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노, 카메라를 들다! 사진가 박귀섭

발레리노, 카메라를 들다! 사진가 박귀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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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리노 출신 사진가 박귀섭은 특이한 이력만큼이나 독특한 작품 세계를 선보인다. 무용수의 몸을 가장 잘 아는 사진가. 그의 렌즈 속에 담긴 실루엣은 춤을 추듯 강렬하고 매혹적이다.

발레리노, 카메라를 들다! 사진가 박귀섭

발레리노, 카메라를 들다! 사진가 박귀섭

뿌 리부터 뻗어나간 기둥과 가지가 마치 살아 움직이듯 넘실거린다. 언뜻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의 바오밥나무 같기도 하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 ‘메두사’의 머리 같기도 하다. 사람의 몸이 뒤엉켜 만들어낸 나무 이미지는 인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로 가득하다. 「잭과 콩나무」의 나무줄기처럼 금방이라도 하늘을 뚫을 듯 뻗어나갈 기세다.

국립발레단의 무용수 10명이 몸을 포개고 팔다리를 비틀어 형상화한 이 작품은 사진작가 박귀섭(32)의 ‘쉐도우’ 시리즈 중 2번 작품이다. “제목 안에 작품을 가두고 싶지 않다”라며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는데, 사람의 몸이 만들어낸 이미지는 그 자체만으로도 또렷하게 시선을 붙잡는다. 이 작품은 얼마 전 세계적인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나무」의 러시아판 표지로 쓰였다. 책을 받아보고 나서야 작가가 그인 것을 알았다는 박 작가의 말에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올봄 러시아의 출판사로부터 제 작품을 책의 표지로 쓰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프랑스 판타지 소설가의 작품이라고만 들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베르나르 베르베르더라고요.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우연히 제 사진을 봤대요. 마침 러시아에서 소설이 나올 예정이었는데, 제 사진을 표지로 하고 싶다고 했다더군요. 아내가 굉장한 팬이거든요. 깜짝 놀랐죠.”

비슷한 시기 미국의 음반사 소니와도 계약을 마쳤다. 얼마 전 발매된 뉴욕의 R&B 가수 ‘LYFE’의 앨범 표지로 우연찮게 미국 진출까지 한 상태다.

세계 곳곳의 러브콜을 받으며 주목받고 있는 사진작가 박귀섭은 사진을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무용을 전공하고 국립발레단 솔리스트로 활약했던 발레리노. 2007년 뉴욕 인터내셔널 발레 대회에서 동상을 수상했을 만큼 실력도 뛰어났다. 지금도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그의 이름을 검색하면 무대를 누비는 발레리노 박귀섭을 볼 수 있다. 고등학교 이후 10년 넘게 발레는 그의 삶 그 자체였다.

발레리노, 카메라를 들다! 사진가 박귀섭

발레리노, 카메라를 들다! 사진가 박귀섭

“중학교 때까지 미술을 하다가 학교 무용 선생님의 권유로 무용을 하게 됐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남자아이들 중에 무용을 하는 아이가 드물었는데 미술보다 더 신나 보이더라고요. 친구들의 놀림을 받으면서도 마냥 좋았어요. 자연스럽게 무용수의 길을 걷게 됐죠.”

전남 목포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 속에서 자란 그에게 무용수의 길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발레를 업으로 삼겠다는 아들의 말에 1년 넘게 얼굴을 보지 않을 정도로 크게 반대하셨던 아버지는 그가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에 입학하고 난 뒤에야 무용수 아들을 받아들이셨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졸업 후 국립발레단에 입단하자마자 ‘카르멘’의 솔리스트로 지목되는 등 발레리노로 승승장구하던 그가 불현듯 사진작가로 변신한 건 2010년의 일이었다.

사진 속에 응축시킨 몸의 에너지
“춤을 추면서도 내가 무언가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열망이 컸어요. 패션에 관심이 많아 사업에 눈을 돌리기도 했고요. 발레단에 소속된 발레리노로서 할 수 있는 일과 무대 밖에서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고민이 많았죠.”

고민의 답은 우연한 기회에 찾아왔다. 그가 블로그에 올려놓은 사진을 본 일본의 한 패션 회사에서 같이 일해보자는 제의를 해온 것. 단순히 좋아서 취미 삼아 찍던 사진으로 다른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안 순간 새로운 길이 열리는 듯했다.

발레리노, 카메라를 들다! 사진가 박귀섭

발레리노, 카메라를 들다! 사진가 박귀섭

“제의를 받고 일본으로 가느냐 마느냐를 고민하며 사진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됐어요. 사진으로 다시 새롭게 나다운 걸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한 뒤 최태지 단장님께 발레단을 그만두겠다고 말씀드렸죠. 많이 혼났어요. 그동안 해온 게 아깝지 않느냐고요. 그럼에도 하루라도 빨리 사진을 찍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발레단을 그만뒀다는 사실에 고향에 계신 아버지가 대로하셨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목포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 안에선 서럽게 울며 다짐했단다. 반드시 성공하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한 다짐이 무색하리만큼 처음 발을 들여놓은 사진의 세계는 낯설기만 했다.

