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 고양시장의 100만 시민 그리고 가족과 살아가는 법

최성 고양시장의 100만 시민 그리고 가족과 살아가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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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열 번째 인구 100만의 도시이자 전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의 수장, 개인 SNS 팔로워 2만5,000명을 둔 소통가. 시민들과의 약속을 위해 고양이 코스프레도 마다하지 않는 최성 고양시장은 뛰어난 행정력만큼이나 섬세한 공감력으로 시민들과 호흡하는 ‘울보 시장’이다. 지난해 시장 재선 당선 이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와 가을볕 아래 마주 앉았다. 쉬지 않고 달려온 그의 뒤에는 24년간 든든히 곁을 지켜준 부인과 언제나 그를 일깨우는 두 아이들이 있다.

최성 고양시장의 100만 시민 그리고 가족과 살아가는 법

최성 고양시장의 100만 시민 그리고 가족과 살아가는 법

최성(52) 고양시장을 만나기 위해 찾은 고양시정연수원.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주차장에 낯익은 자동차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고양시 민원콜센터 전화번호가 적힌 초록색 승용차는 5년 전 그가 처음으로 시장에 당선됐을 때부터 타오던 차다. 국회의원 시절 고급 관용차 대신 중고차를 타고 다녔던 그는 시장이 된 뒤에도 소형차로 민생 현장을 누비고 있다. 덕분에 초록색 승용차는 그가 나타났음을 알리는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집무실로 들어서자 주황색 점퍼 차림의 최 시장이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 온다. 새벽 지방 출장에서 돌아와 잠시 눈을 붙였다는데 지친 기색은 찾아볼 수가 없다. 어김없이 입고 있는 주황색 점퍼는 최 시장의 또 하나의 트레이드마크. 몇 벌 정도 가지고 있냐고 묻자, 달라는 사람이 많다며 비밀이란다. 워낙 자주 입어 가끔 정장 차림을 할 때면 주변에서 칭찬이 쇄도한다는 그의 말에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그가 소탈함과 유머를 가진 사람임을 눈치 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010년 고양시장에 당선된 뒤 지난해 재선에 성공하며 민선 6기를 순항 중인 최 시장은 눈에 띄는 이력의 소유자다. 김대중 정부 시절 청와대 행정관을 지냈고 17대 국회에서는 여당 국회의원을 역임하며 국정 운영의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이다. 대학교수, 청와대 행정관, 국회의원을 거쳐 재선 시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몸담으며 쌓은 경험과 전문성은 100만 고양시민의 살림을 살피는 데 십분 발휘되고 있다. 하지만 그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는 민생을 향한 예민한 귀와 가슴 속 깊이 공감하는 감수성이다.

고양시장으로 지낸 지난 5년은 그의 인생에 잊지 못할 많은 사건이 일어났던 시간이었다. 세월호와 고양종합터미널 화재 사고가 연이어 터졌고 깊은 슬픔 속에서 재선에 당선됐다. 재임 기간 중 고양시가 대한민국에서 열 번째로 인구 100만의 도시에 오르는 기쁨이 있었는가 하면, 인생의 나침반이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아픔도 있었다. ‘울보 시장’이란 별명은 괜히 붙은 것이 아니었다. 시민들의 삶의 무게와 굴곡을 마주할 때마다 어김없이 눈물이 터져 나왔다. 다사다난했던 지난 5년 그리고 가족을 떠올리는 그의 얼굴에는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이 어려 있었다. 이제까지의 인터뷰 중 가장 진솔한 인터뷰가 될 것이라 약속한 그의 입에서 제일 먼저 나온 단어는 ‘아내’였다.

24년을 함께한 부부의 역사
거의 매일 같은 옷을 입으니 아침에 뭘 입을까, 고민하는 일은 없으시겠어요.
제가 워낙 옷을 험하게 입어요. 새 옷을 입고 나가도 금방 해지는데 점퍼는 그런 면에서 편하죠. 어쩌다 정장을 입으면 “최 시장, 오늘 멋진데?” 하며 칭찬이 쇄도해요. 저보단 아내가 고민이 많죠.

집에선 챙겨주는 부분이 덜하니 편할 것 같은데요. 아내는 원래 잘 챙겨주는 스타일이에요. 제가 청와대 시절부터 국회의원, 시장까지 20여 년 동안 공직 생활을 하다 보니 아내가 너무 고생하더라고요. 국회에 있을 때는 아침에 7시쯤 나갔는데, 그 전부터 일어나 아침상 차리고 입고 나갈 옷 준비해야 하니 무척 힘든 거예요. 일절 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게 공직자 아내에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것도 쉽지가 않은 게, 전날 밤에 다음날 입을 옷을 미리 밖에 내놓고 아침에 조용히 일어나 살금살금 나가는데, 깜깜하니 이것저것 발에 걸려 우당탕탕 소리가 난단 말이에요. 아내는 일어나려 하고 저는 더 자라고 하고, 아침마다 실랑이가 벌어지는 거죠.

