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뜻 이어 장학재단 만든 고 이수현씨 부친 이성대씨

스타 나눔 캠페인

아들의 뜻 이어 장학재단 만든 고 이수현씨 부친 이성대씨

유학생 신분으로 일본에서 생활하던 중 전철역 선로에 떨어진 일본인 취객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은 이수현씨. 그는 여전히 작은 영웅으로 일본인들의 가슴 속에 남아 있었다. 고 이수현씨의 아버지 이성대씨는 사고 직후부터 현재까지 매년 아들과 같이 일본 유학을 온 아시아 각국의 젊은이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 의로운 부자 이야기다.

[스타 나눔 캠페인]아들의 뜻 이어 장학재단 만든 고 이수현씨 부친 이성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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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월 26일 오후 7시, 일본 도쿄 코리아타운이 형성된 신오쿠보 전철역에서 한 취객이 비틀거리다 선로에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가기 위해 전철을 기다리던 이수현씨는 이를 목격하고 그를 구조하기 위해 선로에 뛰어들었다. 앞뒤 생각할 겨를도 없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진입하던 열차를 피하지 못하고 취객과 함께 사망하고 말았다. 음악과 스포츠를 좋아했고, 일본에서 무역학을 배우고 싶었던 한국의 평범한 대학생 이수현씨는 그렇게 의로운 죽음을 맞이했다.

개인주의가 팽배했던 일본 사회는 한 외국인 젊은이의 행동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수현씨가 보여준 살신성인의 정신은 그 사회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모든 언론이 그의 의로운 행동에 대해 대서특필하고 전국적으로 추모의 물결이 일었다. 2008년에는 ‘너를 잊지 않을 거야’라는 그의 전기적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일본 각지에서 성금의 손길이 이어졌고, 이수현씨의 아버지 이성대씨(78)는 그 성금으로 아들의 이름을 딴 LSH 아시아장학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아들 또래의 외국인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매년 건넸다.

사고 후 14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네, 그러네요. 정확히 14년 8개월이 흘렀어요. 세월은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흐르네요. 그래도 수현이 살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까지도 수현이를 참배하러 오시는 일본분들이 많이 계시니까요.

일본인들이 부산까지 일부러 찾아오는 건 대단하네요. 슬쩍 다녀가시는 분들도 있어요. 나중에 묘지에 가보면 꽃다발이 놓인 걸로 알죠. 또 며칠에 오겠다고 연락을 주시는 분들도 계세요. 오는 9월 23일에도 일본에서 오겠다는 분들이 전화를 주셨어요. 그러면 저희가 묘지까지 안내해드리지요.

그것도 굉장히 신경 써야 할 일인 것 같은데요? 긴장을 놓을 수가 없죠. 저희 부부는 여행도 쉽게 못 가요. 멀리서 오셨는데 저희라도 얼굴을 보여드리지 못하면 미안하잖아요. 그저 수현이를 잊지 않고 찾아주셔서 감사할 뿐이죠. 구마모토 현 곤고지(金剛寺) 명예주지로 계시는 아카보시 젠코 스님은 매년 오셔서 수현이를 위해 기도해주십니다. 태평양전쟁 당시 억울하게 희생된 한국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매년 제를 지내시는 친한파 스님이시죠. 연세가 많고 건강이 좋지 않다기에 올해는 안 오시려나 했는데, 대신 아들을 보내겠다고 하시더군요.

장학금 수여식에 참석한 이수현씨의 어머니 신윤찬씨.

아드님을 보러 자주 가시나요? 한 달에 서너 번은 갑니다. 부산 시립 영락공원묘지는 개인 관리가 따로 필요 없지만 아들 묘지는 저희 부부가 관리해요. 누가 다녀가셨나 정리가 필요해서 틈이 나면 갑니다. 우리가 자주 손을 보니 수현이가 있는 곳은 늘 깨끗하죠. 벌초할 필요가 없어서 묘지 관계자분들도 따로 손을 대지 않으세요.

