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옥자 교수의 끝나지 않은 길
2007년 7월 30일 오후 2시 무렵, 미국 의회 의사당. 당시 워싱턴 정신대 문제 대책위원회(이하 ‘정대위’) 회장이었던 서옥자 컬럼비아대학 교수는 떨리는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고 있었다. 의사당 내에서 의사봉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결의안 121호가 통과됐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일본군 위안부와 관련해 일본 정부에 공식적인 사과를 요청하는 결의안이 비로소 통과된 것이다.
이 기쁨의 포문을 열어준 레인 에반스 전 미국 연방 하원의원이 곁에 없다는 건 마치 생일상에 주인공이 없는 것처럼 허전한 일이었다. 일본군 위안부 관련 법안이 통과되기까지 그의 외로운 투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에반스 전 의원은 1999년 미 의회 회의록에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기록을 남긴 이후 의회가 개회할 때마다 같은 내용의 결의안을 발의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앓던 파킨슨병의 악화로 2007년 초 은퇴해 결의안이 의회에서 통과되는 영광의 순간을 함께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난해 세상을 떠났다. 서 교수는 연인이자 동료였던 그를 추모하기 위해 「그대의 목소리가 되어」(세창미디어)를 펴냈다. 자신의 삶에 대한 회고와 에반스 전 의원에 대한 기억이 담겨 있다.
그녀는 유학 생활 중 우연히 정대위에 발을 들이게 되며 에반스 전 의원을 만났다. 워싱턴 정대위는 1992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홍보, 교육하고 일본 정부의 사과를 받아내려는 목적으로 창설된 단체다. 그녀는 사무총장, 회장을 거쳐 현재 고문으로 활동 중이다.
“1992년, 학교 아파트에 들어앉아 공부만 하던 때였어요. 신문을 보니까 ‘워싱턴 정신대 문제 대책위원회’가 발족했고 한 교회에서 모인다고 하더라고요. 직접 찾아가서 먼발치에서 조용히 구경만 하고 돌아왔어요. 5년 뒤 정대위가 미국 의회에서 일본군 사진 전시회를 연다고 해서 또 가봤죠. 그곳에서 고 김학순 할머님의 증언을 들었는데, 역사적인 치욕을 알고도 침묵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일하면 대충 하는 성격이 못 돼요. 발을 다쳐서 목발 짚고 다니면서도 행사 기금을 마련하는 열정을 쏟았죠.”
비록 혼자일지라도
서 교수는 한국에 계시는 피해자 할머니들을 직접 미국으로 초청해 많은 대학교에서 세미나를 열었다. 숨어 있는 역사를 국제사회에 계속 알리면 그것이 공론화될 거라는 소신이 있었다. 또 그녀는 에반스 전 의원과 그의 횃불을 이어받은 마이크 혼다 의원과 뜻을 같이해 수년간 서명운동과 캠페인을 벌였다. 2007년 2월 미 의회에서 열렸던 청문회에서는 이용수 할머니, 김군자 할머니와 함께 증인으로 참석해 청문회 전체를 마무리하며 의원들의 질의에 응하기도 했다.
결의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매일이다시피 의원들에게 전화하고 사무실 문을 두드리며 그들을 설득하는 것이 그녀의 일과였다. 이 문제를 잘 알지 못하는 의원들은 쉽게 만나주지 않았고 반대하는 의원 사무실에서의 대우는 싸늘하다 못해 찬 서리가 내릴 지경이었다고 한다.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오면 파김치가 돼 쓰러지기 일쑤. 국내 명문대 출신에 한때 호텔리어로 승승장구했던 서 교수는 스스로 어려운 길을 걷고 있었다.
가장 힘들었던 건 부르튼 발이나 육체적인 피곤함이 아닌 인간관계였다. 캠페인의 규모가 미국 전역으로 확대되면서 언론에 자주 등장했던 그녀는 사람들에게 근거 없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비아냥거림과 협박이 가득한 이메일을 보면 밀려오는 서글픔에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고. 에반스 전 의원이 곁에 있다는 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큰 힘이 됐다.
“결의안이 통과될 때 제가 정대위 회장이어서 주목을 많이 받았어요. NHK, 후지TV 등 일본 기자들도 저를 취재했죠. 왜 나를 취재하느냐고 물으니 한국에서 막강하게 로비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래요. 그런데 사실 저를 협박하는 사람들은 일본 사람들이 아니었어요. 같은 한국 사람들이 협박을 하는데, 정말 괴로웠어요.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죠.”
에반스 전 의원의 병세가 악화되면서 그녀의 마음고생은 더 심해졌다. 이번엔 그의 가족이 말썽이었다. 그의 법정후견인이었던 가족은 서 교수의 사랑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에반스 전 의원은 가족의 뜻에 따라 그녀와 함께 살던 집에서 나와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고 그녀를 만날 수도, 통화를 할 수도 없게 됐다. 서 교수에게 ‘접근금지’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제가 그 사람과의 관계를 지속하면 변호사를 데리고 법정후견인 자리를 꿰찰 수도 있는 상황이잖아요. 그래서 가족이 전화도 다 차단하고 경찰 불러서 쫓아내고…. 저도 저대로 변호사를 고용해서 법적인 절차를 밟아가며 싸워볼걸, 하는 후회가 남기도 해요. 그런데 법정에서 싸우는 게 그 사람을 더 괴롭히는 것 같아서 하지 않았어요.”
둘은 에반스 전 의원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무려 8년 동안 만날 수 없었다. 서 교수는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가슴이 무너지듯 아팠지만, 그만큼 그의 목소리를 대신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약자들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삶의 철학을 공유했던 그때를 기억하며.
“‘레인 에반스 메모리얼 재단’을 설립해보려고 해요.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시작해보려고요. 국내에선 일본대사관 앞에서 꾸준히 수요집회를 여는데도 일본은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상황이에요. 공통분모를 찾아서 공생할 수 있는 화해의 길을 모색했으면 좋겠어요.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추구할 수 있는 방법이 많으니까요.”
인터뷰가 이어지는 동안 계속 눈에 띄었던 종이 한 장의 정체를 물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The Last Tear’의 상영회 기조연설에서 어떤 말을 해야 할까, 끼적여본 것이란다. 그러고는 멋쩍게 웃어 보인다. 그녀가 이렇게 애쓰는 이유는 단 하나, 일본 정부의 진정한 사과를 받기 위해서다. 일본 총리가 백 번 사과해도 소용없단다. 일본 국회에서 동의한 정부 입장의 공식 사과를 원한다. 피해자 할머니들의 존엄과 명예 회복을 위해. 하지만 일본 정부의 대응을 보고 있노라면 한숨만 나오는 서글픈 현실이다.
■글 / 노도현 기자 ■사진 / 안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