공직자의 부인으로 사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저야 행색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스타일이니 상관없는데, 아내에게 화살이 가요. 남편은 하지 말라고 하고, 밖에서는 얘기가 들리고. 아내가 한동안 딜레마였어요. 요즘엔 제가 워낙 그렇다는 걸 다들 아시다 보니 많이 나아졌죠. 아내는 제가 30대 중반의 나이에 청와대에 들어간 이후 국회의원을 거쳐 재선 시장에 이르기까지, 15년을 정치인의 아내로 살았어요. 네 번의 큰 선거를 치르고, 피 말리는 경선과 대선까지 합하면 10여 차례가 넘어요. 그동안 흔들리지 않는 모습으로 아이들의 엄마로서, 시장의 아내로서 끌어안고 사는 모습이 고마울 뿐이죠.

얼마 전 결혼 24주년이셨죠. 어떻게 보내셨어요? 마침 호수공원에서 헤어쇼가 열려서 왕과 왕비 복장으로 함께 출연했어요. 작년에 참여했을 땐 좋아했는데 올해는 별로 안 좋아하더라고요. 생각은 많이 하는데 항상 급하게, 어설프게 하다 보니 실패할 때가 많아요(웃음).

그래도 잊지 않고 챙기셨네요. 부인을 위한 이벤트를 자주 하시나요? 제 나름대로는 여러 가지 시도를 해요. 제가 365일 중에 360일 가까이 일에 매달려 있다 보니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이 늘 부족해요. 아이들에게는 사춘기가 있었고 아내에게도 지극히 외롭고 힘든 시간이 있을 수 있잖아요. 그때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충실하게 함께해줄 수 없는 경우가 많아 늘 미안한 마음이죠. 시간이 날 때마다 뭔가를 같이하고 즐겁게 해주려고 노력하는데 마음처럼 쉽지가 않아요. 얼마 전엔 아내에게 꽃을 선물했는데 “내가 좋아하는 꽃이 뭔 줄 알아?”라고 묻더라고요. 그게 중요한 건데, 제가 그걸 몰라서 한참을 혼났어요(웃음).

24년 동안 우여곡절을 함께 겪었는데, 부인에게 고마웠던 순간이 많았을 것 같아요. 200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했을 때가 저희 가족에겐 참 힘든 시간이었어요. 한 달에 100만원 벌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두 아이는 한창 커가고, 불과 몇 달 전까지 국회의원이었던 사람을 데리고 일을 부릴 사람도 없었고요. 저는 작은 출판사를 하나 차리고 아내는 냉면집을 열었어요. 10평도 안 되는 작은 가게에서 고생을 많이 했죠. 힘든 상황에서 흔들리고 저를 원망했을 법도 한데 아내는 미동도 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저를 격려해줬죠. 아내는 제가 성공했을 때보다 시련을 겪을 때 더욱 강해지는 사람이에요. 얼마 전 아내에게 언제 가장 행복했냐고 물으니 제가 박사논문 쓸 때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제가 한 달에 30만원 벌었거든요. 작은 연립주택에서 같이 아이 기저귀 갈고 목욕시키고 했던 때가 가장 행복했대요. 청와대 요직에 있거나 시장 재선에 성공했을 때보다 그때가 더 좋았다고요. 이 사람만 옆에 있다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요.

얼마 전 세계부부의 날 추진위원회가 수여하는 ‘특별 시장 부부상’을 수상하셨어요. 이번이 두 번째 수상인데 소감이 어떠신가요? 쑥스러워요. 상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아내도 이번에는 싫지 않은 표정이더라고요. 저보다는 아내에게 고마운 마음을 대신 전해준 것 같아 기분이 좋았어요.

최성 고양시장의 100만 시민 그리고 가족과 살아가는 법

최성 고양시장의 100만 시민 그리고 가족과 살아가는 법

열정과 가르침 남기고 가신 아버지
지난 5년 동안 많은 일이 있었죠. 세월호와 고양종합터미널 화재 사고가 있었고 그 와중에 재선에 성공하셨고요.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일까요?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것이 개인적으로는 가장 큰 사건이었어요. 고양종합터미널 화재 사고 발생 이틀 뒤에 돌아가셨는데 말기 암 투병 중임에도 당시 화재 사고를 보며 저보다 더 노심초사하셨어요. 장례식이 끝나고 아버지께서 저에게 남기신 메모를 봤는데, 너무나도 힘겹게 쓴 삐뚤빼뚤한 글씨체로 ‘꼭 당선을 빈다-아버지’라고 적혀 있더라고요.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이 나요.

