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인숙 작가, 카메라로 보니 남편 마음이 보였다
“한 여자의 남편, 아들과 딸 쌍둥이의 아빠 그리고 회사원이라는 역할이 남편의 목을 옥죄고 있는 단단한 줄이었어요. 훌훌 목줄을 벗어버리고 싶어도 가장이란 본분 때문에 묵묵히 버티고 있었을 거예요.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달리 해줄 수 있는 게 없었어요.”
오 작가는 남편에게 짙게 드리워져 가는 그늘에 점점 불안해졌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남편을 이해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그를 찍기 시작했다. 짐짓 외면했던 남편을 똑바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남편의 방황을 지켜보며
여러모로 남편은 찍기 힘든 피사체였다. 카메라를 향해 감정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풍부한 표정을 보여주길 주저하지 않던 쌍둥이 딸들과는 한참 달랐다.
“처음에는 얼굴을 보여주지도 않았어요. 어쩌다 어렵사리 프레임 안에 넣었다 싶어도 웃거나 화내거나 무표정한, 딱 세 가지 얼굴뿐이었고요. 얼굴을 가리고 저만치 가버리기 일쑤였고 때론 찍지 말라고 소리를 버럭 지르기도 했고요. 딱히 방법이 있나요? 열심히 남편 눈치를 봤죠(웃음). 지금 기분이 괜찮나? 표정이 왜 안 좋지? 어디 아픈 거 아닌가? 혹시 무슨 일이 있었나?”
셔터를 누를 타이밍을 포착하기 위해 자꾸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는데, 나중에 보니 그건 남편의 마음속을 살피는 일이었다. 정년이 짧고 치열하기로 악명 높은 프로그래머로 직장 생활을 하면서 남편은 지쳐가고 있었다. 틈만 나면 멍하니 창밖을 응시하는 일이 많아졌고 몸이 아픈 날도 늘어갔다. 오 작가는 교사 생활을 하면서 사진학교를 다니고 거리로 나가 사진을 찍으면서 숨통을 틔웠지만, 남편에게는 그런 해방구가 없었던 거다.

오인숙 작가, 카메라로 보니 남편 마음이 보였다
아내의 눈보다 작가의 카메라가 남편을 좀 더 자유롭게 놓아줬다. 하지만 작가이기 전에 그 남자의 아내. 남편의 마음에 유난히 험한 파도가 치는 날이면 오 작가도 함께 이리저리 흔들렸다. 한배 안의 부부이니 어쩌겠는가. 하지만 사진을 찍기로 결심했고 남편을 이해하려고 마음먹은 이상, 파도를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아내로서 질척한 감정이 있는 상태에서는 사진을 찍을 수가 없더라고요. 부부 사이에 별의별 감정이 폈다 졌다 하는데, 그걸 다스리는 게 쉽지 않잖아요. 남편한테 화가 날 때는 사진이 다 뭐예요, 카메라도 생각이 안 나죠(웃음). 어쩔 수 없이 제 다짐을 작업 노트에 쓰고 마음이 요동칠 때마다 주문을 외듯 들여다보면서 수없이 제 마음을 단속했어요.”
남편이자 아버지인 그가 많이 아파 보인다. 자신의 본질이 아니라 역할로만 불리기 시작한 즈음 그의 병도 시작된 것 같다. 아내인 나는 그가 제 역할을 충실히 해주기만을 바라왔고 지금도 그것은 부인할 수 없다. 내가 껍데기를 깨고 내 본질을 향해 갈 수 있도록 그가 흔쾌히 마음을 열어주었던 것처럼 나도 그에게 마음을 열어주어야 할 텐데 쉽지가 않다. 하지만 나는 카메라를 통해 그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의 모습을 온전히 인정하기로 했다. -「서울 염소」 中
부부란 거울 같은 관계다. 어지간히 비협조적이었던 남편의 태도도 변해갔다. 아내가 포기하지 않고 어떨 땐 바짝 들이대고 또 어떨 땐 한발 물러나 기다리길 반복하자 슬쩍슬쩍 카메라를 봐주기 시작했다. 감정이 안 좋을 때도 아내가 참아가면서 자신을 대하는 모습에 마음이 열린 것이다. 남편 김종호씨는 후에 이런 말로 모델을 수락한 이유를 밝혔다.
