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용적 이상주의자 신경민을 만나다
좀처럼 드문 월간지 인터뷰라며 그가 농인 듯 던지며 웃었다. 올여름 최고 기온을 기록한 날, 이른 아침부터 이미 네댓 개의 일정을 마치고 달려온 새정치민주연합 신경민(62) 의원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한여름의 대기와는 달리 여유로워 보였다. 침착한 그 모습이 카메라 앞에서 뉴스를 전하던 앵커 시절의 모습과 자연스럽게 오버랩됐다. 그럴 만하지 않은가. 1981년 문화방송 기자로 입사해 2009년 9월 퇴임할 때까지 30년 8개월간 언론인이었던 그이니 말이다. 지난 2012년 민주통합당 대변인으로 정치에 발을 들인 그는 19대 총선에서 여당의 3선 중진의원을 낙마시키며 화려하게 국회에 진출했다. 이듬해 5월에는 초선의원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전당대회 최다 득표를 얻으며 최고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언론인 신경민을 벗고 정치인 신경민으로 살아온 그간의 이야기를 물었다.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긴장감은 이제 장성해 친구 같은 아들과 딸, 틈날 때마다 함께 시간을 보내는 아내 이야기를 할 때면 기분 좋게 이완되곤 했다. 언론인에서 정치인으로 업은 바뀌었지만 자유와 민주, 약자를 위해 싸우겠다던 신념에는 변함이 없었다.
아직도 ‘신경민’ 하면 제일 먼저 뉴스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아요. 앵커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한 지 벌써 4년 차로 접어들었는데, 어떠세요? 3년이 좀 넘었죠. 이제 4년 차에 들어섰는데, 생활 반경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어요. MBC에서 국회로, 여의도 동쪽에 있다 서쪽으로 직장이 옮겨졌죠. 집도 여의도에 있고 지역구도 영등포예요. 해보니, 선출직이라는 게 굉장히 힘든 일이에요. 되기도 힘들고, 되고 나서도 쉽지 않아요. 누군가 선출직은 전생에 죄지은 사람이 와서 하는 거라고 하던데, 그 말이 맞아요(웃음). 지역구 관리를 해야 하고 이해가 정면으로 부딪히는 일들을 해야 하니 몸도 마음도 결코 편한 직업이 아니에요.
생활 반경은 비슷하더라도 하는 일은 다르죠. 기자와 가장 다른 점은 뭔가요? 우선 내가 책임져야 할 지역구가 있다는 점이죠. 기자는 독립적으로 움직여요. 물론 협업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혼자 취재하고 기사 쓰고 출고하고. 오보가 있으면 법적 책임을 지든지 가서 빌든지 해서 마무리하고 다음날 또 다른 일을 시작하죠. 지금 하는 일들은 수많은 사람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처리해나가야 하는 일들이에요. 단기간에 처리되는 일도 거의 없고요.
300명 국회의원 중에 집과 직장, 지역구가 같은 유일한 국회의원이에요. 걸어 다니면 다 지역구예요. 밥 먹으러 가는 곳도 지역구, 사람들 만나는 곳도 지역구. 기자 생활 할 때는 출입처가 있는 광화문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어요. 청와대부터 시청까지가 홈타운이었죠. 학교 다닐 땐 혜화동과 신촌에서, 기자 입사 이후로는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광화문 일대에서 보냈어요. 먼 거리도 아닌데 시간이 없어서 요즘은 잘 못 가요.
그 정도예요? 주말 포함해서 일정이 없는 날이 거의 없어요.
오늘 일정은 어떻게 되세요. 오늘은 아침 8시에 영등포 6·25전쟁 참전용사 행사에 갔다가 9시 20분에 여의도중학교에서 학생들과 ‘전문 직업인과의 대화’를 했어요. 10시 반에는 시구 위원들 주례회의, 12시에는 서울시내 구의회 의장단 월례회, 점심 먹고 나선 17기 민주평통자문회의 영등포구 협의회 출범식 그리고 지금 인터뷰가 끝나고 나면 시당회의 주제, 라디오 인터뷰, 밤에는 문상 다녀올 곳이 있고 지역 일정이 두어 개 있어요. 보통 이래요.