재선 당선 열흘 전에 돌아가셨다고요. 그래서 더욱 가슴이 아팠겠어요. 「울보 시장」 출판기념회 때 아버지께서 꼭 축사를 하고 싶어 하셨는데, 당시 치매를 앓고 계셨던 터라 공식적인 자리에 모실 수가 없었어요. 혹시라도 저에 대한 칭찬이 과해지면 선거법 위반으로 비화될 수 있는 상황을 염려했던 거죠. 시장에 당선되면 그때는 아버지의 축사를 제일 먼저 듣겠다고 약속했는데 이제 영영 듣지 못하게 됐어요. 돌아가실 당시에도 자식의 힘든 상황을 안고 가신지라 여러모로 가슴이 아파요. 대신 아버지의 축사를 항상 기억하겠다고 다짐했어요.

아버지께서 중요한 것을 남기고 가셨군요. 제가 82학번인데 대학 졸업 이후 하루도 쉬어본 적이 없어요. 대학에서 학생들 가르치고 연구실에서 연구하고 시민운동 하고 청와대 가고 국회 가고 시장이 됐어요. 이게 어디서 온 걸까 생각해보니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게 아닌가 싶더라고요.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열정 가득한 교육자셨어요. 가정형편이 어려워 검정고시를 보고 평교사로 시작해 교장선생님으로 은퇴하셨어요. 퇴직 후에도 끊임없이 젊은이들과 교류하고 학문을 놓지 않으셨고요. 87세로 돌아가셨는데 85세까지 집에 외국인 친구를 데려가면 영어로 신나게 이야기하곤 하셨어요. 저와도 항상 정책적으로 철학적으로 깊은 토론을 나누셨죠. 아버지의 그런 열정이 저에게도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어린 시절 아버지와 각별하셨나 봐요. 그게 참 재밌는 대목이에요. 아버지는 밖으로는 무골호인이셨어요.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집에 있는 걸 다 갖다 주셨어요. 비전향 장기수분들을 데려와 보살펴주고 그분들에게 일자리도 마련해주셨고요. 하지만 집에서는 누구보다 엄격한 교육자셨어요. 그래서 나중에 내 자식들에게는 자상한 아빠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항상 해왔죠.

그렇게 지내고 계신가요? 저는 친구처럼 지낸다고 생각하는데 아이들 눈에는 어떨지 모르겠어요. 자상한 아빠보다는 바쁜 아빠라고 생각하겠죠. 작년 겨울에 모처럼 아이들과 집에서 TV를 보고 있는데 창밖에 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라고요. 제설 작업이 걱정돼서 나갈 채비를 하는데, 아이들이 농담 섞인 말투로 “아빠, 시민들은 좋으시겠어요. 아빠처럼 바쁘게 뛰어다니는 시장이 있어서. 근데 그거 아세요? 우리도 고양시민이예요”라고 하더라고요.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면 인터넷에 다 올릴 거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들었어요(웃음). 저는 노력하고 있는데, 이게 참 고민이에요.

최근에는 아이들과 어떤 주제로 대화를 나누세요? 대학생 딸아이에게 요즘 마음에 드는 남자친구가 있는지 물어보는데, 통 얘기를 안 해요. 딸이 저를 닮았다면 걱정이거든요. 저는 연애에는 소질이 없었으니까(웃음). 얼마 전엔 밤늦게 들어왔는데, 남자친구를 만난 것 같진 않더라고요. 아버지로서 딸이 걱정돼서 “여자가~”로 시작하는 말을 꺼냈다가 딸에게 왕창 깨졌죠. 성차별적인 발언이라고요.

여권 신장과 양성평등에 앞장서오신 분 아닌가요?(웃음) 주부 일자리 창출에도 남다른 관심을 가져오셨고요. 제 첫 직장이 양성평등 기관이었던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었어요. 그때부터 여성 인권 향상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 회복에서 시작된다고 믿어왔어요. 국회의원 시절에 한 동료 의원이 저에게 “최 의원, 왜 그렇게 여성 문제에 집착해? 그렇게 공처가인 줄 몰랐어”라고 농담을 하는데, 농담인 줄 알면서도 씁쓸하더라고요. 주부의 일자리 창출은 아내와 딸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인데 말이죠. 지난해 고양시가 ‘여성친화도시’로 지정된 이후 여성창업지원센터나 ‘아이러브맘 카페’ 같은 육아놀이 공간도 운영하고 있어요.