왜 이렇게 일본인들이 수현씨를 잊지 못한다고 생각하시나요? 한국과 일본은 역사적으로 악연이 많은 사이지요. 과거 일본인들은 한국 사람들이 자신들을 무척이나 싫어할 거라고 생각했대요. 그런 상황에서 수현이가 일본인을 구하려고 뛰어들었고 희생됐잖아요. 정작 일본인은 하지 못한 일을 한국 청년이 했다는 점에서 큰 충격과 감동을 받은 것 같아요. 그 일 이후 2002년 월드컵도 한국과 일본이 공동 개최를 했고, 또 마침 NHK에서 ‘겨울연가’가 대히트를 치면서 한국에 대한, 한국인에 대한 인식이 점점 바뀌었고 그 계기가 된 수현이를 잊지 못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러고 보니 한일 관계가 가장 좋았던 시절이었네요? 맞습니다. 지금은 아베 정권의 우익 정책을 보면서 많이 안타깝죠. 가까워졌던 한국과의 사이가 또 멀어지니 말이죠.

서랍 속에 넣어둔 일본 훈장
이성대씨 부부는 매년 1월과 10월에 일본을 방문한다. 1월에는 ‘고 이수현을 그리워하는 모임’에 참석하고, 10월에는 아들이 다니던 아카몽카이 일본어학교를 방문해 LSH 아시아장학회의 장학금을 학생들에게 수여하기 위해서다. 올해는 좋은 일도 있었다. 이성대씨가 일본 정부로부터 ‘욱일쌍광장’이라는 훈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일본과의 관계 개선이나 문화 교류에 힘쓴 외국인에게 주는 훈장이다. 아들의 의로운 죽음 이후 장학금 전달 등 한일 친선에 기여한 그의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추모식에 가면 어떤 기분이 드시나요? 한결같이 와주시는 분들에게 고마울 따름이에요. 그들의 따뜻한 환대에 오히려 저희 부부가 힘을 받고 와요. 아들을 잃고 세상을 다 잃어버린 기분이었지만 아마 그들 덕분에 지금까지 잘 참고 살아오지 않았나 싶어요.

장학금은 어떻게 주시게 됐나요? 그저 부끄러워요. 사비로 하는 것도 아닌데 공은 저희가 다 받는 거 같아서 말이죠. 아들을 떠나보내고 나니 일본 각지에서 성금이 들어왔어요. 일본은 우리나라처럼 언론사나 공공기관이 성금을 모금하는 시스템이 없다고 해요. 따로 모금을 한 적도 없는데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성금을 보내신 거죠. 그 성금을 받고 나니 아버지로서 아들이 공부를 못다 하고 세상을 떠난 것이 한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수현이가 다니던 일본어학교 이사장님께 성금을 맡기고 매년 외국인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죠.

13년이나 지속하셨다는 것이 대단하네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희가 대단한 것은 아니고요. 여전히 LSH 아시아장학회에 성금을 보내고 계시는 분들과 아카몽카이 이사장님이 대단하신 거죠. 이사장님은 “수현이는 잊혀져서는 안 될 우리의 자랑스러운 학생”이라며 장학회를 위해 애쓰고 계세요. 덕분에 지금까지 18개국 693명의 유학생에게 장학금을 전달했어요.

이미 떠나버린 누군가를 위해 꾸준히 기부를 한다는 것은 인정할 만한 일이네요. 지금까지도 성금을 보내시는 분들이 있다는 데 대해 저도 많이 놀랐어요. 일본은 기부문화가 생활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아 보여요. 소시민들이 주머니 사정에 맞게 성심성의껏 보내주시는 거죠. 그게 모여서 장학재단이 운영된다는 사실이 참 감동적이에요.

[스타 나눔 캠페인]아들의 뜻 이어 장학재단 만든 고 이수현씨 부친 이성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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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께서도 개인적으로는 동일본 대지진 때 1,000만원의 성금을 내시기도 했잖아요? 매년 힘을 얻고 있는데 작은 돈이나마 보태고 싶었어요. 저희에게 주시는 힘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액수지요.