지역구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시겠어요. 여의도에 와서 큰애를 낳았으니 딱 33년 살았어요. 나름 여의도와 영등포를 잘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다녀보니 제가 몰랐던 모습이 많더라고요. 영등포는 여러 이질적인 문화가 섞인 곳이에요. 여의도가 굉장히 맨해튼적인 분위기가 있다면 신길동은 전통적인 주택가였다가 지금 재개발 와중에 있어요. 대림동은 또 달라요. 중국 교포들이 그들만의 문화를 형성하고 있죠. 무슨 얘기든 다 끌어안고 들어주는 게 선출직의 숙명이라고 생각해요. 풀 수 있는 문제는 풀어야죠.
31년을 기자로 살았고 지금은 정치인으로 살고 있어요. 자연스러운 행보인가 싶으면서도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궁금했어요. 정치의 중요성을 깨우친 건 대학교 때부터였어요. 사회과학을 공부하며 정치학적 오리엔테이션이 강했는데, 정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한국 사회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죠. 언젠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해야겠다고 생각했으면서도 막상 처음 제의가 왔을 때는 고민이 많았어요. 그래도 바꿔야 한다,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옳다고 믿는 일엔 이것저것 계산하지 않고 뛰어드는 성격이 에요. 사실 지금도 고민이 많아요. 시스템과 구조를 그대로 둔 상태에서 한두 사람이 바뀐다고 변하지 않거든요. 하지만 정치를 바꾸지 않고는 한국 사회가 좋아지지 않아요. 그건 분명합니다. 정치는 우리 일상생활의 모든 걸 결정해요. 부지불식간에 우리 가족, 비즈니스, 친구와 동료들, 작은 골목에서부터 큰 거리까지 모두 정치와 연결돼 있어요. 그걸 알아야 해요.
국정원 댓글 대선 개입 사건을 비롯해 세월호 참사, 메르스 사태, 최근 국정원 해킹 팀 사건까지, 정치 현안에도 강력한 목소리를 내셨죠. 제가 강성이라고 하시는 분들도 계시는데, 전 기본적으로 원칙론자예요.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사건인데 당연히 강력하게 나가야죠. 원칙에 어긋나는 일에 대해서는 이기고 지는 걸 떠나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달려드는 편이에요. 이번에 터진 국정원 해킹 의혹 사건은 댓글 사건보다 훨씬 악질적이에요. 말도 안 되는 일이죠.
정보위원회 야당 간사이자 새정연 국민정보지키기위원회 진상조사소위원장으로 이번 사건을 조사 중인데, 어떻게 될까요? 궁극적으로는 국정원 개혁을 해야 해요. 대통령이 문제의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국민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야 하고요.
한편으로는 학자 스타일이라는 평도 있어요. 제가 술, 담배를 못해요. 그게 지금의 체력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됐어요. 기자 시절에도 제일 힘들었던 게 일보다 술이었어요. 취재원을 만나거나 할 때 술이 중요한 매개체인데, 그게 구멍이었어요. 사내 정치에도 잘 못 꼈죠. 술자리참석도 적고 와서도 잘 못 마시니까 안 불러주고, 그러다 보니 사람이 너무 고고하다, 엘리티스트적이다, 이런 말이 나오는 것 같아요. 정말 그런지는 잘 모르겠는데, 실제 음주가무에 관심이 없긴 해요. 노래도 못하고 춤도 젬병이에요. 음정 박자 다 틀리고 가사만 정확해요(웃음).
소통의 자양분이 된 가족과의 추억
국회에 오고 나서 가족과 보내는 시간도 많이 줄어들었겠어요. 그게 참 미안해요. 기자 때도 바빴거든요. 아들 하나 딸 하나인데, 아이들 어렸을 때 항상 잠든 모습만 보여줬어요. 아이들도 그때를 떠올리면 잠자고 있는 아빠가 생각난대요. 주 6일 근무에 휴일 근무, 야근도 많이 했기 때문에 한 달에 아이들과 제대로 놀아줄 수 있는 날이 하루 이틀 정도였어요.
육아나 아이들 교육에 신경 쓸 기회가 별로 없었겠어요. 다행인 건 제가 미국 연수와 워싱턴 특파원 생활을 하며 가족과 시간을 보낼 기회가 있었다는 거예요. 연수가 1987년, 1997년, 특파원이 2000년이었으니까 아이들이 초·중·고등학교 때 한 번씩 다녀온 셈이에요. 그때 아이들과 많이 친해졌죠. 여행도 자주 다니고요. 지금도 아이들과 친해요. 못 믿겠으면 전화 확인도 가능해요(웃음).