“사진 쪽으로는 연고나 인맥이 전혀 없었어요.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포트폴리오를 보고 먼저 연락을 해온 광고주도 제 이력을 보고 고개를 젓기 일쑤였어요. 제가 생각해도 전문적으로 사진을 찍어본 경력도 없는 사람에게 뭘 믿고 일을 맡기겠나 싶더라고요.”

발레리노, 카메라를 들다! 사진가 박귀섭

발레리노, 카메라를 들다! 사진가 박귀섭

‘쉐도우’ 연작 시리즈.

‘쉐도우’ 연작 시리즈.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스스로 한 결정이었기에 부담감이 더 컸다고. 다른 사람에게 기대지 않고 스스로 해내겠다는 생각이 강해질수록 이를 악물고 작업에 매달렸다. 그 와중에 무용은 그가 가장 잘 알고 잘 표현해낼 수 있는 분야였다.

“사진에 매혹된 가장 큰 이유가 제 머릿속의 상상을 이미지화할 수 있다는 점이었어요. 사람의 몸만큼 정교하고 많은 텍스트를 담고 있는 것이 없거든요. 무용수로 살아봤기 때문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자연스럽게 몸으로 연결시켰던 것 같아요.”

국립발레단 동료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몇 날 며칠을 씨름해 탄생시킨 작품이 무용수들의 움직임을 사진으로 담아낸 ‘쉐도우 시리즈’다. 끝없이 뻗어나가는 뿌리, 악보 속의 음표, 검은 바다를 연상하게 하는 이미지는 모두 무용수들의 몸으로 표현해낸 것들이다. 자세하게 들여다보기 전까진 사람의 실루엣으로 만들어낸 형상이란 것을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독특한 이미지, 그야말로 발레와 사진이 만나 이루는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사람이 언제 어떻게 움직일 때 가장 아름다운지 제때 포착해내는 것이 저의 장점이에요. 타이밍을 아니까요. 보통 무용수들이 10번 점프해야 나올 컷이 두세 번만에 나오거든요. 사진작가로서 피사체를 잘 안다는 건 행운이죠.”

발레는 끊임없이 몸을 움직여야 하는 예술이다. 정지된 순간에 담아낸 이미지에는 무대에서 보는 그것과는 또 다른 에너지가 응축돼 있다. 그의 작품들이 살아 숨 쉬는 듯 생생한 기운을 뿜어내는 것은 그 때문이리라.

처음 작품을 찍을 땐 얼굴도 제대로 나오지 않은 사진 때문에 고생하며 참여해준 발레단 동료들에게 몹시 미안한 마음이었다. 요즘 작품이 여기저기 소문이 나며 주목받기 시작한 이후 마음의 부담을 좀 덜었단다. 완성된 작품을 보고 좋아하는 모습을 볼 때면 고생한 것이 잊힐 정도라고. 예술 작업에 참여하게 돼서 좋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고마울 뿐이다.

“혼자 하는 것보다 여러 명이 함께 팀을 이뤄서 하는 작업이 재밌어요. 서로 의견을 교환하고 퍼즐 맞추듯 만들어가는 그 과정이 무척 즐겁고 행복해요. 발레 역시 여러 무용수들이 만들어내잖아요. 그와는 또 다른 희열이 있어요.”

발레리노, 카메라를 들다! 사진가 박귀섭

발레리노, 카메라를 들다! 사진가 박귀섭

사진과 영상, 퍼포먼스를 아우르는 멀티 아트
그는 얼마 전 새로운 작업을 마쳤다. 바로 보건복지부의 금연 광고 캠페인이다. 그가 총괄 안무를 맡은 이 프로젝트에는 26명의 국립발레단 무용수들이 참여해 담배를 피우는 순간 뇌와 폐가 받는 고통을 발레로 표현했다. 담배 연기가 몸속으로 들어올 때마다 느껴지는 괴로움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무용수들의 몸짓은 쉬 잔상이 가시지 않을 정도로 인상적이다. 모든 사진작품의 영상화 작업을 계획하고 있는 그에게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안무와 영상 작업을 함께한다는 점에서 굉장히 즐거웠어요. ‘쉐도우 시리즈’도 영상화할 계획이 있거든요.”

그의 꿈은 사진과 영상, 퍼포먼스까지 아우르는 멀티 아트를 구현하는 것이다. 댄서만 있다면 세계 어느 곳에서든 작품 세계를 펼쳐 보일 생각이다. 특정 개념에 갇히거나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들을 만들어가고 싶다. ‘작가’라는 호칭이 어색하다며 머쓱하게 웃는 그에게서 순수한 열정이 느껴졌다.

“필살기는 무용수 사진이지만 딱히 정해진 건 없어요. 아직도 하고 싶은 게 무척이나 많아요. 사진, 영상, 연출도 하고 싶어요. 제 상상 속의 이미지를 밖으로 표출시킬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도전해볼 계획이에요.”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이민희(프리랜서) ■사진 제공 / BA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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