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이은경의 건축학 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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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의 성역을 나누는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지났기에, 건축가라는 직업 앞에 굳이 여성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야 할까 고민스러웠다. 하지만 아직도 남성 일색인 건축계에서 그녀가 일궈낸 성취는 갈채 받아 마땅하다. ‘2015 젊은 건축가상’을 수상한 이은경 소장은 암호 같은 선과 면으로 채워진 2차원의 설계 도면을 3차원의 공간으로 창조하는 마법 같은 일을 한다.

건축가 이은경의 건축학 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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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짓는 여성 건축가
예스러운 서울 성곽이 둥그렇게 감싸고 있는 성북동. 이은경(40) 소장이 대표로 있는 이엠에이 건축사무소는 이 동네의 오래된 한옥을 개조해 만들었다. 녹슨 이음쇠가 삐거덕 소리를 내는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녀의 공간이 시야에 들어왔다. 한 평 남짓한 텃밭에는 작은 화분들이 몇 개 놓여 있었고 ㄱ자 모양으로 기다랗게 이어진 방은 안락한 정취를 풍겼다. 여기저기 놓인 설계 도면이 아니었다면, 마실 나간 할아버지가 잠깐 자리를 비운 가정집이라고 해도 믿을 곳이었다. 이 소장은 그 공간이 주는 편안한 분위기를 쏙 빼닮은 사람이었다. 건축가라는 직업을 떠올렸을 때 으레 연상되는 거친 이미지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대신 길을 걷다 마주치면 뒤를 돌아볼 만큼 빼어난 미인이었고 나직하고 차분한 목소리가 인상 깊었다.

“겉으로는 그렇게 보여도 강단 있는 성격이에요, 저(웃음). 건축가는 건물 설계부터 디자인, 인·허가와 관련된 법률적 문제 그리고 시공까지 건물을 짓는 처음과 끝을 모두 책임지는 사람이에요. 책상에 앉아서 도면을 그릴 때도 있지만 ‘하이바’를 쓰고 현장에 나가 맨몸으로 부딪혀야 하는 일도 많아요.”

세계 최고의 건축가로 손꼽히는 자하 하디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설계해 우리에게도 꽤나 익숙한 이름인 그녀와 건축계의 노벨상인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일본의 세지마 카즈요 등 여성 건축가들이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활동하는 지금이지만, 그래도 여자이기에 감내해야 하는 유리천장은 존재한다.

“건축 업계에는 여자보다 남자가 월등히 많으니까요. 현장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인부들도 남자고요. 환경이 그렇다 보니 소수의 일원으로서 느끼는 외로움이 있죠. 그래도 요즘은 많이 나아지고 있어요. 대학교 건축학과를 가보면 절반은 여학생들이에요. 여자라는 이유로 건축가로서 불이익을 받는 시대는 지나간 것 같으니 능력껏 자신의 역량을 펼치면 돼요.”

여성 건축가로서의 강점은 클라이언트와 소통할 때 빛을 발한다. 자신의 집을 짓는 일은 마치 맞춤 슈트를 제작하는 것과 같아서 끊임없이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확인하고 수정하는 과정을 거친다. 가장 사적인 공간이기에 내밀한 이야기가 오갈 때도 많다. 그럴 때 여성 특유의 섬세함으로 상대의 감정을 더 세밀하게 이해하고 공감하는 게 큰 도움이 된다.

“물론 섬세한 남자 건축가도 있고 터프한 여자 건축가도 있죠. 남자가 섬세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야말로 편견이에요(웃음). 하지만 살림을 직접 도맡아 하는 사람이 아무래도 주방 구조를 더 잘 이해할 거고, 화장을 하는 사람이 파우더룸의 로망을 이해할 거 아니에요. 그런 부분에서는 분명 강점이 있어요.”

건축가 이은경의 건축학 개론

건축가 이은경의 건축학 개론

한 번 시작하면 건물이 완성되기까지 6개월에서 길게는 1년 이상 지속되는 업무. ‘한 달 살이’를 하는 월간지 기자의 눈에는 긴 호흡으로 살아가는 건축가의 삶이 흥미롭게만 보였다.

“약간 말장난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일이 끝나도 끝나지 않은 상태가 지속돼요(웃음). 그래서 워커홀릭인 사람들이 많아요. 업무 때문에 쌓인 스트레스를 업무로 푸는 경지에 이를 정도죠. 물론 저를 포함해서요.”