장성한 자녀들과 소통하는 게 쉽지 않잖아요. 특히 아버지들은 더욱 어렵지 않나요? 아마 미국 연수를 안 갔더라면 저희 집도 그랬을 거예요. 아이들과 서울대공원이나 유원지에 가서 청룡열차를 탔던 기억은 없지만, 자동차 여행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다양한 경험을 함께했던 추억이 있어요. 그때 그 시간들이 지금 소통하는 데 큰 도움이 됐죠.

실용적 이상주의자 신경민을 만나다
자녀분들은 무슨 일을 하세요? 큰애는 직장생활을 하고 있고 작은애는 공부 중이에요. 우리 아들은 운동에 미쳤어요(웃음). 농구도 잘하고 야구도 잘해요. 체격도 좋고요. 미국에 있을 때도 미국 애들과 팔씨름해서 지지 않을 정도였어요. 지금은 스포츠 구단에서 매니지먼트를 하고 있어요. 저는 운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누굴 닮았는지 모르겠어요. 딸아이는 원래 국제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는데, 지금은 이주민에 관한 연구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중이에요. 서울에서 이주민이 가장 많은 지역이 대림동이거든요. 아빠의 지역구이기도 하고,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이주민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지 않았나 싶어요.
학창 시절에 모범생이셨죠? 특별히 사고치는 학생은 아니었어요. 책 좋아하고 모범생 축에 들었죠.
선친께서 전북일보 기자와 전북도민일보의 사장을 지내셨어요. 그 당시 아버지가 언론계에 종사한다는 것이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매일 신문 스크랩을 하시는 아버지를 보고 자랐어요. 아버지께서는 당시 발행되던 신문을 모두 구독하셨거든요. 덕분에 신문을 보며 한글과 한자를 깨우쳤어요. 신문사 편집부를 놀이터 삼아 놀면서 일찌감치 윤전기 잉크 냄새를 맡으며 자랐죠. 집에서 3분 거리에 KBS 전주 방송국이 있었고요. 당시 아버지의 언론사 친구분들이나 정치인들, 여러 문화, 경제 인사들이 제겐 아저씨였고 삼촌이었어요. 술심부름, 담배심부름 하며 용돈도 많이 받았죠. 그런 환경에서 자라다 보니 어렸을 때부터 말과 글에 대한 감각이 자연스럽게 길러지지 않았나 싶어요. 언론이 어떤 기능을 하고 어떤 메커니즘으로 돌아가는지 일찍부터 이해하게 됐죠.
그런데 신문이 아닌 방송기자가 됐어요. 그게 스토리가 있어요. 제가 1980년 언론사 통폐합 때 기자 시험을 봤는데, 그 당시 시험이 MBC, 동아일보, 중앙일보 세 군데가 있었어요. 동아일보와 MBC에 최종까지 올라가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동아일보에서 대량 해직 사태가 나며 합격이 취소됐어요. 더 이상 신입사원을 뽑을 수 없는 상태라고요. 그래서 MBC에 가게 된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도 해프닝이 있었어요. 제가 MBC 면접을 볼 때, 먼저 입사해 있던 정동영씨가 많은 도움을 줬어요. 우연의 연속은 필연인가 싶더라고요. 정동영씨와는 고등학교 동기인데 MBC에선 선후배 관계가 됐죠. 같이 사회부에서 1년 정도 있었고요.
1981년 문화방송 기자로 입사해서 외신부, 정치부, 사회부, 워싱턴 특파원, 논설위원, 보도국 부국장, MBC 뉴스데스크 앵커까지 거쳤어요. 보직만 보면 사내에서 탄탄대로를 걸었을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는 얘기가 있더라고요. 기자 시절에 어땠나요? 개혁적 마인드가 강했어요. 입만 열면 개선, 개혁, 상식을 깨고 사고방식을 바꾸자는 얘기를 했죠. 아무리 말해도 개선이 잘 안 되더라고요.
회사 측에서는 달가워하지 않았겠네요. 그래서 출세를 못했어요(웃음). 30년 넘게 MBC에 있었는데 내근이 반이었어요.