가정에서는 양성평등을 어느 정도 실천하고 계신가요? 일단 아내가 먼저 말하기 전에 집을 공동 명의로 등기를 했고요(웃음). 명절 인사나 용돈도 본가와 처가에 똑같이 해요. 가끔 고부간에 긴장감이 조성될 때면 전적으로 아내 편을 들고요. 어머니께서는 가끔 서운해하시지만 부부간의 균형을 위해 그러는 게 맞는 것 같더라고요. 신혼 초에 아내에게 한 말이 있어요. 앞으로 우리의 부부 생활이 어느 한 사람의 완승이 되면 안 된다고요. 부부가 가야 할 길은 궁극적으로 가치 있는 목표를 가지고 함께 발전해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만약 딸이 결혼할 남자를 데려왔는데 시장님과 똑같은 남자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충격적인 질문인데요(웃음). 외국인을 사윗감으로 데려오는 상상은 해봤는데 제 판박이를 데려올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일단, 그런 사람이 없을걸요(웃음). 저는 그래도 일을 하면서 가족의 행복과 아이들 교육의 끈을 어떻게든 잡고 있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그런 사람이라면 대찬성이지만, 일만 하고 가정에 대한 사랑과 열정, 낭만이 없다면 반대예요. 제가 무작정 반대할 순 없으니 일단 술 한잔하면서 남자친구의 실체가 드러나게 한 뒤 딸아이가 판단하게 해야죠.

나를 버티게 한 힘, 가족
두 대학생 자녀를 둔 아버지로서 요즘 청년들의 취업난을 가까이 느낄 것 같아요. 자녀들의 진로에는 얼마나 관여하는 편인가요? 두 아이 모두 요즘 진로를 고민하고 있는 시기라 누구보다 피부로 느끼고 있어요. 아버지로서 여러 가지 생각이 많지만 강요하지는 않으려고 해요. 저희 아버지 역시 저에게 뭐가 되라고 강요하지 않으셨거든요.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본보기는 부모가 삶을 통해 보여주는 현실성 있는 모습이라고 봐요. 책을 100권 사주는 것보다 책 읽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좋고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라고 말하기 전에 부모가 먼저 다른 사람에 대한 비난과 불신을 멈춰야 해요. 아이들에게 아빠가 열심히 열정적으로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언젠가 아이들도 자신 안의 열정을 찾을 거라 믿어요.

자녀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강조하는 것이 있나요? 공동체의식에 대해 자주 얘기해요. 나와 나의 가족을 넘어 나와 친구, 나와 공동체, 나와 분단된 조국, 나와 난민, 나와 저 멀리 아프리카의 기아들까지, 공동체적인 연대감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우리 아이들뿐 아니라 모든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에요.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보며 눈물 흘릴 수 있고 내가 가진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아야 방종하지 않고 책임감 있는 인격체가 될 수 있어요.

시장님께 가족은 어떤 존재인가요? 제가 쓰러지지 않게 해주는 버팀목이자 저에게 가장 냉정한 조언자들이에요. 제가 승리와 성공에 도취돼 있을 때도 아내는 항상 쓴소리를 했어요. 지금도 제가 조금이라도 우쭐해하는 모습을 보이면 비수를 날려요. 시민들이 모두 당신을 좋아한다고 착각하지 말라고요. 진짜 불만은 다른 곳에서 나올 거라고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참 고마워요.

“언젠가 오롯이 가족만을 위한 가장이 되고 싶다”라고 말씀하신 걸 들었어요. 언제쯤 그날이 올까요? 글쎄요. 지금까지의 행보를 보면 그날이 과연 올까 싶네요(웃음). 제가 제 묘비명을 써놓았는데 ‘죽는 그 순간까지 사회에 열정을 바쳤으나 단 한순간도 아내에 대한 사랑, 자식에 대한 책임, 고마움과 미안함을 잊지 않고 마지막까지 노력하고 가다’예요. 단순히 ‘노력했다’가 아니라 ‘몸부림쳤다’라는 말을 듣고 싶어요. 제가 비록 일은 이렇게 하고 있지만 마음은 한시도 우리 가족과 어머니 그리고 청각장애인인 누나에게서 떠나본 적이 없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네요.

몸부림치는 가장 그리고 100만 시민의 시장으로 어깨가 더 무거워졌어요. 앞으로는 울 일이 좀 줄어들까요? 이제 ‘울보 시장’ 플러스알파가 돼야죠. 앞으로 100만 고양시민을 위한 행복 공약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가는 데 박차를 가할 계획이에요. 시민들 그리고 우리 가족들이 더 많이 웃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죠. 열심히 몸부림쳐볼 생각입니다.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장태규(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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