그렇다고 건축가가 일한 대가에 상응하는, 엄청난 부와 대단한 사회적 권세를 얻을 수 있는 직업은 아니다. 그녀 역시 돈과 명예를 좇기보다는 새로운 건축물을 창조적으로 만들어낸다는 자부심과 그 일이 도시를 아름답게 한다는 자긍심을 원동력으로 지금껏 버텨왔다.

“매번 30평짜리 집을 똑같이 설계할 수는 없잖아요. 프로젝트가 바뀔 때마다 다른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해야 하죠. 그런 면에서 건축가는 예술적인 직업이기도 해요. 창작의 고통은 말로 다 할 수 없지만 매력적인 일인 건 분명해요.”

내 집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조언
그녀를 마주한 사람들은 각자의 꿈을 이야기한다. 누군가는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마당을, 누군가는 가족과 여유로운 식사를 할 수 있는 널찍한 주방을 원한다. “이런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어요!”라며 상기된 표정으로 말하는 사람들. 조약돌 같은 눈이 반짝이고 눈썹이 예쁜 아치를 만드는 그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어도 행복이 소리 없이 전해져온다.

“건축가를 찾는 사람들은 어떤 집에 살고 싶다는 꿈을 실현하려는 분들이세요. 굉장히 의욕적이고 삶과 가족에 대한 애정이 넘치죠. 물론 집을 지을 수 있는 돈은 한정적이지만,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리고자 하는 마음이 보기 좋아요. 그 꿈을 듣고 있으면 저까지 행복해져요.”

하지만 우리는 그런 꿈을 꾸기에는 너무 지쳐 있다. 집은 언제부턴가 주거 공간이 아닌 재산의 일부가 됐다. 세상의 풍파를 피해 잠시나마 고된 몸을 누이는 이 소중한 공간은 이제, 시세 차익을 얻을 때까지 잠시 거쳐가는 곳이 됐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는 일은 그저 노래 가사에 불과할 뿐이다.

“내 집 짓는 일을 특별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다고 오해하는 분들이 계세요. 예전에는 그랬죠. 건축가를 찾아가 집을 짓는 일은 부유한 클라이언트의 영역이었어요. 하지만 이제 서울 아파트 전셋값이면 근교에 땅 사서 집 짓는 게 가능한 시대예요. 실제로 저희 건축사무소를 찾는 클라이언트 중 젊은 부부들이 꽤 많아요. 주거에 대한 다른 생각을 갖고 삶의 질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분들은 슬슬 아파트에서 벗어나려는 추세예요.”

건축가 이은경의 건축학 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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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언트와 의견 조율을 하며 설계하는 데 4개월, 지자체의 인·허가 등 서류 작업을 끝내고 시공하는 데는 보통 6개월이 걸린다. 마음만 먹으면 1년 안에 내가 꿈꾸던 집을 지을 수 있다는 말에 가슴이 뛰었다.

“잘 생각해보세요. 당신의 궁극적인 인생 목표가 서울 시내에 아파트 한 채를 갖는 일인가요? 그것 때문에 현재를 묵시하고 사는 사람들이 무척 많아요. 가족의 꿈이 담긴 공간에서 현재를 가치 있게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요? 주위 시선이나 상황에 휘둘리지 말고 내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결단을 내리는 것도 필요한 때가 아닐까요?”

그녀가 건축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일상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다. 눈뜨고 일어나 잠들 때까지,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엄마 품처럼 아늑하기를 바라며 공간 곳곳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내가 거주하는 환경은 내 삶의 일부분이잖아요. 그러니 우리 모두는 깨끗하고 쾌적한 환경을 누릴 권리가 있어요. 으리으리하고 화려한 집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규격화된 공간에서 벗어나 나만을 위한 공간을 욕심내도 괜찮아요. 행복을 위한 욕심은, 좀 부려도 돼요(웃음).”

이 소장은 파수꾼처럼 타인의 행복과 평화를 부지런하게도 챙기는 듯 보였다. 건축이 사람의 행복에 일조해야 한다는 윤리 의식은 그녀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건축가 민현식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민현식 선생님께서 세운 건축사무소 기오헌에서 처음으로 실무를 시작했어요. 기오헌은 ‘비록 작은 집이지만 선비의 기품을 잃지 않고 한껏 오기를 부려라’라는 뜻이에요. 실제로 선생님께서 지금까지도 그렇게 살고 계시고요. 그때 건축을 대하는 윤리적인 태도나 건축가로서의 배짱을 깊이 배웠어요.”

건축가 이은경의 건축학 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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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를 위한, 협동조합형 공공주택
지난 6월 이 소장은 협동조합형 공공주택 프로젝트로 ‘2015의 젊은 건축가상’을 수상했다. 공동 주거를 통해 사라져가는 이웃 공동체를 회복시키고자 한 노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젊은 건축가상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만 45세 이하의 건축가에게 수여하는 권위 있는 상이다.