뉴스데스크 앵커 시절, 대담하고 직설적인 클로징 멘트로 ‘개념 앵커’라는 별명을 얻었어요. 결국 그 일로 앵커 자리에서 물러나고 MBC를 떠난 뒤에도 막말 왜곡 보도 건으로 소송까지 하게 됐고요. 결국 승소 판결을 받았죠. MBC와 그렇게 된 건 제 책임은 아니에요. 지금 MBC가 하는 행태는 이성을 잃은 거죠. 한때 MBC가 우리 사회에서 차지하던 롤이 있었어요. 젊은이들이 선망하는 언론사이자 직장이었는데, 이렇게 된 게 안타까울 뿐이에요.
부부는 개선해야 할 존재가 아닌 인정해야 할 존재
개선 개혁적 마인드가 강하다고 하셨는데, 부부 문제도 바로바로 개선하는 편이세요? 1983년에 결혼해 올해로 결혼 33년 차에요. 이제 개선의 문제가 아니라 인정의 문제인 것 같아요. 아내와는 중매로 만났는데, 처음에 청혼했다가 거절당했어요. 아내 말로는 제가 변죽만 울리고 뱅뱅 돌기만 해서 ‘이 남자가 생각이 없나보다’하고 정리를 했대요. 제가 연애 아이큐는 영 별로예요(웃음). 그러고 1년 뒤에 다시 프로포즈를 했어요. 1년 동안 만난 걸로 치고 결혼하자고요. 아내 입장에서는 다른 혼처를 알아보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다시 나타나 결혼하자하니 적잖이 당황했을 거예요. 어쨌든 그 후엔 속전속결이었죠.
두 번이나 프러포즈를 할 정도로 좋으셨어요? 순하고 착한 게 마음에 들었어요. 그래서 결혼했는데 요즘엔 제일 무서운 사람이 아내예요(웃음). 집에서 아내가 서열 1위, 딸이 2위, 제가 서열 3위죠. 자주 혼나요.
최근엔 무엇 때문에 혼나셨어요? 제가 빵과 과자를 좋아해요. 여의도 인근 맛있는 빵집 중 안 가본 데가 없을 정도예요. 그런데 군것질하는 게 건강에 안 좋다고 집사람이 많이 못 먹게 해요. 요즘도 카페에 가면 꼭 한마디 듣더라도 기어코 빵을 먹는 편입니다. 2012년 선거 때 하루 종일 선거운동 하고 집에 들어오면 힘 빠지고 허기지거든요. 그래서 화장실에 숨어서 몰래 과자를 먹었는데 그만 과자 봉지 처리를 잘 못해서 딸한테 딱 걸렸죠. 아내한테 이른다고 협박하는 통에 딸하고 협상해야 했어요.
빵과 과자가 사달이었군요(웃음). 자녀분들도 장성했고 이제 부부가 같이 살아가야 할 세월이 많이 남았잖아요. 어떻게 살겠다는 계획이 있으세요? 아내와는 시간이 날 때마다 같이 잘 돌아다니는 편이에요. 제 유일한 취미가 영화 보는 거라 둘이 자주 보러 다녀요. 얼마 전에도 여의도 IFC몰에 가서 봤어요. 서로 이해하고 맞춰가며 지금까지 그래온 것처럼 앞으로도 잘 지내야죠.
언론인에서 정치인으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어요. 앞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는 뭔가요? 앵커 시절 마지막 클로징 멘트 때 했던 말이 있어요. 자유, 민주, 힘에 대한 견제, 약자 배려 그리고 안전이 제가 가진 원칙이라고요. 지금도 항상 그 생각을 하고 있어요. 우린 이미 세월호 참사를 통해 우리 사회의 안전이 무너진 모습을 봤어요. 메르스 사태는 위생 안전, 이번에 발생한 국정원 해킹 팀 사건은 사이버 안전의 문제예요. 고용 안전도 말할 것 없이 시급하죠. 안전이 무너진 사회에선 누구도 행복할 수 없어요. 현재로선 무너진 안전을 바로 세울 수 있는 여러 정책적 시도가 제가 할 일이고 목표예요.
항상 모든 생각이 정책으로 이어지나요? 제가 관념적으로 말만 번지르르한 사람을 싫어해요. 문제가 있다면 누가, 언제, 어떻게, 고칠 것인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방안을 내놔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상을 품되 사고하고 행동해야죠. 개혁까지는 못해도 조금씩 개선하다 보면 언젠간 희망을 품은 내일이 올 거라고 믿어요. 그때까진 어떻게든 버티고 살아내야죠.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장태규(프리랜서) ■장소 협찬 / 카페 브리즈(02-3780-8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