“처음엔 아내가 자신의 사진 욕심에 자꾸 나를 찍는가 보다 했는데 어느 날 보니까 제가 하는 말을 다 받아 적는 거예요. 울컥했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카메라를 향하기 시작했어요. ‘인자 찍든가 말든가 마음대로 한번 해보라’고.”

오인숙 작가, 카메라로 보니 남편 마음이 보였다
카메라를 향하겠다고 마음먹은 남편은 마음도 활짝 열었다. 그 전까지는 무표정 일색이었던 남편 사진이 조금씩 다채롭게 변해갔다. 아내에게 털어놓는 이야기도 늘어갔다.
“한두 해 찍고 만 게 아니라 10년 넘게 계속 자신의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받아 적으니까 남편도 받아들인 것 같아요. ‘아, 이 여자가 진심이구나. 진심으로 나를 보는구나’ 싶었겠죠. 정말 제 마음도 그랬고요. 남편 사진 작업이 부부 관계가 좋아지는 큰 밑거름이 됐어요.”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물리적인 노력이 꼭 필요하다. 함께 시간을 보내야 사진을 찍을 수 있으니까. 곁에서 카메라만큼 한발 물러나니 서로 숨 쉬기가 더 편했다.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서로 마음속 이야기와 미래에 대한 고민을 나누면서 부부의 정서적 거리는 훨씬 가까워졌다. 남편은 목줄 맨 ‘서울 염소’의 삶을 그만두고 싶다고 했다. 집 짓는 법을 배우는 학교에 다녀오기도 하고, 시골로 내려가 집 짓고 살고 싶은 속내를 자주 내비쳤다. 물려받은 것 하나 없는데 직장 생활을 하지 않고도 어떻게 시골에서 지속 가능한 삶을 살 수 있을지 막막했다. 하지만 한 번도 가장의 의무를 져버린 적이 없는 성실한 남편이 한 사람으로서 갖는 소망을 외면하기도 힘들었다. 진퇴양난이었다.

오인숙 작가, 카메라로 보니 남편 마음이 보였다
사진을 찍으면서 부부는 그 전보다 훨씬 많은 대화를 나눴다. 카메라를 들이대려면 무슨 말이든 붙여야 하니까 가벼이 주고받던 대화가 점점 농밀해졌다.
“맞벌이 부부라 얼굴 볼 시간도 많지 않았고 시부모님과 같이 살기도 했고요. 같이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적었으니까 이야기를 나눌 시간도 없었는데, 사진 찍으며 함께 다니다 보니 신혼 때보다 얘기를 더 많이 하게 돼요(웃음). 서로 훨씬 더 편해졌고요.”
더 이상 ‘서울 염소’가 아니다
서로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진실한 말들이 서로의 마음에 스며들면서 해독이 된 걸까. 남편도, 아내도 점차 안정을 되찾아갔다. 남편은 여전히 ‘서울 염소’로 살고 있었지만, 때때로 스스로 목줄을 풀고 나갔다. 열병처럼 앓던 시골집을 산 것이다. 이미 오 작가는 그의 꿈을 막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부부로 살려면 싸우든가 받아들이든가, 택일해야 했다. 사람이 살지 않던 허름한 농가 주택을 남편은 세상에 하나뿐인 궁전인 것처럼 정성을 들여 쓸고 닦고 고쳤다. 틈만 나면 시골로 내려가 집에 매달렸다. 시골집은 비로소 찾은 남편의 해방구였다.
시골집에서 찍은 남편 사진은 도시에서와는 무척 달랐다. 표정이 환했고 생기가 넘쳤다. 그토록 좋아하는 남편을 보니 아내도 시골집에 애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집수리를 하고 남은 각목으로 남편이 뚝딱 만들어준 작은 평상에 앉아 부부의 기념사진을 남겼다. 빨간 망개나무 가지가 뒤에 걸려 있고 앞에는 팔짱을 끼고 앉아 천진하게 웃는 부부의 모습이 담긴 이 사진을, 오 작가는 가장 좋아한다.
“그 순간에는 우리한테 무엇이 있고 없고가 중요하지 않았어요. 하루 종일 남편과 많은 이야기를 나눈 날이었고, 햇빛이 따뜻했고, 이루 말할 수 없이 충만했어요. 나도 모르게 ‘아, 행복하다’라고 느낀 그런 순간이요.”