“여러 사람이 모여 사는 아파트도 공동주택의 일종이에요. 하지만 그곳에는 공동체 의식이 없어요. 이웃과의 교류가 전무하죠. 층간 소음 때문에 원수가 되는 것 보세요. 주변 사람들과 진심 어린 교류를 하는 공동주택을 통해 사라지고 있는 공동체 의식을 회복하고 싶었어요.”

그녀의 첫 번째 프로젝트인 가양동 육아 협동조합형 공공주택은 ‘공동 육아’를 실현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3세 전후의 아이를 키우는 24가구의 가족이 모여 각각 독립된 집에 살면서 1층을 공동 육아 장소로 공유한다. 육아라는 공통의 고민을 나누며 자연스럽게 이웃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도록 하는 게 프로젝트의 취지였다.

“집을 짓는 첫 단계부터 입주민이 참여했기 때문에 집에 대한 관심도 많았고 공간에 대한 이해도 높았어요. 지금 입주자들이 가장 만족해하는 부분은 믿고 아이를 맡길 수 있는 이웃이 생겼다는 점이에요. 아이들이 1층에서 놀면서 자연스럽게 친구, 언니, 오빠를 사귀며 사회성도 기를 수 있고요.”

만리동에는 예술인들을 위한 공공주택을 만들었다.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모여 살면서 공동체를 형성해 서로의 예술 활동에 시너지 효과를 내자는 의도다. 현재는 그들이 지역사회를 위해 무료 예체능 관련 교육 강좌까지 열며 동네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영화, 미술, 연극, 음향, 음악까지 겹치는 분야 없이 다채롭고 연령대도 다양해요.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만나서 만들어내는 예술적 시너지가 대단하죠. 서로 이웃 집 아이도 돌봐주고 공동 공간에서 작업도 같이하면서 지내고 계세요.”

건축가 이은경의 건축학 개론

건축가 이은경의 건축학 개론

네덜란드 유학 시절 ‘집합주택’이라 불리는 공동 주거 형태를 인상 깊게 본 그녀다. 꾸준히 관심을 갖고 연구해온 덕분에 이번 프로젝트를 완수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아름다운 프로젝트로 마무리됐지만 처음부터 모든 게 순탄했던 건 아니다. 가양동의 경우 임대주택이라는 인식 때문에 주변의 반대에 부딪혀 설계를 전면 수정하는 사건도 있었다.

“공공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여러 의견을 받아들이고 조율하는 과정이 필요했어요. 임대주택에 대한 좋지 않은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그곳에 살고 있다는 자부심이 들 만큼 건축물의 심미적인 부분에도 신경을 많이 썼어요.”

그녀가 공동 주거 문화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개인화된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풀어나갈 해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멀리 가려면 같이 가라’는 아프리카 속담을 굳게 믿어왔다. 사회는 결코 혼자 살아가는 곳이 아니다.

“조선시대 때처럼 남의 집 숟가락 개수까지 알 필요는 없겠죠. 대신 우리 시대에 어울리는 느슨한 커뮤니티가 필요한 때예요. 잘 활용하면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도 같고요.”

모두에게 공공 주거를 추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현재 삶에서 뭔가 부족함을 느끼고 타인과의 교류에 대한 필요성을 느낀다면 고민해봐도 좋을 선택지라는 뜻이다. 이 소장은 앞으로도 공동체 정신을 기반으로 한 건축에 힘을 쏟을 계획이다.

“최근에 제주도에 제가 설계한 단독주택 단지를 완공했어요. 단독주택이지만 커뮤니티가 있는 재미있는 구조예요. 앞으로도 꾸준히 공동체성을 살릴 수 있는 건축물들을 만들고 싶어요.”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얼마나 만족하냐는 질문이었던 것 같다. 달뜬 목소리로 “좋아서 하는 일이라서…”라고 하던 대답이 오랜 잔상을 남겼다. 해가 갈수록 깊이 있는 건축가가 되고 싶다던 그녀의 꿈은 머지않아 현실이 될 것이다. 자신이 만든 집에 살게 될 사람의 안녕을 바라는 그 마음이 공간을 포근히 감쌀 테니.

■글 / 서미정 기자 ■사진 / 안지영 ■의상&액세서리 협찬 / 베스티벨리·비키·아가타 파리(02-3445-6429) ■헤어&메이크업 / 황현 커팅스테이션(02-336-6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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