서 손님으로 만났지만 관계가 지속되고 실제 애인 관계가 되면서 아이가 생기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이상하게 코피노 현상을 매춘 관광과 연결지어 생각하는 분들이 많아요. 코피노에 대한 후원이 거의 없는 이유 중 하나죠. ‘매춘으로 낳은 아이를 우리가 왜 돌봐야 하나, 자기들이 알아서 할 문제지’라는 인식이 생길 수밖에 없고, 솔직히 동정심이 덜 가잖아요.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아요. 서로 다른 문제예요.”

구씨의 블로그에 올라온 코피노의 아빠를 찾는 사람들의 사진. 사생활이나 개인정보 노출 문제가 제기되고 있으나 그는 향후 코피노 양산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계속해나가겠다며 소신을 굽히지 않고 있다.
외국 남성에 대한 필리핀 여성들의 무조건적인 동경도 문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외국인 남성이 필리핀 남성들보다 부자인 경우가 많은 건 맞으니 선호가 높을 수는 있다고 생각해요. 코피노 맘들 중에는 임신해서 가난에서 벗어나보자는 생각을 하는 이도 일부 있겠지요. 그렇데 그렇게 싸잡아 판단하기에는 참으로 불행한 삶을 사는 코피노 맘들이 많습니다. 일부를 전체인 것처럼 몰아세우는 것도 자국보다 어려운 나라에 대한 지나친 우월 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코피노 맘을 돈벌이로 이용하는 현지 봉사 단체도 있다던데? “얼마 전 어느 시사 프로그램에서 저희를 취재하러 왔어요. 인터뷰를 하다 보니 현지 사정과 영 동떨어진 내용을 이야기하시더라고요. 현지 코피노 단체들이 비리를 저질러 돈을 착복한다고 말씀하시던데, 그런 단체는 없다고 단호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오히려 운영비가 부족해 어려움을 겪고 있어 휴업 상태인 단체가 90%예요.”
자피노(일본 남성과 필리핀 여성 사이에서 낳은 아이)도 많은데 왜 코피노만 사회문제라고 하나? “자피노의 경우는 현지에서 문제가 되지 않는 이유가 있어요. 일본 정부가 적극적으로 자피노를 위한 현지 기술학교를 많이 세웠고, 일본 취업의 길도 열어놓고 국적도 취득할 수 있게 해줬지요. 그래서 상대적으로 코피노에 비해 자피노에 대한 좋지 않은 인식이나 불만이 적은 거예요.”
■글 / 이유진 기자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 ■사진 제공 / 구본창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