그렇게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같은 행복을 느끼기까지 2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어쩌면 그래서 그 순간이 더 소중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평온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회사에 살벌한 구조조정 바람이 불었고 우여곡절 끝에 남편은 회사를 나왔다. 남편의 긴 방황은 그렇게 끝났다. 괜찮다고 웃었지만 남편은 초라해 보였다. 오 작가도 혹독한 병치레 끝에 학교를 그만둔 터였다. 전환이 필요했다.

오인숙 작가, 카메라로 보니 남편 마음이 보였다
“20년 가까이 가족을 위해 살아온 사람인데 소원 하나는 들어줘야지 싶었어요. 우리가 돈이 많아서 떠난 건 아니에요. 3개월 동안 아끼고 아껴서 네 식구가 500만원으로 살았는데, 그러다 보니 관광지가 아닌 현지인들이 사는 허름한 동네에 주로 머물렀어요. 물론 그 시간에 돈을 벌 수도 있었겠지만, 저희 가족에게 귀한 경험이 된 덕분에 후회는 없어요. 딸들에게는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다는 걸 알려준 계기도 됐고요. 물론 정말 징그럽게 싸웠죠(웃음).”
남편을 보는 건 나를 보는 일
여행에서 돌아오니 기다리고 있는 현실은 남루했다. 당장 냉장고가 휑했고 비워둔 셋집에는 곰팡이가 슬었지만 더 이상 예전처럼 심하게 동요되지는 않았다. 남편의 긴 방황을 지켜보고 여행을 다녀오고 나니 깨달은 바가 있었다.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걱정은 잠시 접어두는 게 낫다는 걸, 순간순간을 온전히 만끽하는 것이 나에게 더 맞는 삶의 방식이라는 걸 말이다.
“시골집이나 세계 여행이나, 이런 세부적인 것은 중요치 않아요. 무엇이 됐든 자신에게 어떤 것이 중요한지 알아야 돼요. 원하는 것을 위해서는 다른 것을 포기할 줄 알게 되잖아요. 계속 원하는 삶의 모습을 생각하고 조금씩 그쪽으로 향해가면서 살고 싶어요.”
남편은 곧 새 직장을 구했고, 다시는 예전처럼 살지 않겠다며 머리를 삭발하고 씩씩하게 출근했다. 월급은 줄었지만 남편은 전보다 훨씬 행복해졌다. 남편의 방황에 덩달아 함께 불안해하다가 그의 사진을 찍기 시작하면서 남편의 마음에 귀를 기울였고, 남편이 꿈꾸는 삶이 무엇인지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나중에 깨달았다. 남편을 이해하기 위해 사진을 찍기 시작했는데 결국 그건 나를 이해하는 일이었다는 걸 말이다.
아빠의 사진과 엄마의 글이 담긴 「서울 염소」를 읽은 아이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평소 아빠와 많이 부딪혔던 딸은 대성통곡을 하더니 엄마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우리 가족 모두에게 깊은 감동을 받았고 엄마, 아빠라는 직위를 자유롭게 떨쳐버리세요”라는 제법 철든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다른 딸은 “엄마,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라고 물었고, 아들은 “가족이 뭔지 확 다가왔다”라고 시원한 소감을 남겼다. 아들의 힘든 방황기를 보면 마음이 미어지실까 봐 시부모님께는 아직도 보여드리지 못했다.
“이런 반응이 나올 줄 몰랐지만, 아이들에게 뭔가 큰 걸 물려줬구나 싶어서 흐뭇하죠. 남편은요? 책도 잘 안 보려고 해요. 매일 수없이 본 사진, 자기가 한 얘기를 뭘 또 보냐고요(웃음).”
덤덤하게 말하지만 남편은 이제 자기가 먼저 나서서 사진 아이디어를 내놓을 정도로 적극적이고 협조적으로 변했다. 이번 작업으로 인해 삶을 중간 정산한 기분이라는 오 작가는 이 책을 남편 또래의 중년 남자들에게 건네고 싶다고 했다. 그들의 아내도 봤으면 한다고 했다. 팍팍한 삶에 조금이나마 위로가 됐으면 좋겠다면서 말이다.
“여보”, “당신”으로 서로를 부르던 동갑내기 부부는 이제 “인숙아!”, “종호야!”라고 서로를 부른다. 딸의 말대로 남편과 아내라는 직위를 떨쳐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서로에게 되찾아주고 있다.
■기획 / 장회정 기자 ■글 / 정성민(프리랜서) ■사진 / 안지영 ■사진 제공 / 오인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