그런 공로를 인정받아서 일본 정부로부터 훈장도 받으셨고요. 장학회 유지를 위해 노력한 분들은 따로 있는데 명예회장이라는 이유로 제가 받은 것일 뿐이에요. 수현이 방에 그동안 아들이 받은 상장이나 공로상을 진열해놓았는데, 제 이름이 새겨진 훈장은 그 옆에 걸어놓기가 민망하더라고요. 그냥 잘 말아서 책상 서랍에 넣어뒀어요.

가슴 속에 영원히 묻은 아들
26세의 나이로 멈춰버린 아들의 모습. 그래서 더 애틋하다. 공부도 잘하고 무슨 일이든 척척 알아서 해서 걱정해본 적이 없는 아들이었다. 먼저 떠난 자식을 가슴에 묻고도 부부가 절망과 미련 없이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아들을 그리워해주고 기억해주는 많은 사람들의 위로 덕분이었다.

늦은 질문일 수 있겠지만 듣고 싶어요. 이수현씨는 어떤 아들이었나요? 착했어요. 공부도 잘하고 농구, 수영, 태권도 등 여러 가지 운동도 즐겼지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나 관심 가는 분야에는 푹 빠져 지내곤 했어요. 생각이 어른스러워서 친구들에게는 ‘영감’이라고 불리곤 했지요. 고집도 세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꼭 하고야 마는 성격이었고요.

1 부산 시립 영락공원묘지에 안치된 고 이수현씨의 추모비와 묘지. 2 고 이수현 추모식에 바쳐진 수많은 꽃다발들. 3 ‘고 이수현을 그리워하는 모임’ 기념사진. 4 영화 ‘너를 잊지 않을 거야’의 특별 시사회 현장.

일본 유학은 어떻게 가게 된 건가요? 대학 4학년 1학기 때 수현이가 집으로 전화를 한 거예요. 일본으로 유학을 가고 싶다고 말이죠. 당시는 대부분 영어권으로 유학을 가는 추세라 무슨 소리냐고 했어요. 수현이가 무역학을 전공했는데 ‘지역 연구’라는 과목을 통해 일본에 대해 배웠고, 또 관심이 간다는 거예요. 허락을 할 수 밖에 없었죠. 워낙 성실한 아이라 어딜 가든 좋은 경험을 할 거라 생각했어요.

일본 유학을 못 가게 할걸, 하고 후회하진 않으셨나요?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우리 집안이 일본과 연이 있나?’라는 생각을 종종 해요. 수현이의 증조할아버지가 일본에 건너가서 사업을 하시기도 했고, 또 저희 아버지도 젊은 시절에 일본에 가서 만년필을 만드는 기술을 배워오셨거든요. 그래서 저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고 광복되기 바로 직전에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이런 사실들을 수현이가 모를 텐데 스스로 일본에 가겠다고 했던 걸 보면 좀 묘한 생각이 들기도 해요.

혹시 다른 자녀분도 계신가요? 수현이 여동생이 하나 있어요. 시집가서 해운대 근처에서 저희 부부와 이웃으로 살고 있죠. 손자와 손녀도 태어났고요. 손주들 재롱 떠는 거 보느라 정신이 없어요(웃음).

그런 모습 보면 또 아드님 생각이 나시겠어요? 그럼요. 평생 그렇게 가는 거죠. 수현이가 살아 있었다면 벌써 장가도 가고 자식들도 낳았을 텐데… 하고 말이죠.

이수현씨 추모 모임이나 장학회가 가능하면 오래도록 지속됐으면 좋겠습니다. 서로서로 따뜻한 온기가 돼줬던 것 같아요. 그것이 우리 부부가 살아가는 힘이 돼줬고요. 특히 어려운 유학생들을 돕는 장학회는 계속됐으면 좋겠어요. 어떻게든 저희 부부가 살아 있을 때까지는 이끌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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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유진 기자 ■사진 / 원준희 ■사진 제공 / 이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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